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미슬비] All for you -下_2-

월하령 2015-07-16 11

[긴급 사태. 코드 00 발령. 연구 요원들은 시급히 대피소로 대피, 대처 요원들 및 담당 특경대는 지금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긴급 사태. 코드 00 발령. 연구 요원들은 시급히 대피소로 대피, 대처 요원들 및 담당 특경대는 지금 즉시 현장으로ㅡ.]

 

“선배! 선배! 긴급 사태에요! 선배! 들려요? 선배!!”

 

소란스럽다.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선배! 우정미 선배! ㅡ야! 우정미! 안 들려?! 나 지금 반말 쓰고 있다고요?! 빨리 나와요, 좀!!”

 

아…후배인가. 선배에게 말버릇이 저게 뭐야. 나중에 혼내주던지 해야겠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

 

“선배! 대답이라도 좀 해 주세요! 선배…!”

 

미안해. 지금은 너무 바빠. 그러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대답 좀 해 주세요…. 제발…. 문 좀 열어줘요…선배….”
“자네! 뭐 하고 있는 건가! 빨리 대피해!”
“그, 그치만ㅡ.”
“빨리! 혹시라도 차원종이 연구소를 공격해 오면 자네들이 위험해져! 따라오게!”
“서, 선배! 선배!!”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제 좀 조용해 졌네. 다시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겠어.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더 하면…완성할 수 있어.
그러니까…조금만 더……….

 

 

 

 

 

그 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친구를 만났던 그 날 이후, 슬비는 스스로도 모르게,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분명 다를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정도로 그녀는 나약하지 않다.
분명 우리는ㅡ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그리고 지금, 슬비는 다시 생각한다.

 

 

[내 눈 앞에 서 있는 저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꺼트린 채, 담담히 이쪽을 바라보는 저것은,
나의 소중했던 친구 서유리인가,
아니면ㅡ그녀의 탈을 쓴 차원종인가.]

 

 

 

 

 

 

“……우연이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 유리야…너…그 모습은…?”
“유리 누나…. 누나…맞죠?”
“응…맞아.”

 

사람을 죽여 놓고도 담담한 대답에 흔들리는 제이와 미스틸테인의 눈동자. 지나치게 태연한 그 태도는 누군가 현장을 목격한다 해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무심코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게…뭐 하는 짓이야!”

 

앙칼진 외침에 동조하듯 유리를 향해 날아가는 여러 자루의 단검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붙이들을 침착하게 쳐낸 유리의 시선이 슬비를 향한다.

 

“너무하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사람을 죽여 놓고, 그게 지금 할 소리니? 너 여기까지 떨어질 정도로 나약한 애였니, 서유리?! 이젠 정말로 인간이길 포기할 생각이냐고!”
“…….”
“대답ㅡ해!”

 

이번에는 유리의 발치에 날아가는 박히는 단검. 그리고ㅡ순식간에 복도는 굉음과 불길에 휩싸인다.

 

“무, 뭐 하는 거에요, 누나! 저기에는 유리 누나가ㅡ!”
“정신 차려 미스틸테인! 쟤는……저건 차원종이야!”
“그, 그치만ㅡ.”
“아니, 슬비 말이 맞아.”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놀라 고개를 돌린 미스틸테인의 앞에는 그을린 흔적조차 없이 멀쩡한 유리가 서 있었다.

 

“누…나….”
“미안해, 테인아. 하지만…지금의 난 차원종이니까.”

 

다음 순간, 미스틸테인은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컥…!”

 

맥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미스틸테인. 하지만, 예전 동료를 벽에다 걷어차 기절시키는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테인아!!”
“아직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네. 내가 없어지고 나서 연습 안했구나?”
“서유리 너ㅡ!”

 

노기를 감추지 않은 슬비가 달려들기 직전, 둘 사이를 가로막듯 끼어든 제이는 곧바로 유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놀래라.”
“아, 아저씨….”
“…….”

