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할아버지. 괜찮아요, 슬비 누나.

사우세지랜서 2015-10-30 3

제목 - 괜찮아요. 할아버지. 괜찮아요. 슬비 누나.


0.


<피지컬 트랜스뮤트, 성공.>

<심메트리 수치 안정. 심전도, 뉴런 반응 정상 확인.>

<실험은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기적이었다.


우리 독일의 기술력과, 인간의 노력, 그리고 천운이 따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그야말로 기적.

그 체현이 눈앞에 있었다.

“아아…. 드디어.”

“길었군. 너무나 길었어. 여기까지 오는데…. 그러나 해내고 말았군.”

“그래. 해냈어. 해냈다고!”

그 자리에 있던 연구진의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 안고서 눈물을 보였다.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인류를 지켜줄-

마지막 무기가.


유럽에 있었던 대재앙 이후. 아니 세계를 휩쓸었던 차원 전쟁 이후. 그 마지막에 있었던 지옥의 광경을 다시 **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과물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나는 내 앞. 액체로 가득찬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들어 있는 소년을 보며. 그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화 유리막에 얼굴과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어서 오렴. 환영한다, 미스틸테인. 우리-인류-를 지켜줄 겨우살이 나무….”

분명히 잠들어있던 그 소년은, 하지만 아주 잠깐 웃은 것 같았다.


1.


<차원종은 당신의 적입니다. 멸절해야할 대상입니다.>

<서유럽에 재앙을 가져온 헤카톤케일은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스케빈저들은 인간들을 유린했고->

<스컬 퀸은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새하얀 벽면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방. 출입문과 벽의 구분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곳에서, 소년은 자리에 앉은 채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구. 인류가 살아가는 그들의 터전에 나타났던 외적들. 차원종의 모습이 하나하나 비치고 있었다. 소년은 그걸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쓰러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 세상에 ‘오고 나서’부터, 줄곧.

그리고 그 영상이 끝났을 때. 벽면의 한쪽이 열리며, 스케빈저 타입의 차원종이 들어섰다. 제각기 무기를 든 그것들은 두리번거리다가 ‘먹이’를 발견했다.

방 안에는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미스틸테인. 그것이 네가 상대해야할 적이다. 섬멸해라.>

“네. 할아버지.”

감정없이 답한 소년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새하얗던 벽면은 붉게 물들었다. 그 사이에서 소년은 창과 함께 서서 피를 흩뿌린 주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이 잔혹하게 보인 것은, 언제부터였던 걸까?


*


“이런 짓은 이제 그만두게! 계속해서 이 일만 반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미 사명에 대한 주입은 충분히 했어. 이미 ‘처음부터’ 되어있었지 않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명의 재조명이 아니야!”

나와 함께 이 기적을 이뤄낸 ‘연구’의 책임자들. 4명의 오파Opa들에게 나는 소리쳤다.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 그는 구분할 수조차 없는 매직미러 너머에서, 계속해서 살육을 반복하도록 시키는 이 짓거리를. 그러나 그들에게서 다가오는 대답은 차갑다.

“스테판……. 개소리 말게.”

“자네들!”

도저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확연히 보이는 눈빛. 그래. 저것이 ‘정상’이다. 그의 정체를 아는 자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자세다. 어쩌면 내가 잘못된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아이는 아직 어린애야! 아무리 ‘무기’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어! 인간의 피륙을 입은 이상!”

“하아…….”

그들은 피로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감정적인 말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다. 애초에 그들에게 ‘그’는 감정을 이입할 대상조차 아니었으니까.

그가 우리-정확히는 확**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오파(할아버지)라고 부르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무기는 휘두르기 위해 존재한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논리로 접근해야하는가?

슬프게도 나는 그들과 십년 넘게 같이 연구한 사이였고, 그렇기에 그 방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3개월. 3개월만 나에게 시간을 주게. 그럼. ‘무기’의 성능을 높여 보이지.”

“…….”

“나 역시 그를 ‘불러낸’ 자야! 장담하지! 해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일체 이런 소리는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할 ‘교육’이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지울 수도 있지 않나?”

