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의 기사(Knight of Janus)-13편

에피메테이아 2016-07-28 0







오랜만에 오는 것이니 1편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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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생각이 갑자기……?’

곤란한 낯빛이 소피아의 얼굴에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방금 전 떠오른 생각에 집중했다. 이렇게 불시에 날아드는 생각은 소피아로서도 흔치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 하하…….”

소피아가 애써 그것을 부정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임에도 쉽사리 신뢰할 수 없었다. 힘없는 웃음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마저도 잃어버렸다.

예지(豫智).

그녀를 현자로서 불리게 만든 수많은 능력 가운데 하나. 방금 스쳐지나간 생각은 그 예지에 의한 것이었다.
위상능력자들의 본격적인 등장, 헤카톤케일의 서유럽 출몰, 차원전쟁의 종결 등등… 굵직한 사건마다 소피아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차원종들은 손바닥 읽듯 행동이 읽히는 절망에 시달려야 했고, 인간들은 앞길을 그림자 하나 없이 밝혀주는 그녀를 칭송했다. 등불과 같았던 그 능력이, 지금은 소피아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가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구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인지.’

누구보다 믿어야할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런 우스운 꼴이 되었다. 전우라는 이름의 꼬리표가 그녀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알면서도 쉽사리 벗겨내지 못하는 편견이었다. 사실, 벗겨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시 옮기는 발걸음은 애써 가벼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생각도 행주로 창문을 닦아내듯 억지로 지워나갔다.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예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생애 처음은 아니지만, ‘이곳’에 있어온 이래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는,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다.






“차원종 토벌에 훈련에, 요새 일정이 무지 타이트하네.”

그 후로 약 2주일 동안.
검은양 팀은 훈련과 실전을 반복하는 바쁜 나날을 이어갔다. 차원종 출현이 없는 날에는 훈련이 있었고, 훈련이 없는 날에는 차원종 출현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불시에 출동하는 일은 줄었다는 사실 정도? 덕분에 휴식시간은 충분히 보장되었다.

“으으! 요새 세이브 해본 적이 손에 꼽는 것 같아.”

게임을 실컷 할 정도의 시간은 없었지만.

“쉬는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거로 되었지. 이사님이 게임을 금지하신 것도 아니잖아. 뭘 더 바라니?”
“클리어할 정도의 시간은 부족해. 그게 문제라고.”
“그럼 이참에 게임을 줄이면 되겠네. 딱 좋은 기회 아닐까?”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 아니다? 너도, 너한테 TV시간을 줄이라고 하면 싫어할 거 아냐.”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세하와 슬비는 또 티격태격해댔다. ‘서로 티격태격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거 아니냐?’면서 유리가 미스틸테인과 뒷담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있었다. 훈련을 받으러 가는 도중에도 말은 쉴 새 없이 두 사람 사이를 오고갔다. 게임을 줄이란 태연한 슬비의 말에, 세하는 그녀가 좋아하는 TV이야기를 꺼내며 받아쳤다.

“필요하면 줄여야지. 일이니까.”
“…….”

씨알도 안 먹혔다.

“캬하하하!! 세하 네가 슬비를 잘 몰라서 그래. 우리 리더님은 뭐든지 임무가 우선시잖아. 너처럼 게임하면 사족 못 쓰는 것하고 이야기가 다르다고.”

둘을 지켜보던 유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세하가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 재미있는지, 그녀는 연신 세하의 등을 두들겨댔다. 만년 검도생인 그녀는 손바닥도 참 매웠다. 등을 울려대는 충격에 세하는 이마를 찡그렸다. 슬비에게 할 말이 없어진 것도 그의 찌푸린 표정에 크게 기여했다.

“쳇! 몰라서 미안하다.”
“세하 형, 그래도 주말에는 훈련이나 차원종 출현도 없잖아요. 그때 같이 게임하는 게 어때요? 저번 주말에 롤인가 뭔가도 결판 못 냈잖아요.”

툴툴대는 세하를 위로해주는 건 같은 남자인 미스틸테인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라서 그런지, 그는 요새 세하와 같이 게임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게임 동지가 생기자 세하의 부루퉁했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맞다, 그랬었지! 이번 주에는 꼭 이길 테니까 각오하라고.”
“저도 지지는 않을 거예요.”

둘이 서로를 향해 투지를 불태웠다. 지난 주말에 두 사람이 세운 전적은 3:3. 무승부라는 묘한 결과였다. 게임에서 2등이라면 서러워하는 세하나, 승부 같은 것에서 지기 싫어하는 미스틸테인이나 열의가 대단했다. 둘이 게임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에, 슬비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숙여진 고개에선 그녀를 휘감은 좌절감이 느껴졌다.