 

유리가 뒤로 물러나자 묵묵히 뻗었던 주먹을 거둬들이는 제이. 항상 애용하는 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시선은, 이미 똑바로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

 

“슬비야, 감정에 휘둘리지 마. 네 말대로…유리는 차원종이 된 거니까.”
“저, 전 감정에 휘둘린 적ㅡ.”
“내가 아는 이슬비라면 좀 더 냉정하게 분석한 뒤에 움직였을 거야. 가라앉혀. 흥분해서 바뀌는 건…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

 

분한지 이를 악물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슬비. 그녀의 앞을 가로막듯 선 제이를 보며, 유리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조금 안심했어요.”
“그러는 넌 많이 변했구나. 안 본지 겨우 몇 달 지난 것 같은데.”
“아하하. 사람은 안 보이는 사이에 성장한다고 하잖아요.”
“이거 말 빨도 늘었네. 앞으로 말싸움으론 못 이기겠는데.”
“워낙 능글맞은 두 녀석을 상대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 쌍둥이, 정말 민폐라니까요?”
“하하하. 그 빌어먹을 녀석들이 그럼 그렇지.”
“정말이지 그렇다니까요. 하하하.”

 

언뜻 들리기엔 화기애애한 대화. 하지만, 정작 대화의 주체인 두 사람ㅡ정확히 말하자면 둘 중의 한 사람은 나머지 한 명을 엄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니.”
“…그런 눈으로 보는 거, 그만 둬 주시면 좋겠어요.”
“유리야, 대답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아니…이렇게 물어보마.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니?”
“…….”

 

그 질문에, 유리는 말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아저씨. 위상력, 예전보다 많이 회복되셨죠?”
“글쎄다. 요즘 의료기술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
“다행이네요. 그게 사실이라면…이거 한 방에 아저씨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 슬비야! 내 뒤로 피해!”

 

제이의 외침과 교차하며 휘둘러지는 유리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칼바람.
양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는 제이의 요원복이 바람에 스칠 때마다 엉망으로 찢겨나가고, 결국은 찢어진 부분으로 드러난 맨살마저 도려낸다.

 

“크…윽…!”
“아저씨!!”
“괜찮아…. 아직 멀쩡해.”

 

부상은 입었지만 흐려지지 않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는 제이. 그 앞에선 유리가 조금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진짜 많이 회복하셨나봐요? 나름 진심으로 한 공격이었는데.”
“하핫…나보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어린애’한테 당할 사람은 또 아니거든, 내가.”
“…그렇네요. 예전에도 그랬었죠. 강남 데미플레인 사건이라던가.”
“꽤나 옛날 추억 이야기를 꺼내는구나….”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서요. ……근데, 아저씨. 아까 질문하신 거 있죠. 이게 최선이었냐고. 그 대답 말인데요.”

 

들고 있던 칼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유리는 말을 이었다.

 

“네. 이게 최선이었어요. 이런 몸이 되지 않았으면…지금쯤 전 애쉬와 더스트에게 이런저런 능욕을 당하고 있었겠죠. 장난감으로서.”
“…….”
“변명 같을지는 모르지만…전,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이 선택이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줬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 후회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러…냐.”
“아저씨라면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도 될까요. 아저씨도, 사회에 휘둘려서 이것저것 많이 잃어버리셨으니까.”
“많이 잃었다 뿐이겠냐. 전부 잃었어, 전부.”
“그럼, 눈 감아 주실래요?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가려고 하니까.”
“그건 곤란할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난 클로저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 말에 뭔가를 깨달았는지 쓸쓸하게 한숨을 내뱉은 유리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나, 아저씨를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걱정 마. 너보다 경험 많으니까 너보단 오래 살 거다. 그리고 건강이 제일이야. 지금까지 챙겨온 건강이 날 지켜주겠지.”
“…미안해요, 아저씨. 죽을 때 까지 아저씨를 잊을 수 없을 거에요.”

 

완전히 상체를 숙인 채, 당장이라도 튕겨나갈 기세를 풍기는 유리.
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맞설 준비를 하는 제이.
그리고ㅡ이내 유리의 신형이 흐려지듯 사라진다.

 

“!!!!!”
“…일섬.”

 

찰나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유리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진다. 너무 빨라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오히려 천천히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격. 그대로 휘둘러진다면 분명 제이의 몸은 거리낄 것 없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리라. 유리 자신도 그걸 알고 휘두른 공격이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래ㅡ멈출 생각은, 없었다.

 

“크…으……!!”
“……!!”

