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꿈과 현실 -2-

작가지망생 2014-12-31 3

밤 11시가 되었다. 이따금 30분 간격으로 역 내, 바깥의 순찰을 도는 경찰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시간대. 불필요한 곳에 전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역 내의 플랫폼을 밝히고 있던 전등은 대부분 소등되어있다.


그 어둠 속을 유유히 걸어 잠금 장치가 걸린 편의점 앞에 도착한다. 점주님에게서 받아둔 예비용 키로 문을 열고, 가게 내부 전등을 켠다. 아르바이트생 전용 주황색 앞치마를 두르고 적당히 카운터 안 쪽의 의자에 앉는다.


"피곤하네......"


수면 시간은 6시간. 퇴근후 약 4시간 정도는 게임을 하는데에 썼고, 그 이후에는 죽은듯이 잠만 잤다. 30분 전에 울려퍼진 알람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이 곳까지 오는데에 걸린 시간은 대충 10분 정도. 일부러 도심지 외곽에 싼 방을 골라잡아 자취하길 잘한 것 같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밝은 백열등이 켜진 매장 내부를 둘러본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손님은 없다. 이 곳에 오면서 마주친 경찰들도 조금 전 순찰을 마친 모양이라 당분간은 오지 않겠지.


늦은 밤 부터 새벽 시간대는 사실 누군가가 오길 바라는 시간대가 아니다. 그저 이 가게는 이런 시간대에도 제대로 영업하고 있습니다~ 라고 알리기 위한 선전용인듯 하다. 애초에 선전을 할 고객이 없는데 시간 선정이 잘못된 건 아닌가 싶다.


지난 몇 달간 이 곳에서 일해오면서 한 가지 느낀 바가 있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정도. 실제로 손님이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하는 건 아침 시간대 부터이고, 자신이 퇴근하기 한 시간 전 부터, 퇴근하고 난 후가 피크

(?) 타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무도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밤낮이 바뀐 생활리듬, 그로 인해 매일 피곤한 눈을 비비며 졸지 않고 가게를 본다. 하지만 손님이 자신과 마주하는 것은 이른 아침 시간대. 즉 밤 사이에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단순히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해서 다 편할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담긴 시선은 조금 껄끄럽다.


아르바이트보다야 육체적으로 좀 더 힘든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내가 하고싶은 것들도 겸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포기하기 싫어서 어떻게든 비루한 몸뚱이 하나 부대끼며 아둥바둥 살아가고는 있다.


손님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직장인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입장의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별로 힘들어보이지도 않는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몇 살 먹은 것 같지도 않은 녀석이 매일매일 좀비같은 몰골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밤을 세가며 일한다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불필요한 동정을 받을 생각은 없을 뿐더러,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트러블이 일어나는 건 사양하고 싶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르바이트라는 걸 밤을 세워가면서 한다고 해도 '힘들겠네' 라고 말해줄 만큼 현대인들은 그렇게 포용력이 좋지 않다.


각자의 삶에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다고는 하나, '프로' 의 일과 '아마추어' 의 일은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 회사의 영업 사원과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은 그 영리 목적 자체는 같다. 손님이 물건을 사게끔 유도하고,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여 자사의 물건을 판매하는 것.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전자는 정규직에 어엿한 직장이 있다. 반면 후자는 계약직에 직장이 아닌 '일터' 이다. 아르바이트는 취직의 개념이 아니니 자신의 근무처가 직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일하는 일터일뿐.


"지루하네~."


일터라고는 해도 잠깐의 여유를 가지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손님도 없고. 이럴 때에는 역시 게임이 최고다.

PSP 를 꺼내 이번에 새로 구매한 패키지 게임을 구동시킨다. 게임을 하다보면 여러가지를 잊을 수 있게 된다. 삶의 고통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리고 매순간 반복되는 지루함도. 눈 앞이 번쩍이고 귓가가 요란하게 울릴 정도로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새 시간 조차 순식간에 흘러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여러가지를 잊을 수 있게 해주니까.


"조용한 가게군."
"?!"


손님이 왔었던가?!


