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세하의 위상력 16-1

이케아라 2015-07-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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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히로인이라는 클리셰를 아는가.

요즘 이야기 매체는 물론 중세시대의 소설 속에서도 90%이상 쓰여 왔던 흔하디흔한 소재중 하나이다.

마왕이 공주를 붙잡아가서 용사가 공주를 구출하는 내용 같은 뻔하고 유치한 이야기는 물론, 킹콩이나 마리오 같은 유명한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이용되는 이 클리셰는 아군이 적에게 붙잡힌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주인공의 무모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붙잡힌 인물을 구출하고야 말겠다는 목적의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클리셰 속의 상황에 처한 검은 양 팀의 이세하는 자신이 유괴(?)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유니온 본부의 최하층 실험실에서 자신의 위상력을 흡수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선 이런 식으로..."

 

"차원문을 출현시킬 위치는..."

 

"놈들의 도착시간이..."

 

연구원들이 입 밖으로 내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하는 조용히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다.

어차피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말을 하는 속도와 표정으로 봐선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리네... 저 아저씨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이것들 때문에 탈출할 수도 없고...'

 

세하는 자신의 두 팔을 구속하고 있는 금속을 쳐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지금 세하의 상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십자가형벌'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10m정도 되는 높이에서 두 팔에 걸려있는 쇠사슬로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일한 연결지점인 팔목이 혈색을 잃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몸 안에서 변화와 소멸을 반복하고 있는 위상력의 기운이 그의 몸과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왠지 몸에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쁜걸...'

 

위상력은 근육을 지탱하는 근력과는 다른 원리로 작용하지만, 기본적으론 일종의 에너지원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세하가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제임스아저씨의 계획대로 S급 차원종이 출현할거야.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서 중단시켜야 되는데...'

 

A급 차원종은 도시하나를 궤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지만, S급 차원종은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차원전쟁 시절엔 S급 차원종 헤카톤케일이 서유럽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이대로 헤카톤케일과 동급의 차원종이 소환되는 걸 방치했다간 유니온 본부뿐만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파괴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 카캉!!

 

온힘을 다해 사슬을 벽에 부딪혀봐도 부서지기는 커녕 흠집도 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쇳소리가 연구원들의 주목을 끌어버렸지만, 그들은 세하가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본 뒤 일에 몰두하는 그들을 보고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이를 갈았다.

 

'위상력이라도 쓸 수 있다면...!'

 

세하의 위상력은 검은 양 팀 중에서도 가장 파괴에 특화되어 있는 힘이다.

조금이라도 위상력을 쓸수있다면 이런 쇠사슬쯤은 쉽게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위상력을 흡수당하고 있는 세하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아...."

 

이젠 너무 오래 묶여 있어서 팔에 쥐라도 나는 듯한 기분이다.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어떻게든 견디면서 이를 악물고 있었을 때, 전방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세하야?"

 

"?"

 

발소리의 주인이 제임스나 연구원같은 아저씨일거라고 생각했던 세하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미성(美聲)에 당황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말을 잃었다.

요즘같은 최첨단 시대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로브, 동양인의 흑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 성별의 관계없이 누구나 미인이라고 공인할만한 중성적인 외모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런 음침한 연구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 세하의 정신을 빼앗았다.

 

"~! 네가 이세하냐고?!"

 

"... 맞는데."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인물을 보고 세하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긍정을 표했다.

오랫동안 매달려있는 데다가 배에 화살이 박혔던 충격 때문에 세하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간신히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런 세하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나 본지 로브를 입은 여자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참모장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인간이 누군가해서 직접 와봤더니... 이거 완전 약골이잖아? 제임스 따위한테 제압당하기나 하고"

 

'제임스...따위라고?'

 

오만한 말투로 S급 클로저를 무시하는 발언을 듣자마자 세하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곳은 제임스가 담당하고 있는 유니온의 비밀 시설이다. 그런데 이곳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제임스를 무시할 정도라면 이자는 유니온에서도 특히나 높은 지위에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예상을 하고 있던 세하에게 그녀가 말했다.

 

"아참. 말하는 걸 잠시 잊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 널 제외하곤 누구한테도 안 보이는 상태니까 괜히 말할 필요 없어. 이래 뵈도 텔레파시로 대화하고 있는 거거든."

 

'?!'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세하가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자신은 직접 입으로 소리를 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었는데, 그게 사실은 텔레파시였다고 밝혔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건가?'

 

허공에다가 말을 거는 행동은 무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재주다. 그런데 세하는 그런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감시하고 있던 연구원들은 이상하게 여기긴 커녕 자신들의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대화가 텔레파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하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고 있었을 때,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에헴! 네가 이세하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내 소개를 할게. 내 이름은 '라움'. 이름 없는 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어. 잘 부탁해."

 

라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인 그녀의 말을 듣고 세하가 잠시 침묵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 차원종이야?"

 

구로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던 애쉬와 더스트는 자신들을 '이름 없는 군단'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군단의 단장정도나 되는데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S급은 되는 차원종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조심스럽게 확인을 하려는 세하에게 라움이 말했다.

 

". 너희 인간들은 우리들을 차원종이라고 부르지? , 맘에 드는 호칭은 아니지만... 맞아. 그런데 그게 왜?"

