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꾼과 환영경계의 우로보로스 - 프롤로그 (2)

서진권 2014-12-26 1

차갑게 식힌 캔의 감각 대신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의 무언가가 그의 손 끝 에 감미롭게 감겨온다. 제이는 놀라며 이질적인 감촉이 머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여성의 손이 그의 손 아래로 겹쳐져 있었다. 여자는 놀란 듯 나머지 한 손으로 조신하게 입을 가리고 있다. 이럴 때는 당황하면 서로 무안하다. 그는 그 사실을 잘 아는 듯 하다. 제이는 여성의 손에서 차분히 손을 떼곤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살며시 숙여 사과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목소리가 꽤나 단아하다. 이제 보니 옷차림은 그렇다 쳐도 외모는 꽤나 수려하다. 별 모양의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눈에 띈다. 이런 벽지에 자리 잡은 편의점에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다.

“저기, 먼저 가져가세요.”

“괜찮습니다, 먼저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먼저 가져가세요.”

그의 양보에도 여자는 제이에게 먼저 차례를 양보했다. 그는 더 사양 않고 맥주캔을 집어 자리로 돌아왔다. 라면이 아까보다는 조금 불어있다. 느낌만으로는 무척 짧은 시간 이었을 텐데. 

그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라면을 한 바퀴 저어 한 입 문다. 조금 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가 선글라스 위로 뽀얗게 김을 서렸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한 번 음식 맛을 본 그의 위장이 허겁지겁 손놀림을 가속시킨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넉넉잡아 15분인데, 제이는 몇 젓가락 만에 그릇을 비웠다.

여자는 그와 두 자리 쯤 건너에 앉아 아까의 맥주를 마시며 신기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고 있다.

“형, 좀 천천히 드세요, 백수인 거 광고하시는 것도 아니고.”

소년은 여자를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더니 그에게 짓궂게 핀잔을 주며 순식간에 텅 빈 그릇을 가지고 사라졌다.

“많이 배고프셨나 봐요?”

여자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사무실 방향에서 수돗물 트는 소리가 어렴풋이 라디오의 통기타 연주와 섞여 들려왔다.

“글 쓰는 사람은 언제나 배고프죠.”

“어머, 글 쓰는 분이세요?”

“최근엔 전혀 못쓰지만요.”

제이는 그렇게 말하곤 맥주캔을 따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 뭐랄까......많이 답답하시겠네요. 특히 글 쓰는 일이라면.”

“굳이 글 쓰는 일이 아니라도, 하고자 하는 일이 계속 엉키는 것만큼 심적으로 힘든 건 없죠.”

글 쓰는 직업이라는 이미지에 동한 것 일까? 여자는 자리를 옮겨 그에게 한 자리 분의 거리를 좁혀왔다. 어쩌면 그의 특이한 외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이의 머리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새하얬다. 특유의 윤기와 함께 어딘지 모를 투명함을 지닌 그의 머리칼은 어디를 가나 제이를 주목받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많은 주민 그를 신기해하며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곤 했다. 여기 온 이후로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길 잘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 예쁘네요.”

“덕분에 어디서나 주목받곤 하죠.”

“선글라스,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할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지금처럼 이라거나.”

“솔직히, 선글라스 쓰고 라면 먹는 사람 처음 봤거든요. 너무 빤히 바라봤다면 죄송해요. 그 보다 그 쪽 먹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배고파지는데, 어때요? 저한테도 맛있는 거 좀 사주실래요?”

여자는 이미 그의 옆자리까지 밀고 들어 와 있다. 소년은 아직도 설거지 중인가 보다. 그릇을 만들어서 닦아도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 이다. 정말로 쓸데없는 곳에서만 눈치가 빠른 놈이다. 그리고 그 점이 제이를 안도하게 만든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장난 그만하죠.”

“네?”

여자가 당황스러운 듯이 되물었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불투명한 선글라스 뒤에 숨은 시선이 곁눈질로 그녀를 샅샅이 훑고 있다.

“지금 뭐라는......”

“소속과 관등성명, 그리고 누가 보냈는지 그것부터 먼저 말 하시죠. 길게 시간 끌고 싶지 않네요. 가급적이면 저 녀석 나오기 전에 끝내고 싶으니까.”