"어, 어서 오세요! 신논현역 편의점입니다."
"오오, 이건 또 꽤나 마음에 드는 인상의 친구로군."


호쾌한듯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조금 이상한 복장의 사내였다. 자주빛에 가까운 진한 컬러의 연미복에 목에는 금색 체인을 걸고있다. 얼굴에는 가죽인지 헝겊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가면을 뒤집어 쓰고있었다. 가면의 틈새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곧장 이 쪽을 향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이, 이런 시간대에는 손님이 잘 안 오는데....일 때문에 오신건가요?"


이 시간대에는 신논현역의 출입이 통제된다. 나의 경우에는 특별히 가게 업무를 본다는 이유 때문에 경찰 측에서 출입 허가가 내려진 상태였다. 즉 경찰과 나를 제외하고 이런 시간대에 매장을 방문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일, 일이라...그래. 일이라고도 할 수 있군. 일(job) 이라는 건 직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노동을 의미하기도 하지. 나의 경우에는 직업(job) 이 아니라 일(job) 이지만."
"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조금 이상한 손님이다. 생김새가 수상쩍은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이런 시간대에 편의점에 들어와서 해괴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다니. 혹시 술이라도 마신게 아닐까 싶어 알게모르게 킁킁 냄새를 맡는다.


"오, 이런이런. 생각해보니 내 소개가 늦었던 것 같군. 걱정말라고. 술에 취해 현실을 망각한 채 밤늦게 길 위를 방황하는 불쌍한 취객은 아니니까. 이 몸으로 말하자면 전(前) 인간이었던 자, 지금은 현역으로써 조금 성가신 녀석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노동자라고 할 수 있지. 칼바크 턱스 라고 하네."
"......예?"
"조금 얘기를 해볼까."


영문을 알 수 없어 무심코 되물었으나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자신을 칼바크 턱스라고 소개한 남자는 천천히 계산대 앞을 지나쳐 물품 판매대 앞에 섰다. 그러고는 성인들의 필수품이자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안전 상품, 콘.돔을 하나 집어들고는 이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한 때는 인간이었던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곤 하지. 인생은 불공평하다, 라고."
".......하."
"그 말대로야. 인생은 정말 불공평하지. 잘 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못 난 녀석도 있어. 돈이 많은 녀석이 있으면 돈이 없는 녀석도 있고, 못 생긴 녀석과 잘 생긴 녀석, 인기 많은 녀석과 인기 없는 녀석까지. 그리고......"


콘.돔의 자그마한 케이스를 뜯어 내용물을 하나 꺼내보이며 서슬퍼런 눈동자를 번뜩인다.


"타고난 녀석과 그렇지 못 한 녀석."


그거 콘.돔과 관계 있는건가?


"자네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인생이 이렇게나 불공평한 건 당연한 사실인데. 자신이 지금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일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않나? 왜냐하면 인생은 불공평한 법이니까."


얇은 비닐막에 감싸진 콘.돔을 눈 앞에서 흔들어보이는 것이 조금 낯뜨거웠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한다. 케이스까지 뜯었으니 물건 값은 제대로 치뤄주겠지.


"그래, 인생은 불공평한 법이야. 그래서 더욱 살 맛이 나는거지. 알고보면 내가 최악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한 녀석이 있다, 라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혹은 나보다 잘 난 녀석도 실은 더욱 잘 난 녀석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라는 사실에 헛웃음을 짓기도 하지. 중요한 건 바로 개개인의 마음가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의' 본인이 만족한다면 크게 문제는 없다고."
"아니, 뭐...먹고 사는데 지장만 없으면 충분하니까요."


이따금 일에 대해서 물어오는 사람도 있기에 나는 미리 정해둔 대답을 한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지만.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확실히 먹고 사는데에 지장만 없다면 현실의 자신에게 충실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것만으로' 만족했나?"

