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랑 슬비가 잡담할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01 26

차원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후에도 한결같은 것이 있다면, 편의점에서 여전히 바나나 우유가 잘 팔린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바나나가 귀해서 바나나 우유로 맛을 체험했다나 뭐라나. 너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인지라 농담처럼 들릴 지경이다.

빨대로 무언가를 빨아올리는 행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데, 이런걸 무념무상이라 하던가.

때로는 멍하니 있는 것도 좋은 여가가 되는 것 같다.

음....? 설마 이건 낚시꾼의 마음과 일맥상통하는건가? 세월을 낚는다는 뜻이 이거야?

너무 게임을 하다보니 나 좀 굉장한 경지에 이른 거 아닌가?


"어머, 이세하. 어디 아파?"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잘나신 리더님께서 옆머리를 뒤로 넘기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햇살을 등진 탓에 살짝 그늘이 져있다. 사람의 눈은 그늘에 있을 때 더욱 빛난다.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머리카락에서 옅은 라벤더향이 났다. 입만 다물면 참 미인인데, 세상에 완벽함이란 없는 법이다.


"왜?"

"게임을 안하고 있잖아."


 아니나다를까 몸쪽으로 꽉 찬 돌직구! 이슬비는 게임으로 따지면 중간보스 같은 면이 있다.

약속된 패배의 길을 걸으면서 집요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그리고 이런 이벤트는 회피할 수 없는 법이다.


"아니, 매분매초 게임을 할리가 없잖아."

"넌 매분매초 하고 있잖아."

"넌 매분매초 날 관찰하냐?"


 툭 던졌을 뿐인데 팔짱을 끼더니 시선을 살짝 밖으로 흘린다. 혹시 수줍어 하는거야?

그럴리가 없지. 자꾸 그러면 착각해버리니까 그런 미묘한 반응은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어쩐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무서운 표정을 짓길래 분위기를 전환할 목적으로 뇌물을 건넨다.


"자.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이었으니까."


 슬비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다가 툭 던지니 허둥지둥 받는다. 위상력으로 나이프를 던져대는 애치고는 너무 어설프다.

살작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뇌물이 잘 먹힌 모양이다.


"......고, 고마..."

"먹고 살찌라고....농담이니까 먹을 걸로 비트 만들지 마라."


 어머니. 방금 전 바나나 우유로 레일건을 쏘려는 애가 있었습니다....

빨대를 꽂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녀석한테 다시 말을 걸어본다.


"그러고보니까 너 왜 저번에 드럼통 가지고 저글링하고 있었냐?"


 서커스라도 나가려고?라고 농담했다간 정말 드럼통으로 맞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어느새 옆에 앉고는 쪽쪽 우유를 마시고 있다. 입술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본다.


"유정 언니가 나 버스 너무 쓴다고 그래서 대체할 물건을 찾고 있었어."

"너 전에 시내버스다!라면서 광역버스 던지더라."


 이 녀석 모노레일하고 지하철도 구분 못하는 거 아냐 설마. 고지식한 성격치곤 지나치게 세상물정에 어두운 감이 있다.

저번에는 뭘 다운받고는 어디서 저장되는지를 몰라서 허둥대지를 않나. 역시 던지고 부수는 것 전문인거냐.


"싸우는 중에 나, 나한테 집중할 틈이 있니?"


 뭘 또 새초롬하게 대꾸하고 있어. 이쪽으로 눈을 흘기기에 마주** 못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다.


"너 차원종 뭉개면서 스트레스 풀고 그러냐?"

"너야말로 나보다 더 심하잖아."

"내가 뭐."


 이 으스대는 말투는... 뭔가 불안한데.


"별☆빛에....잠겨라..."

"이게... 야, 하지 마라."


 또 근엄하게 흉내내셨겠다?! 이게 여자만 아니었어도 벌써 한 방 치는건데.


"어머, 왜?"


 빈 바나나 우유통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고있다. 허둥지둥 변명해본다. 


"후.... 야, 분위기 타면 그럴 수도 있어."

"흐응-. 그래."


 절대로 비웃고있다. 절대로 비웃고있어. 이 페이스대로라면 말린다. 반격을 해야해.


"시내버스 노선을 붕괴시키는 애가 할 소리인가."

"네가 그 손맛을 몰라서 그래."

"수많은 직장인들이 교통대란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봇대라도 던져야할까?"

"진지하게 하는 소리냐? 정전 되면 게임을 못 하게 된다고."

"그런 전봇대를 던져야겠다."


 또 싱긋 입가에 그믐달이 걸린다.

착한 슬비는 아무 것도 몰라요-하는 미소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두근거리고는 한다.


"전봇대 뽑을 시간에 똑똑한 머리 좀 잘 굴려봐. 그리고 너 저번에 내 게임기 던졌지?"

"그, 그건 사과했잖아. 누가 현장에 게임기 가져오래?"

"위상력으로 내 게임기를 부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뭐래."


 죽어도 물어준다고는 안 한다. 정말 자존심을 이상한 쪽으로 쓴다고.


"맨날 나 게임한다고 뭐라 하는데, 넌 쉴 때 뭐하냐?"

"드라마를 봐."

"그러셔."

"너도 드라마를 봐."


 무슨 랩하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드라마를 권하고 있다.

사실 게임이나 드라마나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일단은 장단을 맞춰줄까.


"왜 갑자기 권유를...음... 어떨까..."

"어머 왠일이야? 드디어 갱생하기로 맘먹은 거야?"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열받는다.


