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son - 1 -

외국인코스프레 2015-04-24 3

클로저 이세하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할 때를 빼고는 반드시 붙잡고 있던 게임기는, 웬일로 그의 손을 떠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일에 신경이 쓰여서 집중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른 일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떠오르는 감정을, 언제부턴가 자리 잡았던 불안감을 곱씹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심정을 느끼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었다.

 

처음 말했다시피 이세하는 클로저이다. 초급 클로저로 구성된 팀 ‘검은 양’에 소속된, 현재 수습 요원인 클로저. 그리고 클로저의 주된 업무는 차원종에 관한 여러 일들이며, 물론 이 중엔 ‘전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떠밀려졌다시피 하여 맡게 된 클로저 일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고 현실과 다른, 마치 가상현실 게임을 24시간 플레이하는 듯한 감각에 흥미를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함께 하게 된 팀의 일원들 또한 내색은 않았지만 다들 잘해주었고, 그에 안심할 수 있었다.

 

애쉬와 더스트라 자칭한 차원종들이 나타났을 때도 무난히 넘길 수 있었고, 자신이 다니던 학교인 신강고등학교에서 그의 반 아이가 차원종이 될 뻔했던 일도 무사히 마쳤다. 전투, 전쟁이니 하는 단어들이 와 닿지 않던 나날들.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차원전쟁은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ㅡ이 감정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커다랗게 다가왔다.

 

다시금 돌아왔던 강남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그에 자신을 비롯한 검은 양 팀은 강남에 진을 친 차원종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ㅡ많은 고비를 겪게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힘의 차원종들. 그들과 맞서면서,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는지 모른다. 크리자리드 바머, 소울 이터, 드라군 가디언…그들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모두가 상처입고 쓰러져갔다.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때,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일으켰던 순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들을 보조하러 왔던 특경대원들이 사살되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토막 나는 것은, 피보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분명 현실의 일이다. 그러나 세하 자신은 그 같은 생각들을 마음 한 구석에 갈무리해왔기에, 크게 생각지 못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누구의 곁에나 있다. 그 말을 다시금 되새겼을 때, 그는 그 생각만을 되뇌게 되었다.

 

평소 검은 양 팀 내에서 지각 1순위였던 그가 가장 먼저 대기실에 온 것은, 그저 불안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속한 팀의 복장을 갖추고, 자신의 무기인 건 블레이드를 들고, 자신이 싸워왔던 팀의 방에 앉아있으면 낫지 않을까, 다시금 팀을 만난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그 생각으로 왔을 뿐이었다.

 

불안감과 기대감에 몸을 맡긴 채, 양 손을 말아 쥐어 이마를 받친 채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할까? 그것은 자신이 그 죽음과 맞닿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검은 양 팀의 클로저인 이세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을 그만두면 되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절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클로저 일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건 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느껴진 오한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클로저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도 아니면서, 정작 스스로 이 일을 그만두기는 힘들어하는 것이다.

 

차분히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의 어머니, 서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파퀸, 차원종의 재앙 등 여러 별명을 갖고 있는 최강의 클로저. 그녀의 아들로써, 많은 기대를 받아왔던 자신은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서지수의 기대를 품고 클로저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처음 어머니가 그 일을 시켰을 때,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하는 그런 어머니께 함부로 반항심을 내보일 성격은 아니었고, 마지못해 그 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금씩 여러 가지들을 익혀가는 자신을 보며 주위의 사람들은 칭찬하였고, 기대하였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날들에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차원종들과 싸우는 자신이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끼고 있던 장갑이 머리카락을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다시금 아지랑이마냥 피어올랐다. 두려웠다. 이번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예기치 못하게 죽게 된다. 그것이 1년 뒤 일지, 한 달 뒤 일지, 아니면 오늘일지, 심지어 지금 당장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방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음에도 춥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기 시작한 다리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소년의 손은 자신의 양 팔을 감싸 쥐고 있었다. 이가 절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심장의 고동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하의 정신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마냥 휘청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

 

벌컥.

 

몸을 일으킨 순간,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때문인지 힘이 빠져, 가까스로 몸이 진정된 것 같았다. 아니, 진정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까.

 

“어, 동생. 먼저 와 있었구만?”

 

동료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기 때문일까.

 

자신과 같은 검은 양 팀의 일원인 제이와,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다른 일원들을 보게 되자 일순 안도감을 느끼게 된 세하였다. 아직까지 두렵다는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방금과 같이 몸이 떨리지는 않았다.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팀의 리더인 슬비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매일같이 듣던 임무들이었지만, 그날따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검은 양 팀의 현 리더인 슬비는 자신과 같은 나이임에도, 노력으로써 실적을 인정받은 클로저였다.

 

재능이 없다는 말이 많았음에도, 꿋꿋이 노력하여 인정받은 소녀. 그녀가 그렇게까지 노력한 동기가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동료들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또래임에도 가족을 위해 애쓰는 유리,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고, 몸도 좋지 않음에도 전선에서 활동하는 제이, 초등학생임에도, 차원종과 맞서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는 테인.