 

세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차원종이라고 밝히는 라움을 보고 다시 한 번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날 대로 바닥난 지라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위상력 억제기가 즐비하게 설치된 이곳에 왜 너같이 높은 차원종이 활보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의 난 본체가 아니라 분신 같은 거라서 말이야. 쉽게 차원을 넘나들 수 있어. 강남인가 광란인가 하는 곳에선 애쉬와 더스트도 아무렇지 않게 활동했잖아? 그새 잊어버린 거야?"

 

낯익은 이름을 들은 세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땐 위상력 억제기가 전부 부서졌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여긴 유니온 본부라고.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종 안전대책을 보유한..."

 

"넌 아직도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라움이 잔혹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세하의 말을 끊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 수 있게 해준 분위기가 순식간에 전환되자 세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을 잃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세하를 내버려두고 라움이 즐거운 듯이 말했다.

 

"너도 제임스한테 계획의 일부를 들었을 테니까 잘 알텐데? 이제 곧 이곳에 초대형 차원문이 소환되고, 그곳에서 나를 비롯한 S급 차원종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스스로 안전대책인지 뭔지를 지워버리고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하는 유니온본부가 대체 어딜 봐서 안전지역 이라는 거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각인시키듯이 말하는 라움의 말에 세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위상력 억제기가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S급 차원종을 소환하려고 작정하고 있는 그들이 지금까지 억제기를 작동시킬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널 위해~ 내가 특별히 시야를 넓게 바꿔줄게."

 

라움은 자신의 로브를 날개처럼 펼친 뒤, 가볍게 도약해서 세하의 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별거 아닌 높이를 날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너무나도 완벽한 비행을 선보여준 그녀의 손가락이 피부에 닿는 그 순간, 세하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풍경이 순식간에 반전되는 감각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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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종 출현 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신속하게 줄을 서서 피난해주십시오!!"

 

세계최고의 인지도를 미국의 도시 뉴욕에서, 수많은 경찰관들과 유니온 소속의 클로저들이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며 시민들의 피난을 돕고 있었다.

차원문이 출현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한 정도에 경보가 발령하는 타국과는 달리, 뛰어난 기술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은 위상력 억제기뿐만 아니라 위상변곡률의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신속하게 민간인들을 피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피난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민간인들을 보고 유니온 본부에있던 세린과 다니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설마 유니온본부 한복판에 차원종 출현경보가 울릴 줄이야..."

 

"... 그러게요."

 

낙담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자 세린이 말을 더듬으며 동조했다.

며칠 전, 다니엘이 리무진에서 세하에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유니온 본부의 위상경계는 믿을만하다고 큰소리를 쳤었는데, 테러조직이 인위적으로 소환한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차원문이 발생해버렸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다.

 

"하필이면 유니온의 병력이 작전 때문에 대거 이탈한 상황에서 차원문이 발생하다니...

물론 제임스님을 비롯한 몇몇 클로저들이 남아있으니까 A급 차원종이 소환된다하더라도 별 피해는 없을테지만,

시간이 너무 적절해서 뭔가 좀 이상하군요. 오세린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일단 제임스씨한테 가서 위상력 억제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는건 어떨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유니온본부가 위상력 억제기의 과신 때문에 클로저들의 배치수가 적은 건 사실이지만, 물리적으로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차원종이라면 유니온본부의 화력으로도 충분히 격퇴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차원문이 발생한 것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한 일이니, 다니엘이 이런 식으로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짐작가는 바가 있었던 오 세린은 적당한 핑계를 대서 다니엘을 납득시킨 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S급 클로저 제임스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쿠콰광!!!!

 

거대한 폭렬음이 유니온본부의 창밖을 뛰어넘어 다니엘과 세린의 귀를 유린했다.

 

"꺄악!!"

 

"...!"

 

고막의 허용량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굉음에 세린은 물론 다니엘까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얼얼해진 귀를 부여잡고 눈을 감기를 수초 간,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흐릿한 시야와 매캐한 흙먼지 속에서 다수의 흑점들이 빠른 속도로 그 크기를 키워가며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걸 확인 할 수 있었다.

 

"..까마귀?!"

 

"아닙니다! 저건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에요! 얼른 도망을...!"

 

평소의 진지하고 근엄한 태도를 버리고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 다니엘이 중간에 말을 멈춰버리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으와앗!!"

 

갑자기 몸을 덮어버린 다니엘을 보고 세린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니엘... 아저씨?"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른 세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등 자락을 어루만져봤다.

 

질척하는 묘한 감각이 그녀의 손가락을 간지럽히고, 세린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떨리는 손을 억지로 눈앞에 갖다 댔다.

 

''.

 

섬뜩할 정도로 새빨갛고 뜨거운 핏물이 한가득 흘러나와 세린의 손가락을 물론 온몸을 뒤덮었다.

섬뜩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는 것보다도, 자신들을 향해 헬멧 속에 가려진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테러리스트들과,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다니엘의 몸을 본 세린은 올라오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비명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폭렬음에 묻혀 그대로 하늘로 흩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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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에러때문에 두개로 나눠서 올립니다.


2024-10-24 22:37:0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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