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 (Rainy Spell)

동찌 2015-07-12 1

1



엄지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팔을 타고 발끝까지 찌르르 울렸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손이 팔꿈치께를 붙잡았다. 잔뜩 뭉친 신음이 천천히 터졌다. 그 소리에 시야를 바로 잡자 거칠게 흔들리는 노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퍼붓는 장맛비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무 그늘에서 했던 약속, 장마로 강물이 불어 넘친 날 뒷마당에 숨어 했던 이야기들. 작고 앳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느, 나···. 이상, 력.. 하지 마···.


위상능력자의 민간인 살해. 할머니 댁의 낡은 라디오에서나 듣던 이야기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매체에서 지겹도록 반복 학습 되어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띵했다. 곧 들이닥칠 유니온 사람들, 경찰,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는 여전히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계속해서 터지던 신음도, 자꾸 흔들리던 몸도 잠잠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다리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쌩한 냉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나, 아니야.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각난 유리 파편이 쿡쿡 찔러댔다. 레비아는 등을 돌렸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차례였다. 뜀박질하려는 순간 방안에서 뻗쳐 온 손이 발목을 붙잡았다.


누나

으, 이거 놔!


한 번 붙은 손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별안간 울음이 터졌다.


누나!


눈앞에서 시퍼런 머리가 흔들렸다.


아이, 참. 이 누나 수면장애라니까.


나타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여즉 서늘한 발목을 감싸 쥐고 되물었다.


수, 면 장애?

으, 그게 그니까 ··· sleep disturbance.

아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무슨···. 나중에 병원이라도 가 봐.

응, 그럴게.


대답을 듣고 나서야 얼굴이 서서히 멀어졌다. 사무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깥을 빤히 내다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타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장마래.

또 시작이네.

시간 금방 간다니까. 으···.


장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레비아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빗소리에 얽어진 어린 남자애의 목소리가 귓등을 찔러댔다.


누나.


변**가 오지 않은 미숙한 음성. 잡아 누르던 손목. 버둥거리던 몸. 잠이 들면, 네가 나오고 잠에서 깨면 네 목소리가 들려. 어쩌면 좋니.




우기 (Rainy Spell)




누나, 하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흔들리더니 별안간 몸이 붕 떴다. 뜨거운 열이 사방에서 짓눌렀다. 괜찮니? 하는 소리도 같이 붕 뜨다 뜨겁게 가라앉았다.


더워요.


웅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채 닿지 못했는지 저 짝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는 크게 말할 힘도 없었다. 뜨거운 여름의 파도가 온몸을 덮쳤다.


얘, 열나는데?

그럴만하지. 새벽 내내 길바닥에서 퍼질러 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뭐가.

어디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여기 말이야.


나타가 집게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 주변에서 빙빙 원을 그렸다.


**가, 이상한 소리 말고. 이거나 들어.


가방끈이 목에 걸리더니 큰 손이 뒤통수를 후렸다.


아오, 저 꼰대 **···!


발끝에 돌부리가 툭툭 채였다. 확, 튈까 보다. 비죽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발 뒤축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골목길에 왕왕 울렸다. 그 소리에 앞서가던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얼른 안 오냐.

가고 있어.


틱틱 대는 꼴이 5살짜리 어린 애보다 더했다. 저건 언제쯤 크려나, 하며 걸음을 옮겼다.


좀, 같이 가!

그러게, 얼른 왔어야지. 꼬맹아.

거, 한시라도 애 취급 안 하면 혀에 가시가 돋나?

응.


허어,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2



레비아는 일주일하고도 삼일을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그저 심한 감기일 뿐이라고 했는데도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 교대.

···으,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또, 또 저거. 나타는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방을 나섰다. 귀찮게 일만 벌이고 말이야. 한동안 방문 앞에서 구시렁거리다 옆 탁자에 흰 봉투를 꺼내 올려두었다.



3



자가 진단 의뢰서?

응. 필요할 것 같아서.

본인이 괜찮다는데 무슨···.

말만 그렇지. 봐, 대뜸 새벽에 나가더니 드러눕지 않나. 이런 건 주변 사람들이 해줘야 하는 거야.

그래, 그런데. 일어나야 뭘 하던 말던 하지 않겠냐.


레비아는 꼬박 일주일을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잠깐 눈을 뜨면 창밖을 확인하고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비가 퍼붓는데도 꿈에 그 애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땐 비가 막 그쳤을 때였다. 이제 정말 끝 인가 봐,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 꿈속으로 잡아끄는 듯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 애가 나타났다. 근 이 주 만이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입을 꾹 다문 노란 머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화가 난 눈치였다.


···미안해.


그 애의 아빠가 달아준 그네가 있는 늙은 밤나무. 그는 그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비아는 이제껏 그 애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무서움이 덮쳐왔다.


미, 미안. 미안해. 정말로.


무릎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미안해, 덩어리진 말들이 입에서 질질 흘러나왔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진짜 ··· 진짜 미안해.


거짓말. 그는 신발코로 흙장난을 하다말고 나무 기둥 뒤로 쏘옥 숨었다. 나무껍질을 잡아 뜯는 하얀 손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제 팔을 뿌리치려고 다가오던 손. 내가 그 손을 어떻게 했더라. 3년 전 일이라 그런지, 아님 하루 새에 몽땅 잊은 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안해, 그러니까···


앞으로 나타나지 마. 뒤 엣말을 하려는데 번뜩 눈이 뜨였다.


서울과 중부지방은 오늘 저녁까지, 남부지방은 내일 아침까지 비가 계속되겠는데요. 내일 오후부터 전국이 맑은 날씨를 보이겠습니다.


내일이면 끝이래. 너랑 나도.


아까까진 선명하게 그려지던 모습이 차츰 흐릿해졌다. 3년이면, 그만할 때도 됐잖아, 그치? 끝없는 자기 합리화를 하다 보면 불현듯 네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누나,


하고. 그러나 이번엔 그 애가 아니었다. 나타의 목소리만 분명하게 들렸다.


언제 일어났어?

아까 방금.

내가 탁자 옆에 둔 종이는, 봤어?

응. ··· 말했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냐. 하여간 답답하다, 답답해.


앞으론 그럴 일 없어, 뒷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도로 삼켰다. 빗소리가 멎어가고 있었다. 비가 오던 그 날 밤도 함께 희미해져 갔다.


안녕. 지겹게 따라붙던 빗소리도, 너의 목소리도. 이번 우기를 끝으로.

2024-10-24 22:36:3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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