 

자신과 달리,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날 하루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검은 양 팀의 다섯은 다시금 자신들의 대기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테인과 제이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기로 했고, 세하를 비롯한 세 명은 대기실에 있었다. 세하와 유리는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와 대비되게 슬비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서 있었다. 평소에도 굳어져 있는 얼굴이 그날따라 더욱 퍽퍽해 보였다.

 

“세하야, 다리는 괜찮아?”

“…으응, 덕분에.”

 

자신을 걱정해 주는 유리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세하.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 지역을 다시금 방어해냈고, 다음 단계를 위해 일시 해산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굳게 맞잡은 양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세하가, 다시금 그 때를 회상했다.

 

임무 도중 우로보로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은 일시적으로 다리가 마비되었었다. 미처 회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확장된 동공으로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차원종의 모습뿐이었다. 몇 백, 몇 천 마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는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우로보로스의 공격이 일제히 자신에게 집중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반격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절망감이 훨씬 더 크게 와 닿았었다.

 

그런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눈엔 자신을 도와준 팀의 리더인 슬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은 채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심되고, 감탄했다. 그리고…절망했다.

 

이젠 동료의 발목까지 잡게 된 자신의 모습에.

 

 

약간의 응급처치만을 끝마친 채, 가만히 서서 세하를 바라보던 슬비.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세하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지 않은 모습은 좋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없느니만 못한, 위태위태해서 보기 싫어질 정도의 불안감이 물씬 풍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팀의 리더로써, 가능성이 있다면 뿌리 뽑을 필요가 있었다.

 

후회한다 한들, 이미 손을 떠나버린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자신의 부모님들처럼 말이다.

 

“…이세하.”

“응?”

“상처는 괜찮아?”

“괜찮다니깐…그보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인사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 게임에 빠진 세하에게 틱틱대는 슬비와, 그런 그녀를 대하는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묘한 분위기에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던 유리는, 가만히 둘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다시금 세하의 말이 이어졌다.

 

“…정말, 미안해….”

“…이세하, 오늘 너 좀 이상해. 무슨 일 있어?”

 

계속되는 의문에, 직접적으로 묻기 시작하는 슬비.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때가 아니면 절대 게임기를 손에 놓지 않고, 아무리 꾸짖고 비난해도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던,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던 고집불통 세하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했던가, 지금의 상황과 연관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어쩐지 불안해진 슬비가 그렇게 말하지만, 세하의 대답은 확고했다.

 

“…아무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슬비가 기세를 늦추었다. 지금은 말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라도 이유를 들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슬비가 말을 이었다.

 

“…없으면 됐어. 하지만…조금은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오늘 같은 일이 없게끔.”

“…….”

아주 약간, 옆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조차 알 수 없게끔 세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있겠지만…이 일은 어설픈 마음가짐으론 안 되는 거니까.”

“어설프…다고?”

세하의 곁에 있던 유리와 슬비가, 거의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변한 억양. 한 글자씩 씹어 삼키는 듯한, 듣는 사람으로서 그 심정을 파악하기 쉬운 목소리였다.

 

“…그래, 넌 좋겠네. 이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뭐?”

 

이번엔 슬비의 억양이 달라졌다. 단순히 의문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기에, 결코 평정심으로 세하를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전히 위태위태한 심정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았기에 그저 토해내듯 소리칠 뿐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렇잖아도 작은 대기실을 가득 메울 외침이 퍼져갔다. 지켜보고 있던 유리는 물론, 직접 앞에서 그 모습을 본 슬비 또한 놀라 인형마냥 굳어져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감에 이를 악문 세하가, 참회하듯 말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일에 뛰어든 심정을 알아?! 자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심정을 아냐고!! 난 너와는 다르다고,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 일을 시작한 너와는 근본부터 다르단 말이야!!”

뒤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째선지 뒤틀린 시야가 돌아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손바닥이었다. 자신과 같은 또래임에도 언제나 앞장서서 팀을 이끌었던, 결코 가녀린 소녀라 생각되지 않았던 작은 손.

 

몇 번, 아주 가끔씩 충고를 무시했던 자신에게 염동력으로 띄운 물체들을 날려댄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쪽 끈을 잡아당기면 곧바로 풀릴 매듭 같은 사소한 분노일 뿐이었고,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팀에 속한 동료로써의, 사소한 트러블일 뿐이었으니까.

 

이건 달랐다. 진심으로 화내었기에, 염동력을 사용할 생각도 않고 무작정 휘두른 손. 자신의 얼굴을 확고하게 쳐낸, 나이프 따위 들고 있지도 않은 가녀린 일격이었다.

 

“싸워야 하는 이유…라고…?”

 

뒤늦게 오는 통증에 자신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는 세하. 그럼에도 그 시선은 슬비를 향해 있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져 버린 것은 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폭탄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음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슬비의 말은 이어져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잖아…!”

