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페이퍼를 쓰자! 4

삼촌 2015-04-21 4



롤링 페이퍼를 쓰자! 3

--------------------------------------


거기까지 말하고, 석봉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는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있을 뿐이지만, 동아리의 사람들은 마치 1~2주의 텀을 두고 연재된 소설처럼 긴 시간이 흐르는것만 같았다.


'그럴만도 하지.'


아직 10대인 소년에게는 사랑과 우정, 둘 중 하나를 저버려야 한다는 것이 가슴 저리도록 괴로운 일일테지.


제이는 그 기분을 정말이지 아주 완벽하게 체득하고 있었다.


'힘내라고 소년. 어느 쪽이든, 이 형아는 너의 편이 되어줄테니 말이야.'


제이는 흘긋 소년의 괴로움의 원인들을 바라보았다.


슬비와 세하는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와 원고의 심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


그 중압감을 견딜 수 있는건 역시 슬비였는지, 세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향해 소리쳤다.


"야, 한석봉! 잠깐 내 말을 들어봐."


"석봉이에게 협박같은걸 할 셈이야, 이세하?"


슬비가 싸늘한 표정으로 세하를 매도한다. 하지만 세하는 이번만큼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슬비의 냉기를 맞받아쳐낸다.


"그게 아니야. 난 석봉이가 어느 쪽의 편을 들든 받아들일 생각이야. 하지만 석봉이가 말을 하기 전에, 분명히 하고 싶은게 하나 있어서 그래. 아니다 싶으면 내 말을 끊어도 좋아. 이슬비. 그러니까 발언권을 주지 않겠어?"


세하답지않게, 드문 진중한 표정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좋…좋아. 단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이 나오면 바로 말을 끊어버릴테니까."


"알았어."


세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엄숙 그 자체인 말투로 석봉이게 말을 건네었다.


"한석봉. 너랑 나랑 처음 만났던 일 기억하냐? 흔치않게 교실에서 PㅇP를 하고 있던 너가 신기해서 말을 걸었는데, 너는 내가 위상력을 가진 애라고 차별하지도 않고 같이 멀티로 대전까지 해줬었지. 그 때 난 위상력에 각성하고 난 뒤 처음으로 친구랑 놀아봤다." 


갑작스럽게 어두운 내용이 튀어나와 모두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허둥지둥 몸을 뒤튼다. 그 상황을 무시한채 세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도 넌 나랑 계속 어울려줬었지. 넌 반에 게임하는 애가 없었는데 잘 되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은 같이 게임하고 있었던 애들이 있었다는거 나도 알아. 걔들이 나랑 놀지 말라고 했었는데도 나랑 놀아줘서 너도 걔들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도…알아."


[…….]


석봉이는 계속 침묵한다.


"그래서 난 너를 제일가는 친구로 여기고 있다. 너한텐 항상 고마웠어. 그러니까 네가 지금 슬비의 편을 들어준데도, 난 오히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넌 그래도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김유정과 유리는 이미 소년들의 아름다운 우정에 깊은 감동을 받은듯,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슬비조차도 자신이 마치 악역이 된듯한 죄책감이 등 뒤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억지로 떨쳐내고 있었다.


"기억나냐? 네가 처음 멀티플레이를 하곤 네가 말해준 그 말…. 그 때 그 말. 나는 단 하루도 잊은적이 없어."


[세, 세하야….]


석봉이도 감정에 복받치는듯 목소리가 조금 잠겨있었다.


그런 석봉이에게 확인사살을 하듯, 혼이 담긴 목소리로 세하가 외친다.


"나는 게임하고 싶어, 너와 함께!"


[…….]


석봉이는 회상해본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굉장했던 석양을 배경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누군가와 경쟁을 해보았던 기억을.


아마도,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하는 검투사들의 대전액션 게임이었을 것이다.