“좋아……. 그럼 믿고 맡기지. 하지만. 3개월이네. 명심하게.”

십 년간 함께 연구한 동료로서의 정인가. 아니면 또다른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인가. 다행히 내 요구는 받아 들여졌고.


나는 3개월간, 그의 ‘보이는 할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2.


3개월은…짧다. 아무런 상식도 없는 소년에게 마구잡이로 지식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아무리 피륙을 입은 아이의 몸, 스폰지와 같이 지식을 흡수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와아. 그렇군요. 이 밖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거군요! 저도 나가보고 싶어요!”

나는 아주 간단한 어휘, 산수, 그리고 인간이 인간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알아둘 필요가 있는 아주 간단한 것들을 그에게 가르쳤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즉, 사회성의 교육이었다.

그 자신과 목소리만 들리는 할아버지. 자신과 한명뿐인 타인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많은 타인이 있고 그걸로 사회가 구성되어있음을 알린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원천적인 욕구. 다른 타인을 만나고 상호작용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에게 삶을 살아갈 힘이 되었다.

사명 외에 그를 지탱할 힘이.

“물론 미스틸. 너도 곧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다. 할아버지들이 하는 말을 잘 들으면 말이다. 알았지?”

“네! 물론이에요! 저, 근데 할아버지….”

“응?”

“부탁이 있는 데요….”

나는 놀랐다. 그가 무언가를 먼저 부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에게 보여주는 화상 너머로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나는 놀라고 있었다.

“응. 뭐지?”

“저.... 영상에서 보던 도시나, 물건들을 따라서 그리고 싶어요. 하지만 바닥에 있는 걸론 ‘빨간색’밖에는 나오지 않으니까.... 다른 색을 쓸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욕구의 발현 그 자체였다.

다음날. 소년에게는 스캐치북과 크레파스가 주어졌다. 

그 소년이 가장 처음 그린 그림은-


<스테판 할아버지.>


소년의 취미는 그림이 되었다.


3.


“놀랍군…. 정말 저런 방식으로 효율이 늘다니.”

“인간의 피륙과 정신이 도구에 영향을 미치는가. 저런 점을 발견하다니. 과연 자네는 천재야.”

“…….”

그런게 아니다. 그런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말을 해봐야, 이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되돌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해왔기에 결과를 본 자들이기 때문이다.

“위상력…. 그 기저에 있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인가?”

“어려운 일이야. 측정할 수도 없고, 관측할 수도 없는 것에 좌우되는 힘이라니. 게다가 마음이 강하다고 위상력이 강한 것도 아니니.”

“허나 교육이 어느 정도 효율을 올려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군. 결과가 있으니.”

“하지만 스테판. 약속했던 시간은 끝났네. 자네가 보여준 연구 결과는 흥미롭지만, 발전 속도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어. 일정 이상의 교육은 필요없네.”

“이정도 선이 적당해. 정확히 말이지.”

“…알았네.”

오파 사이에서 다수결은 절대적이기에, 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씨앗은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개화하는 아이의 마음을 뭘로 막을 건가?


“다른 할아버지들은 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요?”

“임무를 마쳤어요. 그러니 이야기를 해줘요.”

“할아버지의 ‘이름’은 뭐죠?”

미스틸은 다른 오파들에게도 커뮤니케이션을 확장하려했다. 이미 물꼬가 트인 마음은 막을 방법이 없는 법이다. 그들이 쓰고 있는 위장, ‘할아버지’라는 친숙한 대상의 위장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미스틸은 성장해갔다. 인간으로. 더욱 인간으로.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4명의 오파는 로테이션을 두고서 그에게 임무와 교육을 병행했다. 그리고 교육을 맡은 것은 결국 나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미스틸. 너는 메시아가 아니야. 차원종을 쓰러뜨리는 것은 너의 사명이지만, 그걸 위해 네가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거나, 네 마음을 지나치게 감내하느라 마침내 파괴에 이르기까지 지키려해선 안 된다.”

“우웅……. 오늘 하시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어려워요.”