 

세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슬비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던 세하의 눈에, 분명한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리더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말을 끝내자마자,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방을 뛰쳐나가는 슬비. 그 모습에 화들짝 정신이 든 유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세하를 돌아보고는 곧바로 따라 달려 나간다.

 

“스, 슬비야! 슬비야?!”

 

그렇게 슬비를 부르며 달려가는 유리. 방을 나선 순간 그녀의 시선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으나, 아랑곳 않고 지나쳐 갔다. 그에 어리둥절해진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방금 전까지 일행이 있던 대기실로 들어온다.

 

“뭐야, 무슨 일이야 동생?”

 

분명 자신이 들어온 곳은 검은 양 팀의 대기실이었고, 자신을 지나쳐 간 두 명은 같은 팀에 소속된 동료였다.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벌써 퇴근 시간이 됐나, 하는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슬쩍 보는 제이. 왠지 공기가 사나운 것이, 불안하게 느껴진 그가 가만히 앉아 있는 세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벌떡 일어서는 세하. 그에 흠칫한 제이의 귀에, 뒤도 안 돌아본 채 방을 나서는 세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아저씨.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이봐, 동생?!”

 

소리쳐본들, 그 외침은 세하의 귀엔 닿지 않았다.

 

 

 

잠시 후, 강남 일대에 위치한 유니온 거점.

그 근처에 위치한 사각의 거대한 컨테이너 앞에서, 한 여성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김유정, 초급 클로저 팀인 검은 양을 담당하는 여성이었다. 컨테이너와 이어진 노트북을 주시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입력하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린다. 그 시선엔 방금 전 대기실을 뛰쳐나갔던 세하의 모습이 있었다.

 

조금 전 검은 양 팀의 대기실에서 그녀의 모습이 없었던 이유는, 다른 작업을 위해 먼저 이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하가 그곳에 있던 이유는, 유정이 그날 그 시간에 있을 실험을 부탁한 일원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조율은 됐어. 이제 들어가면 될 거야.”

“…네.”

 

유정의 말에, 세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를 주시하던 유정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던 컨테이너를 바라본다.

 

큐브. 질량을 가진 입체 영상을 만들어 그 내부에서 전투를 치르게 하는, 유니온의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실험 단계였고,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초급 클로저인 세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알파퀸의 아들인 그의 잠재능력에 관심을 가진 상부의 지명도 있었고 말이다.

 

그에 불안해진 유정이었지만, 세하 본인이 승낙한 이상 자신이 무어라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당일 임무를 마친 후 그를 오게 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기에 거듭 확인한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겠어? 나중에 해도 되는데.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아뇨…괜찮아요. 이대로 할게요.”

 

유정의 말에 작게 고개를 내젓는 세하.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불안했지만,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같을 것 같았기에 말없이 코드를 입력한다.

 

큐브의 한 쪽 벽에 위치한 입구가 매끄럽게 열리고, 그 내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에 음산함을 느낀 세하였지만, 이미 그는 내부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

 

 

큐브의 안에 들어온 뒤부터, 세하는 마냥 걷고만 있었다. 겉으로 보인만큼 큐브의 안은 넓디넓었다. 그 발걸음이 목표한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큐브의 중앙으로 가는 것. 그렇게 되면 큐브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유정의 신호가 들릴 것이고, 그녀의 말마따나 구현된 입체영상들을 쓰러뜨리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그와는 달리 세하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들이차 있었다. 유정의 부탁대로 큐브에 들어섰지만, 사실 세하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이 아닌, 주로 마음의 문제로.

 

큐브가 비록 공식적인 차원종과의 전투는 아니지만, 질량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대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으며, 이는 분명 위험으로 치 닫을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럼에도,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욱신거리면서도 이 일을 그대로 진행한 세하였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한 것인가? 슬비가 그런 모습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얽히고 꼬인 느낌이었다. 마치 풀려고 애쓸수록 더욱 조여드는, 도저히 풀 수가 없는 꽈리가 된 것 같이. 그렇게 마음의 매듭을 풀려고 애쓰던 중, 그의 생각은 하나로 귀결되어 있었다.

 

날뛰고 싶다. 도무지 진정되지가 않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무엇이든…

 

평소의 또랑또랑한 눈은 진즉에 죽어 있었다. 마치 실에 묶인 인형마냥, 그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라기보다는 일종의 갈증이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방법이었지만, 그 한순간만큼은 정신을 갉아먹어오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어느새 그는 큐브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목만을 크게 젖히니, 탁 트인 큐브의 천정이 보였다. 저곳에 닿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상 닿을 수는 없을 테니. 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찰나, 기계적인 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됐니, 세하야? 이제 네 주변에 차원종의 입체영상이 나올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비록 영상이라도 질량을 갖고 있으니 위험해질 수 있어. 지금이라도 생각이…”

“…아뇨.”

 

짤막하지만, 확실한 한 마디가 세하의 대답이었다.

 

그에 납득한 유정이, 세하의 의견을 존중하고는 눈앞에 있던 버튼을 누른다. 괜찮은 걸까, 혹시나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미 그녀의 손가락은 떼어진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터엉-하고 잔잔한 소리가 큐브 내에 퍼져갔다.