 

제이를 향해 그어진 죽음의 선을 가로막는 작은 이물질. 어느새 슬비가 끼워 넣은 단검이 일섬의 궤도 위에서 검이 더 나아갈 수 없도록 막아서고 있었다.

 

“슬비…너…!”
“아까 그랬지…사람은 안 보는 사이에 성장한다고……!!”

 

있는 힘껏 유리의 검을 밀어내는 슬비.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한 유리가 뒤로 물러나자, 이내 들고 있던 단검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
금속성을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단검을 보며, 유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 걔네 둘도 못 막고 피하던 기술인데.”
“유감이야. 나도 실력 하나는 죽어라 길렀거든. 위상력이 늘어나질 않으니 이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아하하…역시 대장은 대장이라 이거네. 솔직히 나 지금 엄청 쫄았어.”
“다행이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까와는 반대로 제이의 앞을 막아선 슬비는, 뒤에 선 제이를 향해 명령했다.

 

“지금 당장 미스틸테인을 데리고 이탈하세요. 가는 김에 세하도 데리고 가시고요.”
“하지만ㅡ!”
“명령입니다. …걱정 마세요. 저 지금 냉정해요. 꼭 돌아갈게요.”
“……알았다. 꼭 돌아와, 대장!”

 

기절한 미스틸테인을 들쳐 업고 현장을 이탈하는 제이. 하지만 유리는 도망치는 둘을 쫓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지금 눈앞에 당당하게 선 소녀를 향해 있었다.

 

“쫓아가지 않는 거야?”
“안 쫓아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 아저씨를 죽일 필요가 없어졌잖아.”
“전보다 사고방식이 많이 차원종처럼 변한 거 같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고.”
“그거,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고?”
“…….”

 

잠시 이어지는 침묵. 이윽고 유리가 다시 입을 연다.

 

“있잖아, 슬비야. 나,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거 같아.”
“…그래?”
“차원종이 된 직후엔 스스로가 막 혐오스러웠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고.”
“…응.”
“근데, 가족을 구하고 나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힘이 내 가족을 구했으니까, 미워하지만은 말자고.”
“…응.”
“근데, 점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 솔직히 오늘 여기에 모인 사람을 다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도, 아무런 거부감도 들질 않았어. 오히려 해야 할 일이 정해져서 상쾌하더라.”
“…그랬어?”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놀랄 정도로 마음이 편해진 날 발견할 수 있었어. 조금도 떨리지 않더라. 내 검 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너무 익숙해보였어.”
“…….”
“조금 공상가나 중2병 같은 소리만 늘어놓은 거 같지만…그래도 말할게. 나, 이제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나 스스로는 멈추지 못할 정도로, 차원종으로 변해버린 내가 느껴져.”
“…그래서?”

 

차분하지만 냉정한 되물음으로 대꾸하는 슬비에게, 유리는 보라색 열쇠를 건냈다.

 

“……이건 무슨 의미로 주는 거야?”
“다음에 내가 이쪽으로 넘어왔을 땐…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차원종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혹시라도 네가 날 막을 각오가 생긴다면, 그걸 써서 내 영지로 넘어 와. 플레인게이트의 이동석에 사용하면 될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건데.”
“요컨대, 이런 거야. 혹시라도 각오가 선다면. 그리고 만약 가능할 거 같으면.”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자연스럽게 차원의 균열을 만들어 내는 유리. 그 너머로 한 발을 걸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며, 유리는ㅡ.

 

 

 

“나를 죽여줘.”

 

 

 

ㅡ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차원종에 의한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오히려 역대 차원종의 습격 중 가장 짧은 시간에 종결된 이번 사건.
하지만 그 사건이 가져온 피해는 사회적 관점으로 봤을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회 의사당 건물의 반파.
-회의에 참석한 국회의원=정, 재계의 거물들 전원 사망.
-회의장을 지키고 있던 경호업체 인원, 전원 사망.

 

 

 

물리적, 정치적, 경제적, 국가의 위신에 비추어 봤을 때 지극히 괴멸적인 타격.
하지만 유니온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심각한 사안이 추가된다.

 

 

 

-습격을 주도한 차원종의 정체. 전(前) 검은 양 팀의 요원-서유리. 
 분류 : 군단장급 이상.