비록 게임 속의 혈투였지만 그 때의 몰입감과 진지함은, 지금도 떠올리면 몸에 소름이 돋는 수준이었다.


소년 한석봉.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해도, 그 때의 순수했던 경쟁을 더럽힐 순 없었다.


결국 한석봉은,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알았어. 말할게. 슬비야, 나는 그 때….]


"잠깐, 석봉아. 그 전에 나도 짧게 말해도 될까?"


슬비도 이젠 한껏 진지해진 태도로 석봉이의 말을 자른다. 물론 그렇다고 슬비가 이때까지 진지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으,응? 뭐,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남자애들이 컴퓨터로 게임하는걸 바보같다고 생각했는데. 너희 둘의 우정을 보곤 내 생각이 틀렸다는걸 깨달았어."


슬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게 조금 힘들었는지, 거기서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람의 취미엔 귀천이 없다는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어서 고마워. 리더로서 나도 팀원들의 취미를 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실제로 이세하의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게임대회를 시청했던 적도 있었고. …그,그러니까."


[그,그러니까?]


뭔가 클라이막스가 온다. 그것을 직감한 한석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슬비는 자신이 할 말이 부끄러운듯 잠시 바닥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결심을 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곤 크게 선언했다.


"나, 나도…, 나도! 께임할꺼야! 석봉이 너와 함께!"


"크헉! 컥! 쿨럭 쿨럭!"


지금까지의, 아니 틀림없이 앞으로도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지독할 사레에 들린 제이는 바닥에 쓰러져 격한 기침에 시달렸다.


왜 우리의 대장은 하필 저 부분의 발음을 쎄게해버렸단 말인가! 천만다행히도 나만이 알아차린것 같지만!


[크헥! 쿨럭! 허억…헉, 스스스스스슬,슬비야? 뭐, 뭐뭐뭐, 방금 뭐라고…?]


아니, 여기 한 소년이 더 있었구나!


물론 석봉이는 슬비가 그런 의도로 말한게 아니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슬비가 뜻하는 원래의 의도조차도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목소리가 떨리는 상태로 회귀해버렸다.


"그, 게임대회를 시청해보니까. 왠지 모르게…그, 그러니까 호기심에! 한번쯤은 해보아도 손해볼 일은 없겠다 싶어서! 따, 딱히 이세하가 왜 게임을 하는지 궁금한 것은 아니고, 그게, 사랑과 차원전쟁 21화에서도 게임하는 남자가 주인공이었으니까, 응!"


슬비는 처음으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이것저것 되는데로 변명하고 있었다. 분명 한창 사춘기 소녀가 보일법한 사랑스러운 반응이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을 캐치해낼 수 있을만한 사람은 동아리 방 내에는 없었다.


"뭐야, 이슬비 너도 드디어 게임에 관심이 생긴거야?"


자신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던 리더가 자신의 종교(?)에 관심을 보이자 반색하는 소년과


"어어? 슬비 너도 게임하는 거야? 하지만 나랑 같이 집에서 드라마 보자고 했으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것 같다는 예감에 섭섭해 하는 소녀와


"우웅? 게임이면, 그 컴퓨타로 하는 것들 말인가요? 저는 그거 잘 못하겠던데…."


컴퓨터가 영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에 또 그룹에서 소외될 미래에 시무룩한 소년과


"슬비야…. 그래, 이젠 너도 드라마 말고 다른 취미를 찾아보는거구나. 응. 좋은 현상이야. 솔직히 이 언니는 너가 TV중독증이 아닌지 걱정했었단다."


사실은 속으로 꽤 걱정을 했던 한 노처녀와


"쿠,쿨럭! 커흑…허억…허억…도,돌아와라…나의, 파…워…."


남들도 모르게 생사의 고비를 헤메고 있던 한 청년만이 있었을 뿐.


[스,슬비야….]