 

“…시작인가.”

 

낮게 내뱉은 세하의 눈에, 어느새 지겹도록 봐왔던 차원종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다시금 예전과 같은 찝찝함이 느껴졌다. 그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세하였지만, 이내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자세를 가다듬는다. 분명 눈앞의 이것들은 입체영상일지는 몰라도, 질량을 갖고 있다. 즉,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하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자신이 이미 쓰러뜨렸던 것들이니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린 듯 먹먹해져 있었다. 다시금 맞았던 뺨이 따끔거렸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ㅡ한바탕 날뛸 수밖에 없잖은가.

 

“빨리빨리 끝내자고.”

 

 

 

큐브 내부는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잔잔했다. 그 중간에서, 마치 곤충의 껍질마냥 붉은 갑옷이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세하가 쓰러뜨린 스컬 퀸의 잔해였다. 여전히 죽은 듯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하였지만, 입은 그와 대비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처음에 나온 스캐빈져들을 보고 떠올렸던, 쉽겠다는 생각은 이미 접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여 이길 수 있었던 차원종들이 나왔을 때는 적잖게 놀랐지만, 다행히 이길 수 있었다. 자신이 그만큼 강해진 것인가, 아니면 입체영상이기에 본체와는 차이가 있어서? 얼떨떨한 상황에 스스로에게 질문한 세하였지만, 이내 헛웃음과 함께 그 생각을 지운다. 뭐가 되었든 알 바 아니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날뛰던 차원종의 입체영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다시금 적막함이 흘러갔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독에, 괜스레 소름이 돋은 세하가 고개를 든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엔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상했다. 이미 자신의 눈앞에 있던 차원종은 모두 쓰러뜨렸고, 더 이상의 상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다음 상대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무언가 착오가 생겼다면 큐브 바깥에 있던 유정이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쓸데없이 넓어빠진 공간이라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큐브 내부는 너무나 조용했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출구 같은 건 없었다. 마치 에러에 의해 던전을 나갈 수 없게 된 게임처럼.

 

의아해진 세하가, 일단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소리를 질러 연락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리고는, 투박한 구두를 가볍게 내딛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아니라 ‘무언가 엄청난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질리도록 느꼈던 위상력. 그것도 자신이 지금까지 느껴온 것들과 다른 강하고도 탁한, 마치 진하게 우려 나온 쇳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에 만났던 차원종의 군단장, 애쉬와 더스트가 떠올랐다. 그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 큐브가 차원종의 데이터를 토대로 입체영상을 만들어낸다면, 유니온에 알려진 그들이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뭐가 되었든 다른 길은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본다.

 

“…아?”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애쉬나 더스트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그들이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반가워, 아니…‘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나’.”

 

마치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상황이 어째서 지금 자신에게 나타났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 ‘자신’이…차원종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콰앙! 저도 모르게 노트북을 내려친 유정이, 다시금 시선을 올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는 여전히 거슬리는 노이즈를 내뱉고 있었고, 그 화면엔 'ERROR' 단 한 단어만이 심각성을 알리듯 깜빡이고 있었다. 큐브 내를 감시하기 위한 카메라와 스피커는 이미 먹통이 된 상태였다. 몇 분 째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유정이지만,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억지로 프로그램을 해제할까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노트북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니터에 표시되어 있던 그래프가 매우 높은 수치로 치솟아 있었다. 큐브 내의 클로저들의 위상력 변화를 기록하기 위한, 위상변곡률 그래프였다. 자신이 아는 세하는 이 정도의 위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차라리 세하의 안에 숨겨진 힘이 각성했다는, 나이에 맞지 않는 만화 같은 전개를 바라는 유정이었다.

 

중요한 점은, 큐브 내의 위상변곡률이 이 정도까지 불안정하다면 함부로 큐브를 해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렇기에 오류에 손을 쓰기조차 힘든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아무리 테스트라고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큐브가 고장이 나든,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든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부탁으로 실험에 참가했던 클로저, 세하의 안전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유정이, 심호흡을 하며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이미 본부에 상황은 알렸고, 처리반이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자신이 뭐라도 할 수 있길 빌며 머릿속에 다시금 코드들을 떠올린다.

 

“유정 씨?”

“어맛!”

 

극도로 긴장된 상황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유정.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많이 편찮다곤 하지만 그가 속한 검은양 팀은 물론, 유정 또한 많이 의지하는 남자.

 

“제이 씨? 여긴 어떻게…”

“세하 동생이 여기로 갔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 녀석은 어디 있지?”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제이. 그에 망설이는 유정이었지만, 자신이 상황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제이 씨, 실은…”

 

잠시 동안 유정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이는 유정의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유정은 모르고 있겠지만, 방금 전 세하는 동료들과 상당한 마찰을 겪었었다. 그런 불안정한 때 이런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은, 분명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오랜 세월 전쟁을 겪어왔던 제이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유정의 얘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제이. 이내 그가 몸을 돌리고는, 큐브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 기계를 부숴버리는 수밖에.”