여자는 한참을 굳어 있다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 쉬며

“어떻게 알았죠?” 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제1차 도주경로인 건물 정문에 필요 없는 주의를 끌지 않으려 후문을 따고 들어온 노력은 칭찬해주고 싶네요, 하지만 이곳의 후문은 항상 잠겨있죠.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후문을 따고 들어왔다는 소린데, 냉장고 쪽으로 가는 순간 정문 쪽 으로 사각이 졌다고 한 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모를 정도로 제가 퇴물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서 제 시야가 좁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그리고 손 등에 추적유도제 발라놓은 뒤 손을 잡게 만든다니, 꽤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보통 남자였다면 도주한다 한 들 꼼짝도 못하고 미행당했겠죠.”

“바꿔 말하자면, 당신은 보통 남자가 아니다, 그런 거로군요?”

“아뇨,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나 덧붙여서 말하자면, 당신, 어프로치가 방법이 너무 뻔해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겠더군요. 미인계가 나쁜 방법이라는 건 아닙니다만, 영화나 드라마 보고 배우는 건 그다지 추천해주고 싶진 않네요.”

“초대 클로저 라길래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사람 무안 주시는 건 정말 프로 맞으시네요.”

“상당히 꼼꼼한 성격에 임무에 있어서 결과, 과정 둘 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타입 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꼭 중요한 부분에서 실수하죠. 더군다나 지금 직급은 달은 지도 얼마 안 된, 한마디로 완전 초짜, 제 말이 틀린가요?”

“네, 네, 이제 그만하세요. 알겠으니까, 땅 같은 후배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말은 그만 해 주실래요?”

여자는 재차 한숨을 쉬며

“유니온 대한민국 서울총괄지부 준S급 현장관리감시관 김유정입니다. 상관은 SS급 감독관이자 특수작전국 국장 데이비드 리.이제 됐나요?” 하고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 남자도 와 있나요?”

“그냥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 상관은 오늘 당신을 만나러 몇 개월 동안 저더러 당신을 감시하게 만들었으니까.”

“제 생활들, 전부 다 봤겠군요.”

“그럼요. 저희는 당신이 속옷 갈아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 몇 개월 동안 글씨 한 글자도 못 쓴 것 까지 전부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작전이 간파당한 것이 분했는지, 유정은 자신의 패가 돌아오자 꽤나 의기양양한 말투다. 생각 외로 알기 쉬운 성격이다.솔직히 유니온의 감시를 고작 커텐 따위로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당했다고 생각하니 그리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전 먼저 일어납니다.”

“네? 이, 이봐요! 잠깐, 제 말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유정이 다급하게 일어섰다. 하지만 더 하고 싶은 말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은퇴한 몸 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온 목적 같은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 할 수 있었고, 그것이 뭐든 지 간에 듣고 싶은 마음 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데이비드 리, 아니 이준성하고 하고 싶은 말 없고, 그럴 일 있다 해도 안할 겁니다.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중저음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입구 쪽인가? 정말 질리지도 않는군. 제이의 시선이 끝난 곳에는 차가운 형광등의 불빛을 받으며 안경을 쓴 장신의 무표정한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촤악의 상황이다. 제이에겐 지금 무장이라고 할 만 한 것 이라고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무기에 의존해 싸우던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를 보조해 줄 일말의 장비마저 없다는 사실은 그를 내심 초조하게 만들었다.

“역시 차에 타고 있던 건 너였나?”

“저 뿐 만 이 아닙니다. 그보다 당신 후배로서 드리긴 뭐한 말씀입니다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이 살고 계셨더군요. 이런 삶에 진심으로 하십니까?”

“대만족하고 있어.”

“아직도 마음에 없는 말 할 때 손가락 마디 꺾는 버릇은 못 고쳤나보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선배님이 맡아줘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나는 은퇴 한 지 6년 가까이 됐는데, 이제 와서 재입대라도 하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이미 그에 합당한 절차와 증명가능 한 서류도 전부 준비해 놨습니다. 다시 한 번 민족과 국가, 나아가 인류 전체를 위해 봉사 할 기회가 선배님에게 주어 진거죠.”

“내가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연행하겠습니다.”

선글라스 너머로 일순 안광이 번뜩였다. 데이비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자 성격에 이런 일 로 거짓말 할 이유 따윈 없었다.