 

 

 

전직 요원이 차원종이 된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 정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을 파괴하고 국회의원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니온은 무능하다던가 물러가라던가 하는 반대 단체들에 의해 한바탕 풍파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검은양 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우.”

 

 

등 뒤에서 닫히는 취조실 문 소리에 슬비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거의 한나절을 취조실에서 무의미한 질문과 추궁에 뒤덮여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 그녀의 뺨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는다.

 

 

“수고했어.”

 

 

차가운 것의 정체는 근처 자판기에서 뽑아온 것으로 보이는 500원 짜리 음료수. 출처는 아까 전부터 취조실 밖에 있었다는 듯 게임기를 한 손에 든 세하였다.
내밀어진 음료수를 받아들자, 바로 옆에 주저앉아 게임을 시작한 세하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이제 완전히 끝난 거야?”
“응…. 아마 그렇겠지. 더 캐물을 것도 없을 테고. 그나저나, 넌 꽤나 일찍 나왔네.”

“아…어째서인지 빨리 내보내주더라고. 뭐, 이유에 대해선 대충 짐작이야 가지만.”

 

자기 몫으로 가져온 음료수를 들이키며, 세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지간해선 엄마 이름값에 기대고 싶지 않았는데…역시 그런 쪽으론 벗어나기 힘든걸까, 나.”
“몇 번이고 말했잖아. 그런 걸로 투정부리는 건 배부른 일이라고.”
“유리 말야, 정말로 차원종이 된 거냐?”

 

기습적인 질문에 캔을 기울이던 슬비의 손이 멈칫한다.

 

“아무래도 진짜인가보네. 그 반응 보니까.”
“……빨리 알았네? 정보통제 하고 있는 것 같던데. 퍼져도 루머 정도로 끝나게.”
“나랑 한판 붙었던 차원종 있지? 그 녀석이랑 끝장 보기 직전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그 목소리 듣자마자 그 자식이

갑자기 도망쳐 버려서…. 근데, 그 들려온 목소리가 유리 목소리더라.”
“…잘못 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본 거야?”
“바보냐. 몇 년을 들은 목소리야. 이제 와서 잘못 들었을 리 없잖아. ……기왕이면 잘못 들었던 거라면 더 좋았겠지만.”
“…….”
“진짜 못 말리는 녀석 아니냐? 우리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되어버리기나 하고…우리가 명색이 동룐데…나쁜 애야, 진짜.”
“…….”

 

그 한탄에, 슬비는 아무런 맞장구도 쳐 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를,
그리고ㅡ누가 그렇게 몰아넣었는지도.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서서히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게 변해가는 공기.
거북하기만 한 그 공간에서 슬비를 구해 준 것은, 예상치 못한 지원군이었다.

 

“저, 저기…이슬비 요원님.”
“?? 아…너였구나.”

 

쭈뼛거리며 다가온 것은 순해 보이는 인상의, 신입 연구원처럼 보이는 소녀. 분명 정미의 후배인가 하는 연구원이었다. 슬비가 소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다가온 소녀는 가만히 슬비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에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도와줬으면 하는 일?”
“네. 급한 일인데 도움을 청할 분이 이슬비 요원님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제발 선배 좀 도와주세요….”
“정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건 아닌데…조만간 생길 거 같아서….”

 

말을 하면서도 떨리는 정미 후배의 목소리에 슬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정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세하야, 미안. 나 조금 일이 생겼어.”
“어…응. 나중에 보자.”
“그럼 안내해 줄래?”
“네, 넷!”

 

마음이 급한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는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슬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어느 연구실 앞에 멈춰 섰다.

 

“이 안에 정미가 있는 거야?”
“네…. 근데 며칠 전부터 아예 문도 안 열어주시고…그래서….”
“며칠 전? 혹시 지금까지 밖으로 안 나온거야?!”
“제발 도와주세요…. 이젠 대답도 안 해 주시고 계신다고요….”
“……!!”

 

울먹이기 시작하는 소녀의 목소리에, 슬비는 지체 없이 문을 두드렸다.

 

“정미야! 우정미! 너 안에 있는 거 맞지! 대답 해!!”

 

강하게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슬비는 문을 한층 더 강하게 두드렸다.