그리고, 오직 목소리만 들을 수 있기에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를 놓치고 있는 안타까운 소년은, 그러나 이미 슬비의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뒤흔들리는듯한 충격을 받은 듯, 목이 잠겨 간신히 슬비의 이름만을 휴대폰에 속삭일 수 있었다.


"돼, 됐어.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는거 같으니까. 빨리 대답해줘 석봉아. 그 때 너는 세하와 같이 게임했던거지?"


[으, 응! 세하랑 둘이서 게임했어!]


"한석보오오오오오옹!!!!"


칼같은 대답에 칼같은 절규가 울려퍼진다.


"에이 뭐야, 세하야, 그렇게 감동적으로 말해놓곤 그러기야?"


유리가 실망한듯이 세하에게 툭 쏘아붙인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감추고 싶었던 과거도 공개되고, 스스로도 심히 후회하는 시기의 중2병적 행태마저 고발당하고, 베스트 프렌드라 믿었던 친우에게마저 배신당한 소년은 더 이상 삶에 의미가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받은 상태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애쉬이이이! 더스트! 나와라! 기꺼이 용의 군단의 새 군단장이 되어주마!"


"무, 무슨 소리야 이세하! 그 발언은 장난으로라도 용납할 수 없어!"


슬비가 급히 세하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세하는, 이미 창문을 벌컥 열어젖혀 다시한번 유성검으로 뛰쳐나갈 태세였다.


그 모양새에 슬비가 앞뒤 가리지않고 급히 중력장으로 세하를 깔아눕히려는 찰나,


미스틸의 창이 섬광과도 같이 세하에게 쏘아졌다가, 그 기세 그대로 미스틸의 손으로 돌아왔다.


신기와도 같은 컨트롤로 세하의 겉옷이 창에 꿰여버려, 세하도 창과 같이 미스틸의 쪽으로 돌아와버린것이다.


물론 그 빛과같은 순간속도로 인해, 일반인이었으면 죽어버렸을 막대한 중력을 받아버린 세하는 기절해버린 상태였지만.


"우웅, 안돼요, 세하형. 형이 차원종이 되어버리면 제가 사냥해야 되잖아요. 전 형을 사냥하는건 정말 싫어요."


미스틸은 평소와 다름없이 삐진 표정으로 담담하게 세하에게 설명한다. 물론 기절해버린 세하는 들을 수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스,슬비야? 무,무슨 일이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낀 석봉이가 주저하는 어투로 질문한다.


"아, 아니야. 석봉아. 대답 고마워. 나중에 연락할게. 그럼 안녕."


일단 석봉이에겐 나중에 설명하기로 정한 슬비는, 적당히 얼버무린후 석봉이와의 통화를 끝냈다.


"응…, 잘했어, 테인아."


일단 사태를 수습한 미스틸에겐 칭찬을 해야겠지. 슬비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핫, 진짜요?"


미스틸은 티 없이 맑은 미소로 화답한다.


"으…응. 그렇지. 세하가 차원종이 되어버리면 그, 세하네 아주머니가 무진장 화내실테니까. 응. 잘했어, 테인아!"


유리도 적당히 대답한 뒤 미스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웅"


유리의 손길에 기분 좋은 듯 웃는 미스틸을 보며, 김유정은 조만간 날 잡고 미스틸의 사회교육을 빡세게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음…. 세하야? 이젠 네 차례거든?"


"……."


마음의 기저부터 불신에 가득찬 그 눈빛을 보며 김유정은 괜시리 자신이 나쁜여자가 된것같은 기분에 속이 쓰렸다.


세하가 정신을 차릴동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슬비의 롤링페이퍼를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슬비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불만이 없어서 쓰질 않았어요.'라는 말에 세하를 깨워 롤링페이퍼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제이가 '롤링페이퍼는 소원수리가 아닌데 말이지'라고 작게 항변했었으나 '제이씨와는 내일 리더 권한으로 개인 면담이 있을테니 기대해주세요'라는 슬비의 말에 침묵. 슬비의 차례는 그렇게 끝을 알렸다.