“하하. 그렇구나. 하지만 기억해두거라. 크면 다 알게 될 거야.”

“네. 기억해둘게요.”

“그래. 좋아.”

나는 화면너머의 미스틸에게 웃어보이며 대화를 마쳤다. 그뒤, 나는 뒤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어. 왔나?”

“스테판……. 쓸데없는 짓을 했더군.”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고, 그 총구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결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러긴가?”

“당연하지. 유니온 총본부에 그의 존재를 알렸더군. 당장에 신서울지부에서 파견을 요청하고 있어…. 팀 검은양. 그 데이비드가 냄새를 맡고서 그를 부르고 있어.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건가? 우린 이걸 거부할 수 없어.”

그들에게선 숨길수 없는 분노가 느껴지고 있었다. 당연하다. 독일 지부의 비밀 프로젝트가 총본부에 넘어가, 그것이 공동재산이 되어버린 지금…. 분노를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진정해. 그의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그들 전체에 견제가 되네. 알텐데. 그들…아니 우리 모두는….”

“닥치게! 비록 그럴수 있을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것보다는 못해! 빌어먹을! 스테판! 정신 차리게! 자네는 저것에 너무 빠졌어! 저건 인간이 아니란 말이네! 인간에게는 미스틸테인이라는 이름 따위 붙이지 않아.”

인간이 아니다...인간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는…사람이 아니다. 도구지.

사람이 휘두르기 위해 만들어진, 쓰고 버리기 쉽게 만들어진, 그러나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말이야. 나의 동료들. 나와 10년을 함께 해온 친우들이여…….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인간의 혼을 가진 한. 그는 인간이야. 아직도 모르겠나? 그 근간이 어찌되었던, 그는 인간의 어린 아이와 같아. 이건 학대일 뿐이야. 그는 우리가 낳은 기적인 거야. 왜 그걸 모르나? 생명을 창조한 창조주라고 해서, 창조물을 나와 다르게 여길 자격까지 부여될 것 같은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스테판. 지금 이 시간부로, 자네를 제거하겠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시계가 붉어졌다. 주름살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웃을 수 있었고.

웃어야 했다.

“하. 하하……. 나라고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야. 친구들….”

콰아앙! 쨍그랑!

그들이 오기 전 설치해두었던 폭발물의 스위치를 누른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내가 서있던 곳.

미스틸을 내려다보던 매직미러 뒤. 미스틸이 지금껏 벽면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그곳에서 나는 떨어져 내렸다.

“우왓?!”

바닥에 떨어진 통증도 없다. 당연하다. 폭발물이 터지며 그 여파로 내 등도, 척추도, 경추도 모두 강화유리가 박혀있다. 통각이 말짱할 리가 없다. 하지만 아픔은 안다.

그에게 보여주는 첫 모습이 이런 꼴이라니….

“미스…틸.”

“하, 할아버지? 스테판 할아버지예요?”

그는 갑자기 나타난 다른 인간, 육신을 가진 인간을 보고서 놀라고 있었다. 만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거겠지. 본래대로라면…아마 주욱 그랬을 거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피, 피가 너무 많아! 이러면…할아버지! 안돼요. 정신 차리세요!”

차원종을 상대해서인지. 아니면 교육의 영향인지. 어쩌면 본능의 영향일지도 모르지. 그는 이미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안 그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가득했다.

아아. 울리고 말았나. 미안하구나. 하지만…어쩔 수가 없었어. 너에게 미래를 주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죽고싶지 않다.

수많은 영화에서는 총을 맞고, 폭발물에 휩싸이고도 죽기 직전엔 수많은 말을 하던데, 나의 입은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어둠이 다가온다. 그 정체를 안다. 그래도.

그렇기에 입을 움직였다.

“미스틸…. 기억…하거라…. 너는…메시아가 아니야…….”

“하, 할아버지!!”

“사명…만큼이나…너 자신을 위하거라…그것이…사람이 사는… 방법이야….”

“할아버지!”

“행복해…라.”


어둠이 찾아왔다.


3.