 

“우정미! 야, 우정미!! 대답 해! 무사한거야?! 대답 좀 하라고!!”

 

여전히 묵묵부답인 문 너머. 몰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슬비는 강제로라도 문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위상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 정미야! 너 무사했어!?”
[이슬비?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데.]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며칠 동안 거기서 안 나왔다면서 네 후배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나 아냐고!”
[…….]
“어쨌든 문 열어! 빨리!”
[…기다려.]

 

작은 기계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열리는 문.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자, 많이 수척해진 모습의 정미가, 자기 의자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정미. 하지만, 슬비와 소녀의 시선은 그 뒤를 향해 있었다.

 

“이게…다 뭐야?”
“서, 선배…이건 대체….”

 

책상 위로 위태롭게 쌓여있는 서류의 덩어리들.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도 엄청난 양의 서류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혹시라도 쓰러지면 압사할지도 모를 양에 놀라는 두 사람을 향해, 정미는 짜증난다는 듯 대꾸했다.

 

“뭐긴 뭐야, 연구 자료지. 이런 일, 한두번 겪어보니?”
“아, 그…죄, 죄송해요.”
“그런 말투는 좀 아니라고 보는데, 정미야. 얘, 널 엄청 걱정했다고.”
“걱정해 달라고 한 기억 없어.”
“너…….”
“…….”

 

서로를 싸늘하게 노려보는 두 사람. 결국 먼저 눈빛을 거둔 것은 정미 쪽이었다.

 

“……하아. 얘, 가서 먹을 것 좀 사다줄래? 요 며칠 칼로리 바로만 버텼더니 배고프긴 하네. 돈은 얼마 들었는지 다녀와서 말하고.”
“네? 아, 네! 금방 다녀올게요.”
“천천히 다녀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빠르게 자리를 뜨는 소녀.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슬비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좋은 애잖아. 아껴주지 그래?”
“…너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이런 말 듣기 싫으면 다른 사람이 걱정하게 만들지 마.”
“걱정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 멋대로 걱정하고 나 때문에 걱정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야.”
“너 말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무는 슬비. 대화의 주체가 정미인 이상,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뭐…마침 잘 됐어. 어차피 널 한번 보긴 해야 했으니까. 후배가 데려와 줘서 번거로움이 줄어들었네.”
“…날? 왜?”
“선택할 기회를 주려고.”
“기회…?”
“이거야.”

 

정미가 내민 한 자루의 단검. 양면에는 다른 색의 버튼이 달려 있는, 그 외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게…뭐야?”
“666 시리즈라고 들어본 적 있지?”
“666…. 차원전쟁 당시에 개발되었다 사장된, 그 위험한 장비들?”

 

 

666 시리즈.

 

 

차원전쟁 당시 클로저들의 위상력과 전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발되던 장비이지만, 사용자의 위상력을 극한까지 소모시킨다는 점 때문에 폐기된 장비 시리즈를 말하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으로 강남에 배속되었을 때 제작에 대한 연수에서 그 시리즈 중 하나인 검의 코어가 나와서 당황한 적도 있었던 것을, 슬비는 기억해냈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건데.”
“그거, 그 666 시리즈를 토대로 만든 개량판이거든. ‘차원종을 인간으로’ 만들 수 있게. 보나가 많이 도움을 줬어.”
“……뭐?”

 

정미의 마지막 말에 슬비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정미가 뭐라고 한 거지?

 

“원리는 너희가 애쉬와 더스트라고 부르는 걔들의 방식과 비슷해. 사용자의 위상력을 그 코어를 통해 최대 100배 까지 증폭시키고, 원래 인간이었지만 차원종이 되어버린 특수한 케이스의 상대방에게 찌르는거야. 그럼 코어를 통해 증폭된 제 1 위상력이 대상의 체내로 침투하고, 그 출력으로 차원종의 위상력인 제 2 위상력을 밀어내고 대신 자리 잡게 되는 거지.”
“그럼…정말로 차원종이 된 사람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다는 거야?”
“이론상으론 가능해. …하지만, 실용화는 할 수 없어.”
“어째서! 이런 기술을 개발했다면 당장 본격적인 연구를ㅡ.”
“끝까지 들어!”