유리나 미스틸의 차례로 하면 되었지만, 유리는 '부끄러우니까 자신은 마지막에 하고 싶다'라고 강력히 주장했고,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미스틸은 '우웅, 왠지 제 롤링페이퍼는 어떻게 말을 해도 소설의 분량 상 다 통편집 될것같아요'라는 의미불명의 말을 했기에 그냥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이의 특제 건강차를 입에 투하당한 세하가 금방 제정신을 차린것까지는 좋은데, 도통 자신의 롤링페이퍼를 줄 생각을 않는다.


김유정도 그런 세하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지체했다간 완전히 식어버려 맛없어질 음식보단 순위가 아래였기에 부드럽게 세하를 재촉했다.


자신인 이미 사회의 모진 풍파를 거친 인생의 선배, 여기선 마냥 닥달하기보다는 자신이 자상한 연상의 여성인 점을 살려 부드럽게 나가는게 상책인것쯤은 잘 알고 있지.


"세하야. 만약 알리고 싶지 않은게 있다면 이 누나에게 먼저 말을하렴. 그러면 그 부분은 읽지 않고 넘어갈테니까. 정말이야. 약속…꺄악!"


세하의 손에 쥐여져있던 롤링페이퍼가 커다란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검은색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김유정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한걸음 물러났다.


"세,세하야! 이게 무슨 짓이니!"


"호들갑 떨지마세요, 누나. 피해 안가도록 조절했으니까요."


"호,호들갑?!"


배려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말에 순간 욱한 김유정이었지만 그보다 한박자 빠르게 세하가 말을 쏟아냈다.


"이런 언문 따위 언어도단. 확실히 인생은 실전이야! 이슬비…! 아까 게임대회를 보고 게임에 대해 흥미가 동했다고 했겠다?!"


"그런데?"


좀 전과는 다른, 박력 넘치는 기세에 슬비가 흠칫 놀라며 반문한다.


"그렇단 말이지?! 마침 룰 챔피언쉽 리그의 준결승전이 다음 주 주말에 용산에서 열리는데 좋은 기회야! 석봉이랑 같이 가려고 표를 2장 구해놨었는데, 나랑 같이 가줘야겠다!"


"뭐? 다음 주?"


슬비의 표정이 크게 흔들린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세하는 계속해서 슬비를 몰아붙여간다.


"그래, 네가 저번주부터 본방사수해야된다고 그렇게 말했던 사랑과 차원전쟁 TV스페셜 특집편이 방영되는 날이지! 안타깝게도 그날 대회를 끝까지 관람한다면 틀림없이 TV스페셜도 이미 방송이 끝났을 터!"


"크윽…!"


슬비는 더욱 코너에 몰려간다. 만약에, 평소와 다름없는 일반적인 방영이었다면 녹화해두고 나중에 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번에 하는 TV스페셜은 특집편은 사랑과 차원전쟁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역대 최고의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언플까지 하고 있는 상황.


거기에다 실시간 참여 이벤트까지 진행하는데, 이벤트의 상품 중에는 지금은 절판된 시즌 1의 블루레이판도 속해 있어서, 자칭 차원전쟁빠, 아니 매니아라면 반드시 참여할수밖에 없는 천재일우의 이벤트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슬비로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내…내가 게임에 관심있다고 말은 했지만 게임 대회를 직접 관람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 이세하! 내가 너랑 같이 게임 대회를 갈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아!"


"하, 과연 그럴까? 너는 예전부터 계속 팀의 리더로써 팀원들과의 교류는 중요하다고 계속 역설했었지! 그 일환으로 유리뿐만 아니라 나와 아저씨, 테인이에게까지 사랑과 차원전쟁의 시청을 강요했었고!"


"이의있어! 강요가 아니라 권유였을 뿐이야!"