"예?"
"내 말은...좀 더 무언가를 달리 바랐던 것은 없느냐고 묻는걸세."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콘.돔을 모두 꺼내 양 손 한가득 펼쳐보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해온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지라 역시 나도 조금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러한 질문에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쌍방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불필요한 생각은 집어치우라고. 항상 남들에게 맞춰주기만 하니 그런거잖나. 본인의 생각, 본인의 기분, 본인의 감정을 말해보라고!"


양 손 한가득 펼쳐두었던 콘.돔이 그의 역동적인 몸짓에 의해 계산대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조금 흥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을 본인도 자각은 한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자네는 솔직하지 못 하군."
"서비스업이란 건 솔직해지면 안 되거든요."
"아아, 동감해. 기분 나쁜 녀석이 손님으로 와도 화사하게 웃어주며 반겨줘야 하고, 말같지도 않은 걸로 클레임을 걸어오면 몇 번이고 머리를 숙여대며 사과해야하니까. 그런 때에 솔직해져서야...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하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한마디로 대화를 좀 더 이어나간다.


"솔직해지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잖나? 가슴 속 깊은 곳에 웅어리져있는 것을 깨부수고 싶기도 하잖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나는 인간에 대해 매우 잘 알고있어. 여러 종류의 인간을 봐왔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가 인간을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지."


칼바크 턱스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툭툭 두들겼다.


"꾹꾹 눌러담고 있는 인간치고, 망가지지 않는 인간은 없다네. 터뜨려줄 때는 한 방에 터뜨려줘야 하지."
"스트레스를 말하시는거라면 매일 게임으로 풀고있......"
"스트레스? 스트레스라고? 아니지,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그런 단순한 정신력 소모에 의한 잔해물이 아니야. 이를테면...그래. '원초적 본능'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이 쪽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데, 칼바크 턱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진 콘.돔을 주워들고는 얘기를 계속한다.


"성욕."


이번에는 판매대에 진열된 식료품 하나를 집어온다.


"식욕."


그러더니 갑자기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수면욕."


공허함이 서린,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듯한 칼날같은 눈초리에 나는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야기는 계속 된다.


"이 대표적인 '욕구' 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원초적 본능이지. 하지만 실은 이것 말고도 하나 더 있다네. 매일 같이 게임을 붙들고 사는 자네라면 이미 알고있을거라 생각하네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괜찮아! 전(前) 인간이었던 나이니 자네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고? 같은 인간 앞에선 꺼낼 수 없는 이야기라도 이 칼바크 턱스의 앞에선 얼마든지 꺼내도 상관없지. 돈 마인(Don't mind)이라고?"


외국인 같지는 않은데 과장스러운 몸짓이나 언동이 조금 언밸런스 하달까, 조크처럼 내뱉은 말도 무의식중에 진지하게 들리게 된다. 본인의 말대로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확실히 분위기 자체는 무언가 다른 것 같긴 하다.


"음, 물욕(物慾)...이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틀렸다네! 이건 감점 요인이군."


포인트가 있었어?


"그럼 뭔데요?"


툴툴거리며 묻자 칼바크 턱스는 가면의 턱 부분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대답해주었다.


"파괴욕이지."
"...파괴?"
"길거리에 놓여있는 빈 깡통을 무심코 발로 차고싶어지는 충동이 어째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그건 바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파괴욕구가 뒤따르기 때문이야. 무언가를 부수고,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자네가 말한 것 처럼 소위 '스트레스 해소' 를 할 수 있지. 그건 생명체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사실상 인간에게만 허용된 엔터테이먼트지."
"아니, 파괴욕이라니...그런 욕구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계산대 위에 흐트러진 콘.돔들을 주워담아 한 쪽에 모으며 말한다. 그러자 칼바크 턱스가 혀를 쯧쯧 찼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가면 아래의 표정이 어떨지는 왠지 모르게 짐작이 간다.


"말했잖나. 그건 엔터테이먼트라고. 파괴욕은 식욕, 성욕, 수면욕처럼 '제어할 수 없는' 원초적 본능이 아니지. 마음 먹기에 따라선 언제든지 제어할 수 있고, 혹은 아무리 굳건하게 마음을 먹어도 결코 제어할 수 없는 어중간한 욕구이지. 그런 추한 욕구를 자신들의 본능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던 인간들은 그것을 하나의 엔터테이먼트로 승화시켰어. 그 결과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며 칼바크 턱스는 자신의 손에서 나의 PSP 게임기를 흔들어보였다. 눈 뜨이고 게임기를 베였다?!