“기껏 이세하 게임시간을 줄였더니, 이젠 테인이까지.”
“뭐 어때? 테인이가 세하처럼 폐인 수준인 것도 아니고. 즐길 때는 즐길 줄도 알아야지.”

유리는 슬비를 위로한답시고 뒤에서 껴안았다. 볼까지 비벼대면서 체온을 전달하는 모습이 꼭 고양이나 강아지 같았다. 거리낌 없는 스킨십에 슬비가 얼굴을 붉혔다. 살갗이 맞닿는 느낌도 느낌이었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유, 유리야.”
“응. 왜?”
“…아니야. 아무것도.”

등 뒤편을 압박하는 묵직함, 그러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 슬비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등 뒤에 있었다. 그 풍부한(?) 무게감은 그녀의 좌절감을 두 배로 급상승시켰다.

“우리 대장이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대장, 오늘은 어디서 훈련한다고 이야기 들었어?”

고개가 갈수록 숙여지는 그녀를 보며 제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가 화제를 바꿔준 덕택에, 슬비는 다시 원래의 그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그녀가 손에 들린 수첩을 보았다. 조금 전에 전화로 들은 주소가 거기에 적혀있었다.

“흠흠! 오늘은 잠원한강공원으로 모이라고 하셨어요. 이번에는 다수vs다수 전투로 연습한다고 하는데…….”
“단체전?”

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해들은 훈련 항목대로라면, 검은양 팀의 상대도 여럿이어야 했다. 그런데 교관은 소피아 한 사람 뿐. 나머지 인원을 어디서 더 불러올지가 호기심을 건드렸다. 분신이라도 쓰려는 걸까? 소피아가 보여주는 마법을 많이 보아온 제이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설마, 어르신께서 여러 명 몰려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서 각자가 다른 무기를 들고 다른 방식으로 싸우시겠죠. 나중에 우리가 강해지면 막 100명까지 숫자 늘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골똘히 생각하는 제이를 보며, 슬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녀는 그에게 나름 유머러스한 대꾸를 해주었다.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약간 더 발전된 모습이었다. 제이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성장기의 딸을 보는 아빠 같은, 푸근한 미소였다. 그 또한 슬비의 농담 아닌 농담에 재치 있게 반응했다.

“100명이 아닐지도 몰라. 가끔 어르신께서 폭주하면 인정사정 안 봐주시거든. 잘못하면 어르신 1000명하고 싸울 수도 있을걸.”
“그, 그건 좀 무섭지 않을까 싶어요.”
“같은 얼굴이 1000개나요? 우와! 되게 신기하겠다.”
“옛날에는 그것보다 더 무섭고 신기하실 때도 많았다고. 대장하고 유리가 어르신에 대해 다 알려면 아직 많이 배워야할 거야.”

제이, 슬비, 유리. 이 세 사람은 그렇게 수십 명으로 불어난 소피아를 머릿속에 그렸다 지우는 걸 반복했다. 한창 이야기가 물이 오르려는 그때.

“분신으로 훈련에 임하시진 않을 거야. 마스터께선 분신 사용을 가능한 한 자제하시거든.”

이야기에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

세하도, 미스틸테인도 아닌 사람의 목소리. 그걸 들은 셋은 흠칫했다. 앞에서 게임 이야기로 삼매경에 빠져있던 세하와 미스틸도 놀랐다. 검은양 팀 모두가 무기를 빼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평소에는 일반인을 위해 무기를 감추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기척도 없이 끼어든 목소리는 그런 규칙도 망각하게 했다.

“바로 대처하시는 건 훌륭하네. 뭐,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방심한 것은 감점이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검은양 팀의 왼편, 빌딩과 빌딩 사이에 난 좁은 골목… 그곳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쇳덩이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슬비가 맨 먼저 정체파악에 나섰다.

“누구시죠?”
“경계할 필요가 없는 사람.”
“아군입니까? 아군이라면 관등성명을 대주십시오.”

신분을 물어보는 질문이 날카로웠다.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나이프가, 여차하면 상대를 쏴버릴 기세로 위상력을 머금었다. 걸어오던 인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싸울 의사가 없단 몸짓이었다.

“아이고 이런, 갑자기 등장해서 다들 놀랐나 보다. 미안,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나도 몰랐어.”
“장난이 지나치면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우리 대장이 이름 물어보는데 대답이나 하지 그래?”