"리더의 권위를 내세워 작전이 끝나고 휴식시간에도 드라마를 틀던 행위를 과연 권유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 '권유'였다면 뉴스를 보던 아저씨의 TV까지 굳이 차원전쟁으로 채널을 변경하진 않았을텐데 말이야!"


"큿…!"


일련의 사건으로 새로운 힘에 각성이라도 한건지, 평소와는 다르게 세하는 시종일관 슬비를 압도하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 놀라운 기백에 압도되어 나머지는 입을 다문채 슬비와 세하의 공방을 바라볼 뿐이다.


"제저씨, 아까 먹다 남은 참치맛 팝콘이 저기 서랍에 있을텐데 옥돌로 꺼내오면 안돼요?"


아니, 이 끝모를 백치미의 소녀는 제외하고.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는 무릇 자신도 타인이 행해오는 영향력을 받아드려야 하는 법. 게다가 이슬비 너는 평소에도 리더인 자신을 보다 더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었지! 그런데도 팀원인 나의 요청을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일방적으로 묵살할 것인가? 게다가 방금전으로 게임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으면서, 게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게임대회 직관을 거부한다는건 이율배반적인 행위! 도저히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라고 생각할 수 없군!"


아까에 이어 다시 검은양재판 시즌2를 찍는 세하와 슬비를 바라보며 제이는 조금씩 분석을 해본다. 평소의 침착한 슬비라면 세하의 논리가 지닌 헛점을 파고들어, 능숙하게 논파해낼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하는 다시금 제3위상력이 부활이라도 했는지 평소와 달리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거기에다 평소보다 월등한 언변. 그리고 집속검 버프라도 걸었는지 확연히 빨라진 말본새가 어우러져 슬비를 당황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방금 전의 사태로 슬비가 스스로 게임에 흥미있다고 밝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또한 슬비가 세하의 궤변에 반박하지 못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 위압감…. 역시 누님의 피는 못 속인다니까.'


남들이 보면 누님과 대화하는 자신도 저 세하 앞의 슬비처럼 꼼짝못하고 당하는걸로 보였겠지.


제이는 문득 떠오르는 옛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실시간 응모 이벤트? 하지만 네가 응모한다고 해도 당첨된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확률은 변동하지 않아! 이 세계의 세계선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번 편 또한 녹화를 하면 되는 것이고, 이벤트 응모는 타인에게 부탁하면 그것으로 완벽! 그것으로도 기관의 **는 저지할 수 있다!"


"저기, 기관이 뭐에요, 제저씨?"


"나한테 묻지마, 나도 몰라."


뭐, 애쉬와 더스트를 잘못 말했겠지. 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크읏… 하,하지만 지금까지 빠짐없이 드라마를 지켜본 팬의 입장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드라마의 제작은 우리 검은양팀이 신서울을 지켜주기에 안전하게 이루어 질 수 있는것. 그리고 검은양팀의 실적은 팀의 화합이 이러우질수록 올라갈것이 자명한 이치. 그리고 나는 이슬비 너에게 팀의 화합을 위해 직관의 동행을 요청하고 있어. 자, 네가 진정한 드라마의 팬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하지?"


체크메이트다, 그렇게 선언하며 슬비에게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숙이는 제스처를 취하는 세하.


그 모습을 보는 슬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제이는 세하를 말려볼까 고민해봤지만, 오늘 밤에 세하에게만 일어난 사건만 상기해보아도 도저히 세하를 말릴 수 없었다.


'미안하군, 대장. 뭐 대신 이벤트에는 검은양팀 모두의 명의를 모아서 응모해줄테니까. 기운내라구.'


"웃…우으…히잉!"


마치 앙탈을 부리는듯한 소리를 찔끔 내다가, 간신히 삼킨 슬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세하를 째려본다.


"알았어! 이.세.하.요.원! 같이 가줄테니까! 앞으로 본인이 말한 만큼 검은양팀의 화합을 위해 헌신해주기를 바래!"


