[장편] Bitterender #001
리내 2015-02-03 2
Prologue
때는 18년 전.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지구 곳곳에 정체 모를 ‘문’이 열린다. 이후 ‘차원문’이라고 불리게 되는 그 문으로 이차원(異次元)의 생명체가 흘러들어오고, 이 생명체들은 전 세계를 습격한다. 차원물을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차원의 생명체들에게는 총격 등의 통상적인 공격 수단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도시는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폐허로 변한다.
하지만 차원문의 개방이 나쁜 일만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인류가 이차원 생명체들에 의해 벼랑 끝에 몰리기 직전, 극소수의 인간들은 차원문이 열리면서 발생한 ‘위상력’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초월적인 능력들을 얻는다. 각국 정부는 위상력에 눈을 뜬 이 능력자들을 이용해 이차원 생명체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막대한 희생 끝에 결국 차원문을 닫는 데 성공한다.
엄청난 피해를 낳은 이 전쟁이 끝난 이래, 문을 ‘닫는다’는 뜻에서 이능력자들은 ‘클로저(Closer)’로 불리게 되고 이차원 생명체의 습격에 따른 전쟁에는 ‘1차 차원전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차원 생명체가 사라진 세상은 평온을 얻었고, 무너진 도시는 신도시로 빠르게 재건된다. 차원문과 위상력에 대해서는 곧바로 조사가 착착 진행됐고, 인류는 위상력이 특이점에 이르면 차원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차원문이나 위상력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불가능했다.
결국 차원전쟁을 견디고 끝가지 살아남은 클로저들은 UN 산하에 조직된 유니온(UNION)에 들어가 지역별 위상력의 특이점들을 찾으며 2차 차원전쟁 재발 방지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2020년 현재,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클로저들은 심상치 않은 위상력 특이점을 감지하게 된다.
Chapter.1 만남
3월의 첫 평일 아침, 강남구 역삼동의 거리는 매우 혼잡한 분위기예요. 직장에 출근하려는 직장인들, 학교에 등교하려는 학생들,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이제야 귀가하는 올빼미족들 등,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어요. 물론 시간이 시간대이니만큼 이에 이상한 점은 없고, 오히려 도심지이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경관이죠.
그런데 그런 혼잡한 도심의 한복판에서 눈에 띄게, 옴짝달싹 못한 채 안절부절거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주택가의 <한신> 아파트 단지 앞에서 종이를 골똘히 쳐다보고선 주위를 둘러봐요. 같은 장소를 서성이면서 벌써 수십 번은 한 동작. 그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안색은 점점 나빠져 가, 지금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답니다.
그래요. 길을 잃은 거예요. 뭐, 평소라면 도심에서 길 잃은 사람이라면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에요. 그냥 길을 알려주면 해결될 문제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간단히 치부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분명히 이 길로 들어오는 게 맞았던 것 같은데⋯.”
──길을 잃고 울상이 된 사람이 바로 저였거든요⋯⋯.
“으⋯ 왜 길이 안 보이지?”
쩔쩔매며 손에 든 약도와 눈앞의 거리를 다시 번갈아봅니다만, 역시 아무리 봐도 약도에는 없는 길이에요. 보통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되겠지만, 저는 이런 복잡한 거리는 익숙지 않아서 어디서 길을 잘못 든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약도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계속 봅니다만, 목적지로 가려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정말로 심각한 사태예요. 어서 목적지인 신강고등학교로 가야 하는데⋯⋯ 일부러 일찍 출발한 보람도 없이 편입 첫 날부터 지각했다고 혼나게 생겼어요.
정말로 그렇게 되면 전 진짜 한심한 애예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용기 있게 발걸음을 옮겨 목적지를 찾아 나섰죠. 그리고 5분 후, 저는 여전히 약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있었어요.
아니, 어쩌면 목적지로부터 더 멀어졌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눈물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신세를 한탄해도 상황은 해결되지 않아요. 힘을 내서 제대로 길을 찾아 보일 거예요!
그렇지만 힘을 낸다고 해도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약도에 표시된 경로는 1시간도 전에 이미 이탈했고, 목적지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네요. 답답한 마음에 푹 한숨을 쉽니다.
“아나, 이 녀석 뭐하는 거야!”
앗, 깜짝이야. 방금 누군가가 고함치지 않았나요?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고함이 들린 쪽을 쳐다보니, 고함의 주인공은 신장이 170cm 중반인 약간 마른 남자애였어요.
“와, 대놓고 트롤 짓하네. 진짜 답 없다. 그래도 내가 캐리하면 아직 가망은 있겠어.”
남자애는 어떤 전자기기를 손에 든 채 중얼거리면서 제 앞을 지나쳤어요. 신강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걸로 봐서는 등교 중인 모양인데⋯⋯. 어?
“앗!”
신강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곧 신강고등학교의 학생이며, 신강고등학교로 가는 중이란 거겠죠!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건 유감이지만, 일단은 지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이거 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기, 잠깐만 기다려!”
“좋아, 한 번 도박 가봐야겠네.”
곧장 따라붙어서 바로 뒤에서 불러 세우려고 해봅니다만, 무엇에 그리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남자애의 어깨에 손을 대고 흔들었어요.
“얘, 잠깐만 기다려 보──”
“우왓! 누구야, 무슨 짓이야! 어, 으아아아아아아악!! 죽었잖아!! 완전 킬각이었는데!!”
갑자기 남자애가 머리를 싸매고 몹시 탄식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나 해서 전자기기를 유심히 쳐다봤더니, 그 전자기기는 PSP였고, 화면엔 사망 표시가 뜬 게임 화면이 켜져 있었어요. 이제 보니 게임에 집중하느라 제 말을 못 들은 거였군요.