능청스런 변명에 제이가 날이 선 말투로 받아쳤다. 평소의 능글맞은 그하고 전혀 반대되는 모습,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접근해온 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성을 앞서는 본능적 반응. 그것은 오래 전 전쟁을 겪으며 얻은 직업병이었다. 제이의 뾰족한 태도에 자신의 실수를 직감한 상대편은, 더 망설이지 않고 정체를 밝혔다.

“이거야 원. 가까이서 말했다간 바로 얻어맞을 뻔했네. 알았습니다요. 똑바로 소개할게요. 제 이름은 후안 타나스.”

이름을 말한 인영이 골목에서 대로로 나왔다. 햇빛을 받은 백인 특유의 흰 피부와 헝클어진 금색 머리카락, 거기에 훤칠한 체격과 늘씬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몸에 착 달라붙은 날렵한 철갑옷도 젊음을 돋보이게 했다. 선명한 주황색 눈동자가 검은양 팀 인원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얼굴에는, 웃음과 함께 주체하기 힘든 장난기가 맴돌았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새하얬다.

“백십자 기사단의 초짜 십인대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여기란다, 여기!”

공원에는 소피아와 유정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양 팀은 약속이나 한 듯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전부 후안과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양 팀과 후안을 발견한 소피아가 그들을 불렀다.

“어르신.”
“그래. 생각보다 늦게 왔구나. 시간이야 여유롭게 주긴 했다만.”
“저기 저 금발머리 친구랑 중간에 만나서 말이죠. 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 친구는 대체 누구입니까? 자기더러 어르신 부하라고 소개하던데.”
“맞느니라. 백십자 기사단 척후부대 십인대장 후안 타나스. 작년에 성인이 된 어린 아이라서, 첫 실전을 겸해서 데려왔지. 나이 차가 크지 않으니 검은양 팀우너들하고 어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다. 그래서 마중보낼 인원으로 선택했지. 그리고 과인이 보기에는…….”

제이의 황망한 물음에, 소피아는 여느 때와 같은 웃음으로 응했다. 제이 뒤편을 쳐다본 그녀는 웃음을 더욱 짙게 지었다. 말꼬리가 흐려짐과 동시에 가느다란 흰 손가락이 그곳을 가리켰다.

“헤에? 이 나이에 위상력이 각성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어. 유리 너, 되게 얼떨떨했겠다.”
“말도 마. 우리 집도 발칵 뒤집히고 학교에서도 다들 놀라더라니까. 유니온에서 집으로 사람도 보내고,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빴었어. 후안 너도 나 같은 경험 해봤으면 학을 뗐을 거야.”
“그래도 요즘보다는 낫지 않아? 우리 마스터는 한 번 훈련시키면 스케줄 무지 빡빡하게 잡으시거든.”
“아니? 쉬는 시간은 꾸준히 주셔. 일요일은 훈련도 딱히 없고.”
“와~ 그건 부럽네. 우리는 훈련할 때 주말 같은 거 없었는데. 이거 차별 아냐?”

거기선 한바탕 국제 교류(?)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 후안 군이 정상인 거야, 유리야. 훈련은 꾸준히 해야 실력이 늘어.”
“아니지, 아니야! 사람에게 휴식은 필수라고. 필수!”
“후안 형, 왠지 세하 형하고 닮으신 거 같아요. 세하 형도 게임 이야기할 때 그렇게 불타오르시던데.”
“게임? 나도 게임 좋아하지! 저 녀석은 어떤 게임 주로 좋아하는데?”

첫 등장부터 경계심을 사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후안은 아이들과 어울려 신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비슷한 나이의 유리하고는 죽이 잘 맞았다. 세하는 같은 남정네라 그런지 아직 어색했고, 슬비는 리더의 의무감으로 어정쩡하게나마 함께하고 있었다. 미스틸테인은 뭐, 복잡한 생각 없이 형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중이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이뤄지자, 제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보인 예민한 반응이 머쓱해졌다.

“보렴. 과인의 말대로 잘 어울리고 있잖니?”
“하하하… 저 친구한테 제가 까칠했었거든요. 이거, 저만 나쁜 놈이 되는 거 같아서 기분 묘하네요.”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다. 보나마나 후안이 몰래 접근해왔겠지. 저 아이, 아까도 말했듯이 척후가 주요 임무라서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저쪽도 직업병으로 그랬다는 뜻이었다. 제이는 부끄러움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소피아는 한참을 깔깔 웃다가 손뼉을 소리 나게 쳤다.

“후안!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너라. 다른 단원들도 검은양 팀하고 안면을 터야하지 않겠느냐?”



2024-10-24 23:10:1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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