“아, 안 돼요, 제이 씨!”

 

유정의 외침에, 왜? 하는 의문을 담아 그녀를 돌아보는 제이. 비록 그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심정을 눈치 챈 유정이 말을 잇는다.

 

“지금 큐브의 위상변곡률은, 웬만한 차원종 부대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어요. 어떤 이상이 있는지 모르는 지금, 강제로 큐브를 개방하려 한다면…큐브의 동력인 차원압력 발생장치로 인한 압력이 터져 나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강남 일대 전체가 사라질지도…”

“…그럼, 가만히 보고만 있자는 건가?”

 

평소와 달리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에 유정이 몸을 움츠린다. 그 모습을 본 제이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유정에게 화를 낸다 한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초조함에 감정을 절제하기 힘들었다.

 

유정이 말한 대로라면, 곧 처리반이 와서 어떻게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지키기로 마음먹은 소년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한다는 점이.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무력하다고, 다시금 스스로를 자책한다.

 

 

 

 

 

바깥에서 유정이 무슨 조치를 취하던, 큐브는 그에 상관없이 여전히 조용했다. 쓸데없이 커다랗다고 느껴지는 사각의 공간 안에, 단 두 명만이 서있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두 명이었지만, 그 적막은 오래 가지 않았다.

 

“넌 뭐야…?”

 

한동안 지속되던 놀라움이 가라앉자, 조심스럽게 묻는 세하. 눈앞의 세하…아니, 세하를 닮은 남자는 그 질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순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울컥 하고 내뱉었다.

 

“누구냐고 묻고 있잖아!!”

“참, 영문 모를 소리를 하네. 예전의 나는 거울도 안 봤던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 다시금 혼란이 가중되는 세하. 분명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던 것이, 애초에 예전에 가보았던 미궁에서 본 도플갱어처럼, 타인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는 차원종이 또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네가, 정말 나란 말이야?”

“그래. 정확히는, 미래의 너지.”

“…미래라고?”

 

세하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그의 모습이 곤란한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는 남자. 이내 그가 빙긋 웃고는, 들고 있던 건 블레이드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말을 이어간다.

 

“이세하, 신강고등학교 학생. 외동아들이며 같은 클로저인 서유리, 이슬비와 동급생이자 같은 팀 일원, 한석봉과는 게임 절친이며…”

 

남자가 자신에 대한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가만히 그것을 듣는 세하. 분명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맞지만, 그 정도 정보는 조사만 조금 해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다, 그리 신경 쓸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석봉이의 추천으로 미연시를 하기도 했고, 아X마X를 하기도 했으며, 석봉에게 다른 작품이 더 있냐며 정보를 얻기도 했고…”

 

…그리 신경 쓸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또…”

 

무언가 더 말하지만, 그리 신경 쓸 정보는…

 

“잠깐, 그건 아니잖아! 멋대로 설정 끼워 넣지 마!!”

“응? 아니라고?”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며 말을 끊자, 의아해하는 남자. 마치 정말로 확신하는 정보였다는 양, 세하가 부정한 것이 의외라는 눈이었다. 그 모습에 얼이 빠진 세하였지만, 이내 남자가 다시금 웃으며 말을 잇자 그에 집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눈앞에서 웃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뭐, 아니라면 별 수 없나. 이것 또한 일종의 ‘가능성’이고, 아니면 아직은 그 사실이 성립하기 전일 수도 있겠고.”

“…가능성?”

“그래. 너, ‘페러렐 월드(Parallel World)’라고 알고 있지?”

“…페러렐 월드?”

 

페러렐 월드.

‘평행 우주’란 뜻의, 현재 있는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무한히 많은 우주가 있다는 것에 기초한 이론. 즉 우주의 수에 따라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것이고, 그에 의해 지금의 현실과 동일한 우주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지금 큐브 안에 있는 세하뿐 아니라 어딘가의 다른 우주에선 동료들과 있는 세하가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차원종이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얘기이다.

이론 같은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세하였지만, 가끔 게임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소재였기에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게 어쨌단 거야?”

“말 그대로야. 지금 난 미래의 너지. 하지만 미래의 너는 내가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일 수도 있고,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 네가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수없이 많은 길이 생길 수 있단 거지. 난 네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야.”

“…좋아, 나라고 쳐.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남자의 설명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고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질문하는 세하.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건 블레이드를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위압감을 조성하려는 행동이었겠지만, 남자는 조금도 반응 않고 여전한 미소로 세하를 대할 뿐이었다. 가만히 세하와 눈을 마주치던 그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며 지나가는 듯이 말한다.

 

“여기, ‘큐브’지? 질량을 가진 입체영상을 만들어내는 방.”

“…그런데?”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차원종의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클로저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납득은 갔다. 큐브가 데이터를 통해 입체영상을 만들어낸다면, 자신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눈앞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으니까. 무슨 오류인 건지, 아니면 본래 예정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말 눈앞의 녀석이 미래의 자신이라면…

 

“…정말 네가 미래의 나라고?”