“쉽지는 않을 거다”

“잘 해줘봐야 B+급 요원 수준인 현재의 선배 상대로 제가 직접 나서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현장관리감시관인 김유정씨를 내세울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럼, 아직 차에 타고 있는 요원은 어떤가?”

“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으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만, 선배 상대로 저 아이가 만만할거라 생각지는 마십시오. 이건 제가 보증하죠.”

“내가 이기면 내가 어디서 뭘 하던 상관하지 마라. 이건 내 주변사람도 마찬가지다.”

“아까의 젊은 학생 말인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이번 내기.”

“내기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았군.”

“제 유일한 취미입니다.”

데이비드는 도박을 걸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고 있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네?! 감독관님! 이, 이건 상부 명령인데, 그런 위험한......!”

유정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데이비드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 이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한 번 내뱉은 말에는 절대 책임을 지는 남자니까. 하지만 지는 내기 또한 절대 하지 않는 남자라는 걸 그녀는 과거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감독관의 확고한 눈빛을 보며, 그녀는 불안감과 동시에 안도감 또한 마음 속 한 켠 에서 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저 제이라는 남자는 좋건 싫건 이 제안에 따를 수 밖 에 없다. 과거가 얼마나 대단했던, 일단 펼쳐 진 유니온의 추적망을 벗어 날 방법 따윈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놓치더라도 다른 팀이 주변에 대기 중이다. 유니온 서울총괄지부 직할 특수작전국 소속 요원들이 몇 팀으로 나뉘어져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고 있었다. 최소 S랭크 이상인 요원들이 솔직히 이런 퇴물을 상대로 임무를 실패한다는 상상은 유정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니온은 범국가적 무력연합이었고, 어찌되었든 저 제이라는 인적 상 유니온 측 예비요원으로 좋건 싫건 예편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인적기록은 해당 요원이 죽는 날 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기에 유니온에서의 제대는 사실상 두 가지 방법 뿐 외 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상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거나 혹은 죽거나.

그리고 유정의 생각은 불쾌할 정도로 정확했다. 제이로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 이 자들이 정말로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설령 여기서 도주에 성공한다 해도 그 곳이 어디든 지옥 끝 까지 쫒아올 것이다.  데이비드가 하는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그로서는 뭐가 됐던 싸워 볼 수 밖 에 없었다. 이 내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던, 그 이후 데이비드의 반응을 확인 해 봐야 그의 제대로 된 의중을 파악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동의 하시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만 차에서 나오도록, 이슬비 요원”

순간 제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데이비드의 말에 차에서 나온 것은 고작 중학생이나 되었을 법 한 작은 소녀였다. 어쩌면 초등학생일 지도 모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일던 분노감이 일순 형용할 수 없는 허탈감으로 바뀌어 그를 사로잡았다. 이런 얘들까지 죽고 죽이는 사지에 내몰기 위해 자신은 그 시간동안 이를 악물고 발버둥치며 싸워왔던 것인가? 

“저는 분명 방심따윈 하지 마시라고 경고 드렸습니다. 비록 아직 훈련생이지만, 이 아이는 요원 승급 예비심사 A클래스 단계에서 또래들 중 유일하게 합격 한 아이입니다. 현재 선배의 예상등급보다도 한 단계 위라는 말입니다.”

그의 심리를 읽기라도 한 듯, 데이비드가 경고하듯이 다그쳤다. 하지만 뭐가 됬던 일단 싸우는 것 외 에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어찌되었건 요원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 생각따윈 지금의 그에게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의 지옥은 사절이었다. 어쩌면 유니온에 처음 몸 담았던 그 시절에서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바랬을지도 모른다.

“이슬비 훈련생, 명령 하달 대기 중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선명한 분홍빛 머리의 소녀는 일말의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데이비드에게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보고했다. 소녀의 눈은 너무나 푸르고 투명해서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 존재하는 블루홀을 연상시켰다. 제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이슬비는 전용 무장으로 보이는 단검을 양 손에 역수로 한 채 상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관의 명령은 필요 없다. 날 따라와라, 이슬비 훈련생.”

놀랍게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데이비드가 아니라 제이였다.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싸움이 어떤 것 인지, 선배로서 미리 가르쳐주마.”
2024-10-24 22:21:2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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