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이슬비

에오니안 2015-06-11 11

또 보는구나. 어리석은 자들이여. 이제 두 번은 없다.”


불꽃이 일렁인다.

2m는 족히 넘는 키의 사내가 양팔을 뻗고 있다.

팔의 끝에는 그리운 인영이 둘. 대롱대롱 목을 잡혀 괴로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무언가 외치고 있다.

슬비야빨리 도망...!”

콰직!

 

엄마!!!”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아직 떨리는 양어깨를 양팔로 감싸 웅크린다. 또 악몽이다. 차원압의 영향일까? 차원종들의 제단에서 아스타로트와 재회한 뒤부터 벌써 몇 번째의 악몽인지 모르겠다. 정신 차리자.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때와 같은 일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단련하지 않았던가?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침대를 벗어난다.

시간을 보니 학교에서 돌아온 지 벌써 5시간이 지나있었다. 단축수업이라 일찍 끝났다고 해도, 벌써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정말 정신 차리자, 이슬비.”


플레인게이트에 오고 나서 쉴 새 없이 차원종을 처리하고, 왠지 모르게 악몽까지 계속 꿔서 잠이 부족한가 보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쪽잠을 잔다는 것이 벌써 몇 시간이나 자 버렸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겠다.


정장을 차려입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생활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방의 모습에 새삼 놀란다. 아버지께서 사오신 인형으로 가득 차있던 방은, 이제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귀여운 것은 아직도 좋아하지만, 클로져로서 훈련에 열중하다 보니 내 방은 어느새 숙박만을 위한 장소로 변해있었다. 유일하게 특별한 것은 한쪽에 쌓여있는 <사랑과 차원전쟁> 녹화분 뿐. 내가 언제 이렇게 삭막한 사람이 되었나 살짝 상심한다.


오늘은 유정 언니의 명령 아닌 명령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증거 혹은 증인도 준비해오라니, 어디까지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언니는 분명 갑자기 무리하는 나를 안타깝게 여겨 그랬을 것이다. 요즘 따라 점점 강해지는 검은양 멤버들을 따라가기 위해 너무 무리했나 보다. 원래 강했던 테인이는 그렇다 쳐도, 유리와 세하는 정말 딴사람이 된 것같이 활약하고 있다. 그 아이들도 분명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유정 언니는 아마 부모님을 뵙고 와서 마음이라도 풀고 오라는 뜻이지 않을까?


사실 부모님 묘에 성묘를 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사실 장례식 때 말고는 처음이다. 그동안 차원종과 싸우면서 학업도 놓지 않느라 찾아뵐 시간이 없었다. 아니, 분명 찾아가면 마음 약해질까 봐 의도적으로 피했으리라.

.

.

.


묘지는 기숙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금세 도착했다. 점점 명도가 옅어지는 하늘을 따라 슬슬 으슬으슬 떨려온다. 누군가 벌써 왔다 간 걸까? 꽃 몇 송이가 묘비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난 것일까? 울기만 하던 날도 잠시, 어느새 홀로서기도 익숙해졌다. 아마 지금의 나를 보면 부모님께서는 무척 놀라실 것 같다. 매일 칭얼거리며 아버지의 뒤만 쫓아다니던 작은 아이가 차가운 단도를 휘두르며 차원종을 무찌르는 것을 보면, 이래저래 깜짝 놀라실 것이 틀림없다. 특히 딸을 위해선 뭐든지 하시던 아버지는 당장 단도를 뺏어 유니온 지부에 달려가 따지리라. 마냥 자상하시던 어머니도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이니, 유니온은 엄청난 민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푸흡…. !”


나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를 두고 격렬히 싸우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항상 온화하던 두 분이셨지만, 나에 관해선 시시콜콜한 것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아서 싸움 같지 않은 싸움이 일상이었다. 내가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공주님 옷 같은 프릴이 잔뜩 달린 옷을 선택하자, 비서 느낌의 옷을 가져오신 아버지께서 일주일간 삐쳐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뵙는데 왠지 웃음이 먼저 나오네요푸흡.!”

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즐거웠던 일,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많은 일이 있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두 분 모두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그만큼 많은 추억이 있다. 따스했던 기억들이 가슴을 물들여간다.



오랜만이에요, 아빠, 엄마. 죄송해요.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일단 인사로 말을 시작한다.