“그래.”

“…그럼, 그 위상력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응? 뭐가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

 

잠잠하던 바다에 파도가 몰아치듯, 갑작스레 세하의 억양의 튀어 올랐다. 어이가 없어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정말인지. 정말 미래의 자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지금까지의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사실이니까.

 

“네 그 위상력은, 차원종의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휘익- 경쾌한 소리가 퍼져나갔다. 세하의 외침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여전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욱 분통이 터졌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분명 녀석의 심정은…긍정이다.

 

“맞아, 난 차원종이지. 정확히 말하면, ‘네가 차원종이 된 미래’라고.”

“그런…!”

“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갑자기 녀석이 웃기 시작했다. 마치 세하가 들으라는 듯이, 소리 높여서. 자신은 전혀 웃기지 않은데 웃고 있는 남자를 보자니, 절로 화가 끓어오르는 세하였다. 저도 모르게 건 블레이드를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웃음이 멎은 남자가 한 손으로 세하를 가리킨다.

 

“생각해 봐, 어릴 때부터 얼마나 네가 들볶였는지. 알파퀸의 아들이 뭐라고, 멋대로 끌고 와서는 원하지도 않는데 실험을 하고, 시험을 치르게 하고, 결국 클로저로 만들었지. 그게 억울하진 않았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건…”

“게다가 웃긴 게, 자기들이 멋대로 기대해놓고 기대만큼의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멋대로 실망했지. 알파퀸의 아들이 고작 이 정도라니, 정말로 모**간이 맞는 건가, 따위의 악담을 늘어놓으면서 말이야. 그게 억울해서, 또 그들이 실망하는 것이 두려워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지. 그렇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웃기지 않아? 자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해서, 그 때문에 노력했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노력했다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수면 위로 던진 돌멩이로 인해 바닥의 진흙이 피어오르듯, 한 번쯤 했음직한 생각들이 강제적으로 세하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졌다. 마음을 읽히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에, 다시금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그럼에도 그를 제지할 생각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남자가 자신의 고민들을 파헤쳐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고민들을, 이렇게나마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너, 자신이 왜 싸우는지 모르지?”

 

세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미래의 자신이라서 그런가? 자신이 머릿속에 꼭꼭 쟁여둔 고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낸다. 꿀꺽-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킨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정론인 모양이지? 나 또한 그랬으니까 말이야.”

 

콰앙! 갑작스런 굉음이 퍼져 나갔다. 남자가 자신의 건 블레이드를 들어 바닥을 내려친 것이었다. 노린 것인지, 방금 전 세하가 쓰러뜨린 차원종이 있던 자리였다.

 

“싸울 이유도 없는데, 목숨을 걸고 차원종들이랑 싸워야 했지. 빌어먹을 어른들의 기대감을 짊어진 채 말이야. 그것이 너무나 싫고, 두려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 계속해서 내보내진다는 것이. 아마 너도 보았을 거야, 자신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처음으로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늘게 떠진 눈은, 세하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남자가 무언가를 부정하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뭐, 이 얘긴 됐고. 계속해서 전장에 뛰어들고, 죽음과 마주하며…그렇게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끊임없이 생각했어. 왜 싸우는 걸까? 원하지도 않는데, 왜 어른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려고 싸우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다, 마침내 결론을 내었지.”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세하에게로 겨누어졌다. 그에 반응하여 재빨리 방어태세를 취한 세하지만, 남자와 달리 검이 떨리고 있었다. 비단 검뿐 아니라,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한 무표정으로 남자는 말한다.

 

“힘이 모자라서라고, 말이야. 힘이 없기에 어른들에게 휘둘리고, 그들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죽을 고비를 겪는 거였지.”

 

남자가 건 블레이드를 다시금 내려뜨렸다. 다시금 그 입엔 미소가 걸렸지만, 그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게 결론을 내니, 그 다음은 쉬웠어. 차원종들에게 몸과 마음을 맡겼고, 이렇게 차원종이 되었지.”

“그렇게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의미? 의미라면 넘치는걸. 이제 난 어른들에게 휘둘리지 않아. 그들 따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힘을 갖게 되었고, 섣부른 기대감이나 심어대고 멋대로 실망하는 녀석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게 되었지.”