 

책상을 내리쳐 슬비의 말을 끊는 정미. 슬비가 진정하자, 정미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이 기술은 실용화 될 수 없는 기술이야. 왜냐하면…이건 사용자의 위상력을 전부 써야 겨우 작동하는 코어거든.”
“…그 말은.”
“이걸 사용하면, 두 번 다시 클로저로 돌아올 수 없어. 위상력 상실증이 강제로 걸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위상력만 사용하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출력이 부족하다면 사용자의 ‘생명’까지 끌어다가 작동하는, 악마 같은 코어라…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없어.”
“그럼, 이 물건을 나에게 주는 이유는 뭐야.”
“……말 했잖아, 기회를 주는 거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미는 천천히, 슬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ㅡ양 손으로, 슬비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네 목숨을 바쳐서 유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지금까지 없던 무거운 침묵이, 좁은 연구실 안에 내려앉는다.
그럴 수밖에.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 그 죄의 속죄를 자신의 목숨으로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하나. 비 이성적이고 윤리적으로 완전히 어긋난,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참동안 서로 마주한 시선을 떼지 않는 두 사람.
이윽고, 쥐었던 멱살을 풀어내며, 정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택지. 뒤에 버튼이 하나 더 있을거야.”
“…이거?”
“응. 그거. 그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을 찌르면, 상대방의 위상력을 폭주시킬 수 있어. …위상력을 가진 존재라면 확실히 죽일 수 있지.”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네 목숨이 아깝다면…네 손으로 유리를 죽여.”
“…….”
“놀라지 않네.”
“예상은…했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뭐, 어느 쪽이던 넌 파멸이야. 유리를 죽이던, 유리를 살리고 네가 죽던…거기서 거기라고. 그러니까ㅡ.”

 

의자를 돌려 슬비에게 등을 보이며, 정미는 등 너머로 덧붙였다.

 

 

“이도 저도 싫다면, 이젠 전부 잊어버려.”

“…….”
“지금 플레인게이트 너머, 유리가 있을법한 지역을 찾고 있어. 조금 있으면 찾을 수 있겠지. …그 때까지 마음의 결정을 끝내.”
“…….”

 

슬비는 말없이 일어나 연구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정미는 홀로 정적 속에 남는다.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정미는 중얼거렸다.

 

“그래, 잊어버리면 돼.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마…….”

 

어쩔 수 없었다고, 머리론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만약 네가 결정을 내린다면….”

 

하지만, 마음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원망하겠지.

 

“……난 그 결정에 따를 거야.”

 

이건 스스로의 이기심이라고, 정미는 단정 지었다. 모든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그 결과 또한 홀로 책임지게 하려하

고 있었으니까. 인간으로서 최악이라 함은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정미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행여나 슬비가 죽더라도 죄책감 따윈 가지지 않으리라.
행여나 유리를 죽이더라도 원망 따위 하지 않으리라.
스스로의 목숨이 아까워 포기한다 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리라.
그것은, 전부 죄를 지은 그녀의 선택일 테니까.
하지만…혹시라도 그녀가 스스로를, 혹은 유리를 죽인다면ㅡ.

 

 

“……누가 되었던 외롭지 않게 길동무 정도는 해 줄게.”

 

 

가만히 중얼거리는 정미의 앞에 쌓인 서류. 그 아래에서는 차갑고 예리한 은빛의 물체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넌…어떤 선택을 할 거니? 슬비야.”

 

유리가 있는 곳을 찾아내기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분명 그녀는 이성적인 선택을 하겠지.
부디 그러길 바라며, 정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ㅡ그런 바램도 무색하게, 슬비는 플레인 게이트의 차원 이동석 앞에 서 있었다.

 

 

“…….”

 

품에서 꺼낸 보랏빛 열쇠를 이동석에 사용하자 곧바로 열리는 차원문. 그 너머로는 홀처럼 거대한 공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슬비. 그녀가 통과하자 문이 닫히고, 소란스럽던 플레인 게이트의 소음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왔구나.”
“응…나 왔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리가 보인다.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가는 슬비. 마침내 얼굴이 자세히 보일 정도로 가까이 마주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슬쩍, 웃어보인다.

 

“생각보다 결심이 빨랐네.”
“몰랐니? 나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
“그랬던가…. …응, 그랬을지도.”