전 요즘 정말 즐겁게 지내요.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학교생활도 즐거워요. 심지어 그렇게 경쟁률이 높다는 공무원이 되어 벌써 돈도 많이 벌어요!”

지금은 클로져가 되어 사람들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엄청 강한 동료들이 서로 지켜주고 있거든요. 다들 강하지만 성격도 좋아서 좋은 친구들이에요.”

그리고그리고 말이에요…”

왜일까? 점점 목이 멘다. 호흡이 가빠진다. 가슴에 스며들어온 부모님과의 추억이 한 장면씩 흘러가며 심장을 점점 조여온다.

그리고….”



왜 같이 도망치지 않았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토해낸다.

부모님을 다시 만나면 항상 묻고 싶었다. 딱히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책망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묻고 싶었다. 그 대답은 분명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겁에 질린 나를 걱정해주신 부모님이니, 아마 이유는 그뿐일 것이다.

 

언제나 곁에 있어준다고 했으면서! 줄곧 지켜준다 했으면서!!”

억지라는 것은 안다.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다. 영원은 없다. 단지 당시 차원종보다 우리가 약했을 뿐, 정말 잔인하지만 당연한 논리다.

 

정말정말 미워!!”

누구를 미워하는 걸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부모님? 두려워서 도망치기만 했던 당시의 나? 모르겠다.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다. 누구를 탓하고 싶지만, 대상을 찾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꼴사납다.

 

저 이제 강해졌어요. 이제 지켜주지 않아도 되니, 제가 지켜줄 수 있으니 그저 곁에만 있어주세요……”

이제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것은 싫다. 부모님께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신다는 것은 알지만 허망하게 되뇔 뿐이다.

하지만그래도……

 

엄마, 아빠!!!”

정적이 흐른다. 시끄럽게 느껴지던 풀벌레도 어느새 조용하다. 힘껏 외치고 나니 다리에 힘이 빠진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시야가 번진다. 이건 분명히 어느새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 때문이리라. 따뜻한 이슬비가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정장이 더럽혀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니 비석만을 바라본다.

 

아아, 결국 대답은 없구나.

결국, 나는 또 혼자서……





걱정 마. 나는 계속 함께 있어 줄게.”

따스한 감촉이 어깨를 감싼다. 순간 놀라 볼썽사납게 굳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필사적으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씌워주며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다. 이세하, 바보. 그렇게 있으면 네가 다 젖잖아. 애써 차려입은 정장이 엉망이라 핀잔을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뿐만이 아니라고? 유리도, 제이 아저씨도, 테인이도 분명 쭉 함께 있어 줄 테니까!”

, 부끄러워하는구나. 멍하니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얼굴을 홱 돌려버린다. 양 볼이 살짝 붉어진 세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내게 손을 뻗는다.


감기 걸리겠다. 가자?”

뻗어온 손을 조심스레 잡는다. 따뜻하다. 큰 손에 감싸인 느낌이 나쁘지 않다. 손을 맞잡고 어느새 믿음직해진 등을 뒤따라간다. 처음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구나. 마냥 어리고 한심하게만 보였던 세하가 마치 남자로 변한 느낌이다. 놓칠세라 손을 꼭 쥐고 걸어가는 세하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는 것은 기분 탓일까? 이대로 시간이 멈춰줬으면 하며 살짝 기도해본다. 이제 지켜지기만 하는 것은 싫다. 도망치지 않아. 하지만


세하야

?”

고마워.”

, ! 같은 팀으로서 당연한 일을! 빨리빨리 가자고 대장!”

후훗

하지만 지금은 잠시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내 소중한 사람.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 이번에는 내가 모두를 지켜줄 차례다.


다녀오겠습니다.”

살짝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인다. 부모님께서 미소 지으시며 배웅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시 한 번 볼을 훔치고 앞을 바라본다.


천천히 내리던 이슬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안녕하세요.

에오니안입니다.

첫 작품으로 슬비의 방과후를 짧게 그려봤습니다.

이슬비란 이름에서 느껴지는 연약함과 대조되는 설정이 감명깊어 바로 펜을 잡았네요.

 

나름 심혈을 기울여 쎴는데... 아직 어색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음 작품은 세하와 유리의 방과후를 쓰려하는데,

연구실 생활이 바빠 일단 반응을 보고 시작해 볼까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2024-10-24 22:28:3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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