스테판은 죽었다. 향년 76세. 차원전쟁 직후, 전세계에서 끌어들인 석학 중 제일가는 천재들을 모아 진행된 미스틸테인 프로젝트. 그 책임자이자 진행자 중 하나인 스테판은 ‘결과물’앞에서 사망했다.

다른 오파들은 당혹했다. 미스틸테인은 그의 죽음에 오열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가정하지 않은 상황이다.

되돌려야했다. 그는 이제 이곳을 떠나보내야하는데, 망가진 채로 내보낼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스틸테인의 기억을 일부 삭제하고, 최면과 강제학습을 통해 스테판의 기억을 완전히 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한 명의 할아버지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했고, 결국 그들은 다른 연구원을 오파로 승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강제 학습으로는 지금까지 막아왔던 사회성의 일부를 주입했다. 그 결과, 결과물은 때 묻지 않은 정신을 가진 순수한 소년의 모습으로 ‘출품’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테판이 시도한 선행학습의 효과와 어울려, 결과물은 외관상 또래의 소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팀’으로 활동하게 될 존재로서는 이상적이다. 그리고…무기로서의 완성도도.

“…….”

다른 오파 중 하나, 마르크스는 스테판의 방에 들어갔다. 결과물…아니 ‘미스틸테인’을 떠나보내느라 분주해, 그의 방은 치우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곧 그의 흔적은 사라지리라.

그는 불이 꺼진 방의 전원을 켰다. 침대와 탁자. 그리고 빽빽이 가득한 책장과 책만이 있는, 연구자의 개인 공간다운 곳이다. 그 흔한 화초조차 하나 없다.

이런 삭막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가 인간성을 가장 설토하다니.

“아니…그래선가?”

조용히 중얼거린 마르크스는 그러다 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책상 위의 작은 책장. 거기엔 그의 연구자료와 필기 노트들, 그리고 일기가 꽂혀있었다.

“…….”

그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일기에 향했다. 그는 빠르게 그 내용을 훑었다. 속독은 그의 특기였으며, 스테판은 천생 연구자답게 일기조차도 체계적인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사실상 연구일지나 다름없는 내용들.

하지만 일정 부분. 결과물이 눈을 떴을 때부터 그 기계적인 문장이 변해갔다.

결과물의 그의 영향을 받은 만큼, 그 역시 결과물의 영향을 받은 걸까? 일기는 연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결과물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의 내용은-


<팀 검은 양. 그 인간백정 노릇을 하던 데이비드 리가 만든 팀이다. 정상적인 의도를 가지고 꾸린 팀은 아닐 거다. 한 명을 제외하곤 모조리 미성년자로 구성된 팀이라는 점에서 이미 좋지 않은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나…바로 그렇기에 미스틸은 그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사명을 가지고서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들과 부대낄 수 있다면, 그제야 미스틸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미스틸테인으로도. 인간을 지키는 무기 미스틸테인으로도.

그들 사이에서는 그가 가장 막내일까? 그렇다면 귀여움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줬던 것 이상으로 사랑받을 수도 있겠지.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안에서의 삶은 정상이 아니야. 아무리 약물과 소거장치의 힘을 빌어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정신은 끼워맞출 수 있는 퍼즐이 아니야. 아니, 만약 기술이 그것을 가능캐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돼. 하물며 그의 정신은 더더욱.

아무리 덮어씌우고 지우려 해도, 마음의 상처는 다시 다가올 것이다. 꿈을 통해 무의식을 통해. 대뇌를 절개해서 지워낸 것이 아니라, 강제로 뇌의 구석에 기억을 밀어 넣어 압축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야….

미스틸은 그 기억에 평생을 얽메이게 될 거다. 그것을 지울 수 있는 건…또 다른 기억. 행복한 기억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서는 줄 수 없는 기억이지.

비록 어두운 의도가 보이지만, 저곳에서라면 그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요청 자체는 정상적인 루트로 들어온 이상, 우리는 그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니, 문제가 생기는 건 얼마든지 알아챌 수 있다. 손을 쓸 수도 있을 거고.

그것을 내 동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자기 손으로 생명을. 자식을 창조해냈다면.