"자네가 즐기고 있는 게임도 그중 하나지. 그 외에도 만화, 소설, 영화, 대련이 가능한 격투 스포츠 등등. 어떤 것은 픽션이라고 치부하며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떠들어대고, 또 어떤 것은 신성한 스포츠 의식이 담겨있다며 막무가내 싸움질과는 다르다고 정신 승리를 하지. 사실 그런 것들은 모두 파괴욕에서 편승된 것들에 지나지 않는데."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내게 게임기를 휙 집어던져준 그는 입구의 옆에 위치한 시식대에 걸터앉았다. 호리호리하면서도 큰 키를 가진 탓에 한 쪽 다리를 꼬고 앉은 그 모습은 조금 폼이 나보였다.


"인간들은 참 바보같단 말이지.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해지면 사실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일일이 따질 필요조차 없을텐데."
"그렇게 되면 무질서한 세상이 되어버리잖아요.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죄다 때려부수거나, 남을 상처입히거나 하면......"
"그래, 무질서! 그게 대체 뭐가 나쁘지?"


양 팔을 쫙 펼쳐보이며 칼바크 턱스가 외친다. 세레나데를 하는 듯한 그 자세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고결해보여서 절로 감탄이 나올 것만 같았다.


"처음에 우리가 했던 얘기를 기억하나? 인생이란 건 참으로 불공평해. 항상 서로 반대되는 존재들이 이 세상엔 득실거린단 말이지. 인간들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법으로도 그건 어쩔 수가 없어.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이니까!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생명체로써 당연하게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진리이지!!"


목소리를 조금 낮춰줬으면 좋겠다. 슬슬 경찰들의 순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게 내에서 트러블이 일어나면 내 입장이 곤란하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칼바크 턱스는 제 좋을대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약육강식. 모든 인간들은 생태계의 절대적인 법칙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있지.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우둔하고 겁 많은 녀석들이 그러한 무질서가 두 번 다시 초래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걸어두었지. 법이란 것도 바로 그 중 하나이고, 군사력이나 공권력 또한 마찬가지이지. 세상이 정해준 진리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생명체의 카테고리에 등록되어 있는 이상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암, 그렇고 말고."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칼바크 턱스는 다시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

고 쫘악 올라온다. 이것은 오한일까, 전율일까.


"매일을 웃기지도 않은 애들 장난에 어울려줄텐가?"
"매일을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가?
"매일을 억눌린 삶 속에서 허송세월이나 보내며 '욕구불만' 인 채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가?"


그는 내게 말하고 있다.


"나는 자네를 오랫 동안 지켜봐왔네. 멍청한 경찰 놈들보다, 잘난체하기 바쁜 클로저스 놈들보다도 자네의 고통과 노고를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단 말일세."


자신의 가슴에 한 쪽 손을 얹은 채 말하는 폼이 꼭 무언가를 맹세하는 긍지 높은 귀족가의 자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질릴 때도 됐겠지. 얼마 가지 못 할거야. 언젠가는 터져버릴테지. 하지만 정작 그때에 '힘' 이 부족하다면...그건 분명 만족스럽지 못 한 최후가 되지 않겠나?"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하고싶은데, 제대로 끝내지 못 하는 것은 확실히 찝찝하다. 하지만 그것과 '힘' 이 과연 무슨 상관일까? 굳이 관련이 있는 것을 말하자면 '의지력' 의 쪽이 아닌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결국 모든 것은 '힘' 으로 이어지는 법이잖나? 정의의 히어로도, 질 나쁜 악당도."
"......"
"내일 저녁 6시, 신논현역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제한구역'에 위치한 XX백화점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가게 밖을 나섰다. 눈으로 좇은 어두컴컴한 바깥 풍경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계산 안 하셨는데."

2024-10-24 22:21:3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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