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여름방학 (1)

수지고등학교 2016-09-11 3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바다의 계절.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바다에서 뛰노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여름방학을 맞이해, 친구들과 함께 바다로 떠난다.

강렬한 햇빛, 사파이어 같은 수면.

그리고 신경 쓰이던 그 아이의 수영복 차림.

그 모든 것들을 즐기며 방학을 만끽하는 것이다.

 

낮에는 지치는 줄 모른 채로 실컷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바다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그 가격에 불평하기도 한다.

해가 지면 다 같이 방에 모여 트럼프를 하거나, 노래방에 가서 평소 보여주지 못했던 실력을 뽐내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모아놓고 수다를 떤다.

물론 진실게임이나 사랑 얘기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밤새도록 놀겠다고 맹세했던 녀석들이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잠드는 것도 꽤 흔한 일이다.

 

다른 녀석들이 잠들고 나면, 그 애와 단둘이 바닷가에 나가 조용한 밤바다를 감상한다.

별이 잔뜩 박혀있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터지는 폭죽은, 둘의 모습을 조용히 비춘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조금씩 다가가고, 이내 둘의 거리는 제로.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사랑의 계절.

바야흐로 여름이다.

 

          *           *

 

더워…….”

 

신강고등학교 2학년 C반의 학생이자, 국가차원관리부 특수처리반 검은양팀 소속요원 이세하는 그렇게 말했다.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라면 방학을 만끽하고 있을 이 시기.

 검은양팀 소속 클로저가 세 명이나 재학 중인 신강고등학교도 지금쯤이면 방학기간에 들어갔겠지만, 연중무휴의 대명사인 클로저들은 오늘도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방학은 고사하고 월차와 휴가도 반납.

그들에게 있어 여름은 바다의 계절도, 사랑의 계절도 아닌 그저 더위의 계절일 뿐이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클로저들이 싫어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인데, 살인적인 더위도,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차원종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기가 짜증난다.

더위와 차원종, 거기에 모기까지.

만약 데이비드가 유니온을 배신한 시기가 여름이었다면, 대부분의 클로저들은 , 그럴 만도 하지~”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클로저들이 아스타로트만큼이나 싫어하는 것이 바로 여름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검은양팀을 짜증나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더위였다.

어지간해서는 임무 중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팀의 리더인 이슬비조차, 채 감추지 못한 짜증이 얼굴에 역력하다.

평소라면 에어컨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쾌적한 사무실에서의 시간을 보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어쩔 수 없잖아, 동생. 수리 기사가 내일 온다는데.”

그건 알지만요…….”

 

그렇다, 현재 검은양팀 사무실의 에어컨은 이번 여름 동안 너무 사용한 탓인지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

오늘 아침 이상한 소리와 함께 파업을 선언한 에어컨을 수리하기 위해 슬비가 수리 기사에게 연락했지만, 일이 밀려있는지 내일이나 돼야 올 수 있다는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사무실의 창고를 ** 선풍기를 세 대 찾아낸 세하였지만, 그 중 사용이 가능한 건 한 대밖에 없었다.

한 대는 아무래도 고장이 난 모양이었고, 다른 한 대는 선풍기가 아니었다.

몸체가 붉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눈치 챘으면 좋았을 것을, 선풍기로 알고 있었던 녀석이 실제로는 선풍기 모양의 히터라는 사실을 알아챈 건 사무실 내의 체감온도가 5도 정도 상승한 뒤였다.


결국, 검은양팀 전원이 말 그대로 열을 받은 상태.

당연히 더운 바람만 만드는 선풍기 한 대로 다섯 명이 만족할 리 없었다.

 

……더워.”

더워! 세하야, 나 더워 죽겠다구!”

세하 형…… 부채 같은 건 없나요……?”

 

평소 같았다면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을 하는 리더에 이어 덥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서유리의 모습을 보며, 세하는 저런 걸 가슴에 달고 있으면 더울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더위 때문에 [우웅?]이라는 특유의 말버릇이 사라진 채로 부채를 요구하는 미스틸이었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이미 누군가가 쓰고 있었을 것이다.

연장자로서의 관록 때문인지, 그나마 제이는 군소리 없이 더위를 참고 있는 모습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건강의 아침 체조를 할 마음은 들지 않는 모양이다.


태양이 살인미수로 잡혀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는 상황이니, 그냥 냉장고에 들어가 버릴까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쯤 냉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티나가 부러워지는 검은양팀이었다.

 

짜증나…… 게임할 생각도 안 드네.”

잘됐네, 이세하.”

잘됐다, 세하야!”

잘됐군, 동생.”

잘됐네요, 세하 형!”

…….”

 

짜증나는 더위 탓에, 세하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뜨거우면 이제 와서 게임기의 전원을 켤 수도 없었다.

어쩌면 반응이 뜨거운 게 아니라 실제로 사무실이 뜨거운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무과금 유저가 플레인게이트 지나치지 못한다고, 처음 몇 분은 게임기 없이 버틸 수 있었으나, 결국 10분이 넘어가자 스리슬쩍 게임기를 꺼내들고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한 세하였다.

그런 세하의 모습을 본 슬비는 리더로서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안 그래도 더운데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아 잠자코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열중했다.

임무 중 게임을 하는 세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평소의 슬비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찌는 더위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지만, 격렬한 조작을 할 때마다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세하는 결국 게임을 끄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넘겨봤지만,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이마에 달라붙을 뿐이었다.

결국 머리를 넘기는 것은 포기한 세하는, 풍경이나 보자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창 밖에서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건강이 제일이라는 신념이 더위를 이긴 모양인지, 체조를 하고 있는 제이의 모습이 세하의 시야 한 구석에 들어왔지만, 세하는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한 채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그나저나, 이 앞머리 좀 어떻게 안 되려나.’