비록 그 용도가 무기일지라도 사랑해야함을…….>


“……멍청한 친구.”

그 내용을 본 마르크스는 고개를 저으며 일기를 덮었다. 지독히도 감상적인 내용들. 이것에 이제와서 이입할 감정따위. 그에게는 터럭조차 없었다.

그랬을…것이다.

“…….”

마르크스는 몸을 돌렸다. 방 안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가 들어왔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단 하나.

책장의 맨 오른쪽에, 노트 한권이 간신히 들어갈만한 작은 공간이 생긴 것만을 제외하고는.

“‘완전’을 추구하는 이론. 그 마지막을 볼 사람은 있어야겠지.”

문이 닫혔다.


그는 네 번째 할아버지가 되었다.


4.


10월 29일.

미스틸테인은 이틀 뒤 10월 31일에 꽃모양 동그라미를 쳐둔 달력을 보면서 웃었다.

생일. 할로윈이기도 한 그날은 미스틸테인이 ‘처음’으로 맞이한 생일이기도 했다.


‘너의 생일은 10월 31일이다.’


신서울에 오기 전. 네 번째 할아버지가 ‘정해준’ 그 생일을 미스틸테인은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우웅. 기대 되요.”

지금까지 검은 양 멤버들과 몇 번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며칠 전부터 상대를 놀래키려고 준비를 하는 그 과정이,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이 나타났을 때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심, 자신도 그렇게 축하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 거리곤 했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오기 이틀 전이었다.


“슬비야, 축하해!”

“위상능력 전체를 노력으로 향상시키다니.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군. 솔직히 이번엔 나도 놀랐어.”

검은 양 팀원, 송은이 경정, 얼굴이 익숙한 특경대 인원들까지 찾아와 이슬비를 축하했다. 거의 반 년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왔던 위상능력 변환을 이번에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요원등급은 오르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토대가 되며, 상위임무를 맡게 될 자격이 주어진다.

그 덕분에 김유정을 비롯해 검은양 모두에게 추가 보급품과 보너스가 들어왔고, 사무실 안은 금새 파티 분위기가 되었다.

“슬비 누나! 축하드려요!”

“고마워, 테인아. 다 네가 할 일을 잘 해줘서야. 덕분에 나도 내 자유 시간을 얻을 수 있었거든.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아,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이 와중에도 휴대용 게임기를 하고 있던 이세하는 제발이 저렸는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게임기는 일시정지로만 해두고 끄지는 않는 게 과연 그 다웠다.

“자자. 그럼 오늘은 유정씨가 쏘는 거니까 팍팍 먹으라구!”

“아앗! 왜 제 이름을 팔아먹는 거예요? 물론 제가 쏘긴 할거지만. 특경대원분들은 회비 걷을 거예요.”

“으익. 쪼잔해! 알았어요! 내면 되잖아, 내면!”

그렇게 그들은 그날 하루종일 먹고, 마시고, 즐겼고.

미스틸 역시 즐거워하며 보냈다. 자신 역시 이런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서.


*


10월 31일. 할로윈.


“차원종 경보 재발령! 또 공생충이야!”

“아아! 정말 끝도 없네! 이러단 잠도 못자겠어요!”

하늘에는 램스키퍼를 노리는 공생충들이 시간차를 두고서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비무장 상태인 램스키퍼론 저들을 맞아 싸울 방법이 없다. 특경대원 역시 지쳐있었다. 위상 능력자 없이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이쪽도 당분간은 로테이션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겠어. 슬비야.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가 있지?”

“그건….”

슬비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세하와 유리는 지쳤다. 이미 새벽부터 투입되었다가, 오후 늦어서야 빠져서 특경대 간이 천막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제이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싸우고 있었다. 

그는 강력하고 믿음이 가는 어른이지만, 인간에겐 한계란 게 있는 법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지만 테인이는―

“…제가 가장 여력이 남아있을 겁니다.”

“너라고?”

그러나 슬비가 내놓은 답변에 유정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녀는 어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제이와 함께.