 

꾸욱, 하고 세하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공기의 변화에 가슴이 답답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남자의 위상력 때문이었다. 너무나 크고 너무나 기분 나쁜 힘이, 자신의 내장을 서서히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보란 듯이 자신의 힘을 개방한 남자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너도 이 힘을 받아들여.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여서, 나처럼 되란 말이야. 사실 그런 생각도 해봤잖아? 자신을 전장으로 내모는 어른들이 싫잖아? 그들을 쓸어버리고 싶진 않았어?”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괜히 기대해놓고 잘 하면 알파퀸의 아들이기에 당연하다, 못 하면 알파퀸의 아들답지 않다…중간 따위 없는 그런 편견들이 싫잖아? 아니면 너, 그런 평가에 만족하는 거야? 아무리 잘 해도 알파퀸의 아들이기에 당연하다는, 그런 칭찬 아닌 칭찬이 좋은 건 아니잖아? 그 녀석들이 깜짝 놀랄 만한 힘을 보여줘서, 진심으로 찬사를 늘어놓게 해야 할 거 아냐? 알파퀸의 아들답게, 그녀를 뛰어넘는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남자의 억양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말이 당연하다는 듯, 확신을 가득 담은 말들은 세하의 귀에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그 말들을 가만히 듣는 세하였지만, 그의 전신의 근육은 팽팽히 수축하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대한 부정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반사적으로 일어난 반응인지는 몰라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고무줄마냥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태로움은, 남자의 한 마디로 급변했다.

 

“ㅡ그렇지 않아, ‘천재’?”

“닥1쳐어어어!!”

 

투둑,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이미 세하의 발은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고, 그의 건 블레이드는 뒤로 크게 젖혀져 금방이라도 내려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미래의 자신이든, 차원종이든…이 건 블레이드를 때려 박아 쓰러뜨릴 뿐이었다.

 

그런 세하의 모습을 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한 눈으로 빙글 웃으며, 자신의 건 블레이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

 

 

큐브 내에 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득달같이 뛰어갔다. 크게 젖혀진 건 블레이드는, 세하의 의지대로 거세게 휘둘러졌다. 아마 지금까지 중 가장 힘이 실린 일격일 것이다. 차원종들을 대할 때도, 이 정도로 성급하게 휘두르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세하의 그 전력을, 남자는 가볍게 막아내었다.

 

“큭!”

 

남자의 움직임에 맞추어 건 블레이드가 튕겨졌다. 그에 신음을 흘린 세하가, 급급히 검을 고쳐 잡았다. 단순한 힘으론 위인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세하의 건 블레이드에 위상력이 휘감아졌다. 발포, 세하의 위상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건 블레이드에, 열을 응집시켜 한 번에 내뿜는 일격이었다.

 

많은 차원종의 갑옷을 산산조각 낸 일격이, 그대로 남자의 어깨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이내 세하가 기세 좋게 건 블레이드를 휘두름과 동시에, 그 시선이 크게 반전되었다. 꺾여 진 팔을 축으로 크게 기울어진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남자 또한 발포로, 세하의 그것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위상력의 크기는 그 잠재력과 용량을 나타내는 것이지 단순히 힘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 남자의 위상력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하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한 세하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달려 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방향이었다.

 

‘일단, 거리를 두고…’

 

그 이상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세하의 온 신경은 이미 남자를 향해 있었으니까. 분명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비웃듯이 세하를 따라잡은 것이었다.

 

“거리를 두면 뾰족한 수가 생길까봐?”

 

빠악!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휘둘러졌고, 제대로 막지 못한 세하가 빗맞은 채 바닥을 구른다. 평소 낙법을 소홀히 여긴 것을 후회하며 몸을 일으키자, 그런 세하의 시선에 푸른 덩어리가 두어 개 들어왔다. 공파탄.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던 세하가, 이를 악물며 발을 내딛는다.

 

구체화한 푸른 불꽃이 세하의 얼굴 왼쪽과 왼쪽 다리를 스쳐간다. 열기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남자가 더 신경이 쓰였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는, 어느새 상당한 위상력을 집중시킨 듯 청색의 열기가 비단마냥 휘감고 있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한 세하가 다시금 시간을 벌기 위해 도약한다. 그 순간, 그의 오른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어느새?!’

 

큐브의 벽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구석에 몰렸었단 사실에 경악하는 세하. 남자의 공파탄은 그를 몰아넣기 위한 일종의 미끼였다. 겨우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이미 늦었었다. 가볍게 도약한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의 푸른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런 것도 했었지?”

 

남자의 자세와, 건 블레이드에 압축된 위상력으로 기술을 알아챈다. 그에 이를 악물며 후방으로 튀어 오르는 세하였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공격이 더 빨랐다.

 

“별빛에…잠겨라!”

 

마치 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푸른 불꽃에 휩싸인 건 블레이드가 내려쳐졌다. 세하의 몸을 산산조각내고도 남을 기세였다. 세하 자신이 사용할 때는 전혀 몰랐던 위력의 검격이, 큐브의 바닥을 조각내며 그를 저 멀리 튕겨냈다.

 

“크, 윽…!”

 

신음과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이미 그 몸은 만신창이였고, 특히 왼팔은 강한 충격 때문인지 마비가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온 몸에 느껴지는 격통에, 숨을 고르며 겨우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얄궂게도, 사실 이것도 ‘그나마’ 남자의 유성검에 온전히 대응한 결과였다. 애초에 어정쩡한 자세로, 세하 본인의 그것보다도 강한 유성검을 온전히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몸을 뒤로 날려 피한다 한들, 그보다 유성검의 가속이 훨씬 더 빨랐다. 그렇기에 몸을 뒤로 날리면서도, 시선은 앞을 향하며 공격을 막아내 위력을 최대한 줄인 것이다. 그마저도 왼팔이 부러질 뻔했지만 말이다.