 

유리의 수긍에 끄덕거림으로 긍정한 슬비의 손에는, 어느새 정미에게서 받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거네. 그걸로 날 죽이려고?”
“새로 나온 코어야. 성능은 확실하다더라.”
“아…이런 상황에 좀 웃길지도 모르는데, 기왕이면 안 아프게 죽고 싶어.”
“…의외로 겁쟁이구나.”
“그러니까 말야. 쪽팔리게….”

 

머쓱하게 웃음을 터트리고선 이내 바닥에 얌전히 누워 양 팔을 벌리는 유리. 잠시 그런 유리를 바라보던 슬비는 드러누운 유리의 허리 부근에 다리를 벌린 채, 걸터앉았다.

 

“어, 엄청 부끄러운 자세네.”
“…너랑 한 번 쯤 해보고 싶었거든. 이런 거. …정미랑은 자주 했을 거 아냐.”
“아니, 그건 그렇지만.”
“바람이라도 피우는 거 같아? 이미 거하게 뒤통수를 때렸으면서.”
“…….”
“정미, 많이 슬퍼했어.”
“그건 미안하게 돼 버렸네.”

 

‘앞으로 더 슬퍼할지도 모르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유리. 그 모습에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아?”
“응?”
“네 가족들, 괜찮겠냐고.”
“……괜찮아.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은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거든. 내가 죽더라도 내 가족들은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로 맹세했어.”
“차원종을…믿는구나.”
“속일 땐 속이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걔들은 고지식하거든. 믿어도 괜찮아. 봐. 지금도 주군인 내가 습격받고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있잖아.”

 

확실히 주변은 조용했다. 유리가 미리 휘하 차원종들을 물려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긴 너랑 나 둘 뿐이야. 날 굽던, 삶던…아무도 방해하지 못해.”
“넌, 안 무섭니? 지금부터 넌 죽는 거라고.”
“……….”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유리. 아주 짧은 생각의 정리 후, 유리는 홀가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런 걱정을 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걸 보면…난 아직 완전히 차원종이 되진 않은 거겠지.”
“…….”
“그러니까 괜찮아. 난 아직ㅡ인간인 채로 죽을 수 있어.”
“…그렇네. 좋겠다, 이 나쁜 년아. 소원 성취해서.”

 

원망을 가득 담아 양 손으로 쥔 단검을 위로 치켜드는 슬비. 그녀의 손가락이 ‘버튼’을 누른다. 이윽고 자신을 향해 내려쳐질 준비가 끝난 그것을 바라보며, 유리는 가만히 손을 들어 슬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하하…. ……슬비야.”
“…뭐.”

 

 

 


“고마워.”

 

 

 


어둠으로 가득한 홀.
그 안에서, 한순간 차가운 검광이 번뜩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ㅡ푸욱

 

 

 


섬뜩한 감촉이 가슴을 파고든다.
검이 꽂힐 때의 고통에 떨려오는 몸. 이내 화끈한 감각이 가슴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하……아하……아프네…….”
“…….”
“그래도…이걸로 된 거야…….”
“…….”
“내가 죽으면…문이 다시 열릴거야. 슬비 넌…다시 돌아가면……돼…….”

 

 

이걸로 됐다.
자신은 인간인 채로 죽는다.
가족들은 충성스런 부하들이 지켜주겠지.
그리고 친구는…이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에 미소짓는 유리의 귓가에 전혀 의외의 대답이 들려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누구 맘대로 죽어.”
“……어?”
“나 말고, 아직 빌어야 할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에게…직접 가서…빌어……!!”

 

ㅡ쿵,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떨리기 시작하는 공간. 그 진원지는ㅡ바로 슬비였다.

 

“슬비야…너?!”
“으으……!!”

 

괴로운지 신음을 흘리는 슬비. 그녀의 손가락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버튼이 아닌, 스스로를 죽이기 위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크으으으……!! 아아아아아ㅡ!!”

 

코어를 통해 끊임없이 유리의 몸으로 파고드는 위상력. 한없이 부족한 출력을 가진 슬비의 위상력이었지만, 100배로 뻥튀기 된 이상

 그 힘의 총량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슬비야! 그만 둬…!!”
“싫어! 죽어도 그만 안 둬…!”
“그러다 진짜 죽는다고! 이 바보야ㅡ!!”