“그건 아닐 거야, 너는 지금 40시간 이상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야. 아무리 네가 지휘에 전념하면서 뚫고 들어오는 공생충만 상대했다 해도 이건 한계란다.”

“하,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이슬비 요원. 당장 현장에서 이탈을 명령합니다. 당신의 공백은 미스틸테인이 대신할 거예요. 마침 공생충이 다가오는 수도 줄어든 상태. 그 혼자서도 방어해낼 수 있을 겁니다. 팀원 중 광역 섬멸에 가장 능하니까.”

“하, 하지만 유정이 언니. 테인이는 오늘-”

“책임은 제가 져요. ...물러나. 이슬비.”

관리요원으로서의 김유정이 내리는 최후통첩. 이런 상태의 김유정은 타협이 없다. 슬비는 고개를 떨궜다. 그동안 김유정은 현장에 출동해있는 미스틸테인에게 통신했다.

“미스틸. 부탁해도 되겠니?”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그래. 부탁할게.”

“아….”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씩씩한 목소리에 이슬비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지금껏 누구나 행복하게 지냈던 생일이다. 오늘을 기대하여 모두가 장식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준비한 케잌의 촛불조차 불 틈이 없는 하루라니!

“미안해, 테인아. 미안해….”


*


통신기를 통해, 슬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테인아. 미안해….”

울먹임이 느껴진다. 그 ‘마음’을 안다.

미스틸은 웃었다.

“아니예요. 누나. 신경 쓰지 마세요! 케익은 내일 먹으면 되죠! 장식도 다 남아 있잖아요! 생일축하는 내일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누나가 쉬는 게 저도 더 중요해요!”

뚜벅. 뚜벅.

램스키퍼의 보조 갑판 위.

저물어가는 석양 사이로 검은 반점이 보인다. 그것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공생충.

스윽….

허공에 손을 뻗어 지면에서 나타난 ‘자신의 일부’를 잡아 쥔 미스틸테인은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누나.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어차피 오늘은 내 ‘진짜 생일’도 아닌걸.

그리고 그렇다 했더라도, 내 생각은 똑같았을 거예요. 

눈앞의 사명이 나를 불러요.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누나를 위해, 이 정돈 당연한 거예요.

괜찮아요. 누나. 자책할 필요 없어요. 이틀 전에 축하받은 만큼 나에게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알게 되었어요.


누나들이, 형이, 모두가 알려주셔서.


“그러니까….”

기억의 저편, 어렴풋한 이미지. 붉은, 쇠냄새나는, 하지만 저 하늘 주홍빛 석양만큼이나 푸근한 느낌을 가진 이미지가 목소리를 전해온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야.’

어려운 말이었다. 실제로 그땐 메시아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어요. ‘스테판 할아버지.’ 그러니까-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건 희생이 아니에요.‘

이건 보답이예요. 그들이 나에게 준만큼, 저도 그들을 위해서 힘을 내는 거예요.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내 마음 속에서도 힘이 솟아나요.

이게, 이게 할아버지가 나에게 알려주려는 거였죠?

이젠 알아요.


“이야아아아아아!”

하늘의 문이 열리고, 만마를 격퇴하는 창의 윤무가 쏟아진다. 라그나로크. 북구신화의 마지막. 파멸의 노래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 되어 그와 함께 했다.

그것이 끝났을 때. 지상에 남은 것은 적의 피.

사냥감의 피.

자신의 근원, 영혼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 결정한 사명의 희생양들. 그 일부가 바닥에 찢겨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미스틸테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것을 왜 쓰러뜨려야하는지도 모른 채 싸워야했을 거야.’

인간의 피륙을 입은 채 그렇게 다뤄지는 것은 너무나도 괴롭다. 그럴 거라면 껍데기는 무의미하겠지. 그러나 이제는 안다. 싸워야할 의미도. 이유도.


그러니까 괜찮아요, 스테판 할아버지.

저 미스틸테인은.

사람의 이름을 받지 못한 겨우살이는.

지금 사랑받으며, 이곳에 있습니다.



보고 계신가요…?


2024-10-24 22:40:5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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