 

건 블레이드는 본래의 검의 용도마냥 적을 베는 것이 아니라, 세하의 열을 조절하는 능력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열전도율을 높인 몽둥이에 가까운 무기였다. 만약 세하가, 그리고 남자의 무기가 유리의 장검마냥 날카로움을 갖고 있었다면 분명 세하의 팔은 깔끔하게 잘려나가거나 운이 좋아도 뼈와 힘줄을 도려냈을 것이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세하였다.

 

아니, 떼지 않는 게 아니라 뗄 수가 없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눈을 뗀다면,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를 것 같았으니까.

 

어느새 그 눈은 다시금 떨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잊고 있었다, 이것은 싸움이다. 지면 꼼짝없이 죽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보다 더 강하다. 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지? 지금 이곳은 외부와 차단된 큐브 내부였다. 자신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던 말든, 도와줄 사람도 없는 것이다.

 

도와줄 사람도…

 

머릿속에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 세하가, 그제야 남자의 웃음소리를 의식했다. 방금까지 세하를 밀어붙이던 남자는 갑자기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마치 눈앞의 쥐를 잡지 않고 겁만 주는 고양이처럼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엄살이 심한데? 아직 오른팔은 쓸 수 있잖아?”

 

분하지만 녀석의 언행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허세가 아닌,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강함을 녀석은 갖고 있었으니까. 화상을 입은 건지, 왼팔이 불판 위에 올려 진 고기마냥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하는 열을 다루는 클로저였다. 그런 그가 이 정도의 화상을 입었다는 것은, 남자의 힘이 훨씬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남자 또한 세하 자신이라면, 그 능력 또한 같을 테니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랬던 것처럼, 자신이 쓰러뜨린 차원종들 또한 이런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 또한 저 남자에 의해 불에 타버릴지도 모른다. 까맣게 탄 고기마냥 타버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입 안이 말라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의 공포 속에서, 남자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래, 조금은 생각해 봤어?”

 

녀석은 여전히 이죽이며, 건 블레이드를 보란 듯이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모습, 같은 무기인데도 이질감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 거절한다면, 다음에 저 녀석이 생각이 바뀐다 한들 그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 정도 선에서 끝날 수 있었다.

다시금 녀석이 재촉한다. 과연 자신답게 인내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열심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대답을 내놓으면 그만이었다.

 

“…싫어.”

 

어째서 이 대답이 나왔는지 자신도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해 되새길 새도 없이,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녀석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에 이를 악물고는, 세하 또한 남자에게로 뛰어들었다. 방금 전의 싸움으로, 피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일단은 조금이라도 부딪쳐볼 뿐이었다.

 

몇 차례, 두 명의 건 블레이드가 부딪쳤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는데 반해, 세하의 표정은 굳어진 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단순히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안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며 질주해서는, 건 블레이드를 크게 휘둘러 남자를 튕겨낸다. 그에 물러선 남자가 다시금 한 발을 내딛을 때, 이미 세하의 몸은 공중에 떠 있었다.

 

“별빛에…!”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세하의 위상력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건 블레이드를 축으로 응집된 위상력이, 푸른 불꽃을 형성하여 휘감고 있었다.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다. 남자와의 거리는 약 6미터, 충분한 거리였다. 남자의 입이 빙글거리며 웃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달았다.

 

“잠겨라!”

 

공간조차 도려낼 듯한 기세로, 세하의 몸이 낙하했다. 이내 남자의 몸에 검이 닿는 순간,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단 한순간, 남자의 손이 시야에 걸릴 때까지 만은 말이다.

 

퍼어억!! 세하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강하게 목을 잡아 채여, 그대로 남자의 손이 이끄는 대로 밀려난다. 마치 TV에서나 보던 초크슬램을 당한 것 같았다. 목을 강하게 압박하여 질식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아 시선을 교정했다. 어느새 남자는, 자신을 들어 올린 채로 웃고 있었다. 조금도 좋게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미소였다.

 

“자기 기술의 장단점도 몰라? 유성검은 분명 강하지만, 한 번 사용하면 방향 전환이 불가능한 점과, 기술이 발동되기 전까지 공중에 머무르는 체공 시간이 있다는 단점이 있지.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왼손은, 세하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른손은?

 

“제로…아니, ‘영(0)거리 포격’이 나으려나?”

 

남자의 건 블레이드는, 세하를 겨눈 채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자의 손은 억세게 그를 놔주지 않고 있었다. 분명, 죽는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는, 마치 포탄처럼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릴 것이다.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순간 세하의 머릿속은, 단 세 글자만이 잠식하고 있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세하의 비명을 잠재우듯 건 블레이드의 포격이 공기를 찢었다. 이내, 사방으로 선혈이 튀었다. 연극이나, 홀로그램 따위가 아니다. 아직까지도 온기를 머금은, 세하 본인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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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못 올려 수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2024-10-24 22:26:0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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