"오히려 타락하는 거 아니냐."

"일단 사랑과 차원전쟁으로 입문하자."


 눈 빛내지마. 얼굴 들이밀지마. 처음부터 난이도 높은 걸 권하지마.


"그건 제일 뒤로 미뤄주면 안될까.... 영화는 어떠냐."

"영화도 좋아."

"넌 무슨 영화 보는데."

"고전영화."

"고전영화라 하면 그거냐? 아빠, 일어나!하는 그거."


 아빠 일어나!하는 그 굉장한 영화를 알고있단 점에서 허투루 유행타는 영화만 보는 애가 아니란 건 잘 알았다.

아니, 스티븐 시걸도 나온다고? 우주명작이라고? 꼭 봐라, 두번 봐라. 나만 당할 수 없지.


"죽고싶니?"


 너무 살의가 느껴저서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말할 뻔했다.
 

"넌 농담을 알아듣는 뇌가 결여되어 있는 거 아니냐?"

"넌 농담을 하는 뇌가 결여되어 있겠지."

"그런데 어쩐지 네 취향을 알 거 같기도 하다."

"뭐?"

"구질구질하고 질척질척한 거."

"넌 나한테 하루 한번 시비를 거는 병에 걸렸니?"

"네가 하루 한번씩 내 멱살을 잡아서 그래."

"멱살 잡힐 일을 하지마 좀생이."


 가방을 뒤.져서 게임기를 만지작거린다. 낙원이 내 손끝에 있구나.

역시 이 녀석과 말하다보면 열 받으니까,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게 된다.


"너 요즘 보는 드라마 얘기나 해봐."

"그럼 역시 사랑과 차원전쟁이지?"

"그거 말고 좀 다른걸 권해주면 안되겠냐..."

"그런데 왜 게임기를 꺼내고 있어?"

"자연스러운 흐름 아니냐?"

"자연스럽게 누굴 라디오 취급하는거니?"


쓸데없이 예리한 기집애... 유리라면 벌써 속아줬을텐데.


"팀원의 심신건강 관리도 리더의 역할 아니냐?"

"팀원답게 있어야 뭘 해주지 않겠니?"

"그럼 뭐, 게임기 집어넣으면 나보고 뭘 하라는건데. 하루 종일 리더님만 보고있으면 되나?"

"뭐, 뭐?"


 뭔가 단단히 착각했는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아대며 난처한 표정으로 열기를 발산한다.

심장에 안 좋으니까 그런 거 해주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한동안 말없이 어색한 기류를 유지하고 있는데, 구원의 손길이 날아온다. 동아줄 등판!


"오오,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아저씨 오늘 건강해보이시네요."

"아저씨 아냐 임마. 오늘 새로 개발한 녹즙이 효과가 좋은 거 같은데. 어때, 너도 한잔 할래?"

"참아주세요."


 제이 형.... 아저씨는 여느때처럼 형이라 불러줄 수 없는 취미생활을 전파하고 있다. 이쯤되면 종교 아냐?

이 나이때 남자들이 전부 이렇게 살짝 쓴 냄새랑 파스냄새가 나고 그러나? 이게 어른의 향기인가?

자연스럽게 슬비에게도 권하고 있다. 슬비는 당연하단듯이 광속으로 도리질을 쳤다.


"아, 맞아. 실은 녹즙이 문제가 아니고. 니들 이거 받아라."

"네?"

"영화표야. 실은 유정씨라 보러가려고 했는데, 이번에 시간이 안 맞아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거든. 표가 아까우니까 너희 둘이 다녀와라."


 슬비는 흐응, 하고 뭔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제이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이내 핫!?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음. 둘이서 영화. 둘이서 영화...

어.......


"제가 얘랑요? 왜..."


 대신 딴지를 걸어줬을 뿐인데 팔꿈치가 갈비뼈에 박혔다. 불합리하다.


"맞아요. 얘는 영화관 안에서도 게임을 하고있을 애인데요?"

"야, 아니거든?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슬비가 또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보고있다. 아저씨는 곤란하단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인다.


"음. 별로 내 취향 영화는 아닌데말야. 그럼 일단 유리한테도 권해볼까..."


 슬비가 조삼모사의 원숭이마냥 태세변환을 시전했다.


"잠깐 기다리세요.제가 리더니까, 일단 제가 받을께요."

"엉?"

"그리고 남는 시간이라던가 고려해서 배부할께요."

"음, 뭐 그래라 그럼."


 이야 쿨하다. 제이 아저씨 진짜 아저씨. 손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가나 싶더니 이쪽을 보고 윙크를 한다. 대체 뭡니까.

이제 영화표가 슬비의 두 손 안에 있다. 어째선지 꼬깃꼬깃해져 있는데요, 이슬비씨.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다가 이내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별로 착각해주지 말아줬으면 싶겠지만 영화는 좋은 문화산업이고 영화 상영시간 동안만이라도 네 답이 없는 게임 중독을 교정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니까 리더로써 내 말을 오해없이 침착하게 들어주었으면..."

"아니....결론만 말해도 되거든...."


 말을 끊으니 꼬깃꼬깃한 영화표 두 장 위로 연분홍색이 스며든 눈동자가 떠오른다.


".......갈래?"







*


제이유정도 좋고 세하슬비도 좋고 세하유리도 좋고 세하정미도 좋고 유리정미나 유리슬비도 좋고...

모든 커플링은 사랑입니다.

2024-10-24 22:22:3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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