 

가급적이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세하는 계속해서 앞머리를 매만졌다.

앞머리를 매만지는 데에 열중해 자신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세하를 바라보며, 슬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봄날의 짧았던 데이트 이후로, 세하는 단 한 번도 머리핀을 쓰지 않았다.

 

역시 분홍색은 좀 그랬을까.’

 

세하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기껏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머리핀을 선물했지만, 슬비는 그 선택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비 역시 [이세하]하면 떠오르는 색깔인 파란색 머리핀을 골랐지만, 아무래도 세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슬비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속 편하게 있는 세하가 야속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슬비 역시 세하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한 번도 세하 앞에서 머리핀을 쓴 적이 없었는데, 세하가 쓰지 않는데 자신만 쓰는 것도 왠지 분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언제쯤 써주려나.’

 

세하가 쓰면 같이 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슬비였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샌가 소파로 돌아와 게임기를 잡은 세하는 다시 게임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루함이 앞머리의 답답함을 이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답답한 건 답답한 건지, 게임을 하면서 거칠게 앞머리를 넘기는 세하의 모습을 어느새 보고서를 쓰던 손을 멈춘 슬비가 노려보고 있었다.

 

답답한 연애를 보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의 성격이 급해진다는 말이 있다.

보다 못한 제이는, 체조를 중단하고 이 상황을 타파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쌓아온 내 연륜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대장, 앞머리가 답답해 보이는데? 저번처럼 한 쪽으로 넘기지 그래.”

, ?”

왜 있잖아, 그 파란색 머리핀.”

 

그렇다, 사실 슬비는 세하가 없을 때는 머리핀을 쓰곤 했던 것이다.

세하가 없는 외로움을 선물로 달래며, 거울을 보고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을 유리에게 들키고, 지나가던 제이와 미스틸이 그 모습을 보고,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우웅~? 슬비 누나 뭐하는 거예요?”라고 묻는 미스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슬비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결국, 현재 이 사무실 안에서 슬비가 머리핀을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세하뿐이었다.

게임을 하고 있던 세하는 제이의 말을 듣더니 게임을 멈추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머리핀을 찾는 것이리라.

그런 세하의 모습을 본 제이는, 속으로 뿌듯해하며 다시 체조를 재개했다.

후후, 이것이야말로 연장자의 관록이 아니겠는가!

차원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이에게, 이 정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비타민 콤비네이션으로 스케빈저 잡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으음, 어디 갔지…….”

……뭐가?”

……, , 머리핀.”

……겉옷 주머니에 있는 거 아니야?”

, 그런가?”

 

이제야 생각해냈기 때문인지, 세하의 목소리는 약간 작았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하 역시 슬비가 쓰지 않는데 자신만 쓰는 것도 웃길 것 같다는 생각에 굳이 쓰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는 슬비가 쓸 때까지 쓰지 않으려 했지만, 말했듯이 더위 앞에는 장사 없다.

결국 더위를 이기지 못한 세하는 벗어 놓았던 겉옷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검은양팀의 클로저 요원복은 모두 긴 팔에 긴 바지인데다가, 겉옷의 후드에는 양털까지 달려있어 매우 덥다.

심지어 하복도 없기 때문에, 겉옷을 벗고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입어야 그나마 낫다.

원래 고지식한 면이 있는 리더지만, 그래도 더운 건 어쩔 수 없는지 다른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겉옷을 벗은 상태였다.

다만 임무 중에는 뼛속까지 원칙주의자인 슬비는, 와이셔츠의 소매만큼은 걷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팀원들보다 더 땀을 많이 흘렸는데,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와이셔츠는 옷 속의 새하얀 피부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 여기 있…… …….”

……? 왜 그래, 이세하?”

 

겉옷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찾은 세하는 슬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얼굴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차마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세하는, 유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정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지낸 기간이 꽤 있는 둘은, 역시나 척하면 척.

이유 모를 죄책감과 창피함에 고개를 숙인 세하 대신, 유리가 슬비에게 현실을 알렸다.

 

, 슬비야…….”

? , 유리야?”

, 비친다……?”

……?”

…….”

……!”

 

유리의 말을 듣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옷을 확인한 후에야 자신의 몸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모양인지, 얼굴과 머리색이 비슷해진 슬비의 모습을 보고, 세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게임들의 수많은 상황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 이거 사망 플래그구나.

빌 게이츠는 불공평한 세상에 익숙해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슬비의 부조리한 분노와 폭력에도 익숙해져야 하겠지.

 

이세하아……!”

……일단 말은 해두겠는데, 나는 죄가 없다?”

이세하아아아아아아!”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되겠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을 감고 곧 찾아올 격통에 대비하는 세하에게, 슬비는 세하가 들고 있던 머리핀을 염동력으로 투척했다.

제이가 슬비를 말릴 틈도 없이, 이미 비트가 되어버린 머리핀은 세하에게 일직선으로 향했다.

등속운동을 하고 있는 머리핀과 세하의 이마 사이에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무실 안의 모두가 2초 후에는 바닥에 세하가 쓰러져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얘들아! 휴가 나왔다!”

 

벌컥 열린 사무실의 문에 머리핀이 박혔고, 문에서는 우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김유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는 눈치였으나, 바닥에 떨어져있는 파편들과 팀원들의 표정을 보고 방금 일어난 일을 금세 파악했다.

역시 한때는 유니온의 간부급 자리가 결정되어 있던 관리요원답다.

 

저기, 슬비야. 이건……?”

오셨어요. 그런데 휴가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

 

순간적으로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야기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검은양팀은 과연 리더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감탄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세하는 눈을 감은 채로 격통을 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2024-10-24 23:11:1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