남자애는 낮게 탄식하며 부들부들 떨더니, 이쪽으로 홱 몸을 돌렸어요.
“으으으. 도대체 뭐야! 안 그래도 트롤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어?”
그런데 저와 눈이 마주치더니, 어째서인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어요. 어째서일까요? 모르겠네요. 그리고 몸을 돌려서 이제야 명찰이 보이는데, ‘이세하’라고 적혀 있어요. 이 남자애의 이름인 거군요. 음, 저와 같은 이 씨에 흔하지 않은 이름이네요.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몰라요.
“너, 신강고등학교 학생이지?”
“어? 아. 그, 그렇긴 한데 왜?”
“나랑 같이 등교해줄 수 없을까?”
“뭐? 등교?! 가, 같이?! 그게 무슨…”
어라? 왠지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거절하려는 것 같아요.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애── 세하에게는 어려운 부탁일까요?
하지만 포기할 순 없습니다. 만약 여기서 세하를 놓치면 제시간에 등교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꼭 세하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안 되겠니? 나, 네가 아니면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세하는 더욱 당황해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뭔가 떠올린 듯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자, 잠깐! 갑자기 같이 등교하자든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든가 그런 소리해도⋯ 나와 넌 첫 만남이고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아⋯⋯ 그런 거구나. 지인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안 쓰는 주의였구나. 좋지 않은 가치관이지만, 개인의 의사는 존중해줘야겠지. 미안해, 시간 낭비하게 해서. 길을 물어볼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어떻게든 노력해봐야겠죠.
“아,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응? 길을 물어?”
세하는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하아⋯⋯, 그런 의미였나. 난 또 뭐라고.”
“응? 그런 의미라니?”
제가 의아해하며 묻자 세하는 양손을 휘휘 저었습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우리 학교 교복인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는데 혹시 전학 오게 된 거야?”
“응. 오늘부터 신강고등학교에 다니게 됐어.”
“그래서 헤매고 있었던 거구나. 지리 미리 알아보고 오지 그랬어?”
“아, 관리⋯⋯ 아는 사람에게 약도를 받았긴 한데, 도통 모르겠어서.”
“약도? 약도가 있는데도 헤맸단 말이야? 어디 한 번 줘봐.”
세하가 시키는 대로 손에 들고 있던 약도를 건넸더니, 세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뭐야, 이게?! 유치원생도 이보단 더 잘 그리겠다. 이건 약도가 아니라 낙서 수준이잖아. 길을 못 찾는 것도 당연하네.”
세하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도를 다시 제게 돌려줬습니다.
“흠. 저⋯⋯, 길을 모른다면 같이 가자.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으니까.”
“어, 그래줄 수 있겠어? 지각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는데⋯ 정말 고마워.”
정말로 다행입니다. 조금 전엔 거절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어차피 가던 길 가는 것뿐인데 뭐⋯. 그럼 따라와.”
“응.”
대답과 함께 저는 쓸모없게 된 약도를 마이 속주머니에 넣고선 세하의 옆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세하는 다시 PSP를 보면서 가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저도 세하의 보폭에 맞춰 같이 걸었어요.
그렇게 횡단보도를 지나고, 모퉁이를 도는데⋯⋯
“저기 말이야.”
돌연, 세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어다.
“응? 왜?”
“그⋯⋯ PSP 좀 그만 쳐다봐주지 않을래?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되거든.”
“아, PSP 화면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까지 보였다니 시야각이 넓구나.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해.”
하긴 책을 읽을 때도 눈에 띄는 무언가가 옆에 놓여 있으면 집중이 안 되니까요. 게임을 할 때도 비슷한 이치인 거겠죠.
“아니, 시야에 들어와서 그렇다기보다는 옆에서 여자애가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이 이상 말 않는 편이 좋겠네, 이건. 아무튼 집중하게 뒀으면 해.”
“응, 알았어.”
제 대답을 듣고 나서 세하는 다시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세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더 이상 PSP 화면을 ** 않고 묵묵히 그 옆을 따라 걸었고요.
그렇게 좀 걷다 보니, 하나둘씩 거리에 세하 이외에 신강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애들이 적지 않게 보였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저희는 마침내 목적지인 신강고등학교에 도착했어요.
“(어? 우리 학교에 저런 애도 있었나?)”
“(그러게. 분홍색 머리라니 학생부에 걸리지 않나?)”
“(전학생인 것 같은데 일진이었던 건 아닐까?)”
학교 앞까지 오니 자동차 소리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잡담 소리까지 더해져 정말 시끌벅적했어요. 저로서는 적응이 잘 안 되는 분위기예요.
“1학년 교실은 다 2층에 있어.”
교문을 통과하자, 세하는 PSP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말했습니다.
“어? 내가 1학년인 건 어떻게 알았어?”
엄청 신기한 일입니다. 그냥 대화 몇 마디하고 같이 걸었을 뿐인데 어떻게 1학년인 걸 알았을까요?
“그야 네 키를 보면⋯ 아니, 그냥 감으로.”
“흐응. 예리한걸.”
사실이라면 매우 날카로운 감각이에요.
“아무튼 정말 고마웠어, 세하야. 난 교무실부터 가봐야 돼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그래⋯ 잠깐,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아. 맞다, 명찰.”
“후훗, 그러고 보니 난 아직 명찰을 달지 않아서 모르겠네. 안내해준 보답으로 특별히 알려줄게.”
저는 얇은 미소를 지으면서 뒷짐을 진 채 세하의 앞에 마주 섰어요.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또래 남자애에게 이름을 알려줬습니다.
“내 이름은 ‘이슬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