 

차원종이 된 지금, 유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증폭되어 방출되는 것은 슬비의 위상력만이 아니다. 그녀의 생명력까지 함께 자신의 몸으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ㅡ둬……!!”
“절대…안 돼…!”
“고집 때문에 네가 죽을 필요는 없잖아!! 내가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건데ㅡ!! 이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모르는 건 너야! 정미가 어떤 마음으로 널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 안 해 봤니?!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으면 나더러 죽여 달라는 말은 감히 하지도 못했을 거야!!”
“……!!”
“그리고…그 날…널 위험에 빠트린 건 나야…. 그러니까 이건…내가 책임질 일이야…!!”
“아니야! 그건 내가 멋대로ㅡ.”
“내 잘못이라면 내 잘못인거야! 마지막 정도는 대장 말 좀 들어, 이 바보야!”

 

서서히 느려지는 위상력의 흐름. 그리고, 동시에 슬비의 생명도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만 해! 그만 두라고!! 슬비야ㅡ!!”
“하아…하아…. …유리……야.”

 

맥없이 앞으로 넘어지는 슬비의 가녀린 몸. 겨우 고개만 들어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슬비를 바라보는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유리야….”
“말하지 마! 괜히 힘 빠지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들어…!”

 

떨리고 있었지만 결연한 슬비의 일갈에, 유리는 입을 다물고 슬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기…유리야……그거 알아?”
“……뭐.”
“나 있지…네가……좋았어.
“…….”
“…정미 때문에 포기했던 일이…후회될 정도로…좋았어.”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바보야….”
“헤헤……후회스럽거든…조금만…용기를 내 봤으면 좋았을…텐데.”
“…….”
“그래도 다행이다…죽기 전에…전할 수…있었네….”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너 안 죽어…!”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유리.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슬비의 몸은 빠르게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차가워진 슬비의 손이, 유리의 뺨에 와 닿는다.

 

“돌아가면…정미랑…잘 지내야 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죽지 마…!”

 

유리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원종이 된 후로 거의 흘려본 적 없는 눈물. 영화나 이야기에선 이럴 때 기적이 일어나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서서히, 슬비의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졸려…. 피곤해…. …나, 너무 많이 움직였나봐.”
“응…너 정말 열심히 했어.”
“정말 그렇다니까……. 그러니까……나 조금만……잘게.”

 

미약하게나마 흘러들어오던 위상력이 끊어진다.
과부하가 걸렸던 코어가 서서히 바스라진다.
미소를 짓고 있던 고개가 떨어진다.

 

“슬비야…눈 떠…. 자면 안 돼…….”

 

 

아무리 귓가에 속삭여도 친구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나 좋아한다면서…그럼 눈 떠…….”

 

 

매정한 신은 어떠한 기적도 내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큰 거…전부 맡겨놓고 가면…난 어떻게 하라는 건데….”

 

 

너무 커다란 것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품었던 마음이라니, 그런 걸 가볍게 여길 순 없다.
하물며ㅡ그것이 소중한 친구의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서서히 약해지는 친구의 고동을 느끼며, 차가워진 슬비의 몸을 꽉 끌어안는 유리. 잠들 듯 눈을 감은 그녀의 귓가에, 유리는 속삭인다.

 

“내가 어떻게든 할게.”

 

 

 

이건 맹세다.

 

 

 

“꼭…지켜줄게…….”

 

 

 

스스로에게 하는, 지워지지 않을 맹세다.

 

 

 

“전에도 그랬잖아…그러니까 이번에도…반드시 지켜줄게…….”

 

 

 

생명이 사라져가는 친구의 몸을 끌어안은 채, 유리는 스스로의 영혼에 자신의 말을 새겨넣는다.

 

 

 

“내 전부를 걸어서라도….”

 

 

 

 

 

 

 

 

 

 

 

 

 

 

 

 

 

 

 

 

 

 

 

그리고,

 

 

"곤란해 보이네? 서유리."

 

 

 

 

ㅡ악마는, 절실한 사람에게 손을 뻗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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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끝!! 이제 에필로그만 남았습니다.

 

2024-10-24 22:36:4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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