아니면 네 게임기들은 모두 비트화해서 날려버릴테니까!


새침한 목소리로 항복선언을 한 슬비에게 세하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물론이지. 자, 받아라!"


마지막까지 모 재판의 특수효과음을 재현하며, 세하는 2장의 티켓 중 하나를 슬비에게 날린다.


위상력을 담았는지, 일반적인 재질의 티켓임에도 마치 뻣뻣한 종이카드처럼 직선으로 슬비에게 날아갔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그것을 슬비가 잡으려는 찰나


사나운 검은색 돌풍이 급작스럽게 동아리방에 휘몰아쳤다.


"꺄악!"


"우와아아악?!"


"무, 무슨?!"


창문은 틀림없이 아까 다 닫았을텐데? 제이가 그 사실을 떠올렸을 무렵 순식간에 바람이 잦아들었다.


"포,폭풍이라도 온거야?"


"아니, 금주의 일기예보는 모레까지 맑음이었어. 그리고 바람이 불어도 이렇게 방안 전체를 휩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유리의 의문에 대답하며 김유정이 옷 매무새를 다듬고 동아리 방을 점검한다.


기묘하게도, 바람이 불기 전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양, 모든 물품이 제자리에 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라곤 머리와 옷차림을 정리하고 있는 검은양 팀원들 뿐.


"우웅…. 그 바람. 앞으로 질리도록 볼 것같은 예감이…." 


미스틸만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지만 이번에도 김유정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후…. 왜일까. 익숙한 느낌의 바람이었는데 말이야."


제이는 기분 나쁠정도로 강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방금의 바람이 신경쓰였지만, 이상하게도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어때, 다들 몸에 이상은 없어? 영 찜찜한데. 유니온의 검사라도 받아볼까?"


"그렇군요. 제이 씨 말대로 하는것이 좋겠어요. 방금의 사태는 도저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제이의 제안은 검은양팀의 관리요원인 김유정이 생각하기에도 지극히 타당했다.


"아, 그런데 내일 휴무일이라서 정기 검사라면 안되겠네요. 응급이라도 받아야할까…"


문득 김유정은 캐롤리엘이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이 황금같은 주말에 굳이 캐롤을 부르기엔 미안하고, 부른다고 올 것 같지도 않으니…' 


캐롤리엘이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부정할법한 말이었다.


"뭐, 뭐라고?!"


갑자기 세하가 큰 소리로 외친다.


김유정은 세하쪽을 바라보았다.


"티켓이 사라졌다니 무슨 소리야? 창문이 다 닫혀있었는데! 방문도 닫혀있었고! 바람 때문에 책장이나 냉장고 밑으로 들어간거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슬비는 단 1%의 농담도 섞여있지 않는 말투로 단언했다.


"내가 티켓을 잡으려는 순간에 검은 바람이 몰아치더니, 방안이 순간 암전되었는데 그 찰나의 사이에 티켓이 공중에서 사라져버렸어.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확신할 수 있어."


"마, 말도 안돼! 네가 바람이 분 틈을 타 태운건 아니고?"


"리더인 내 명예를 걸고 말하겠어 이세하. 난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세하의 말이 역린을 건드린건지, 슬비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세하도, 자신이 실언했음을 인정하고 반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



도대체



"왜…? 왜 하필 지금?"


세하는 자신의 머리털을 부여잡고 쭈그려앉았다. 마침내 이슬비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어찌하여 하필 지금 이런 말도 안돼는 일이 일어난거지?


"으아아아! 왜 난 행복할수 없는거야!"


세하는 정말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이 집이었다면 자신의 방 침대에서 베게에 머리를 박고 쉴새없이 이불을 걷어찼을테지.


"으아니 챠! 정말 되는 일이 하나 없어!"


그런 세하가 안쓰러웠는지 유리가 다가와 세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진정해, 세하야. 티켓을 한 장 더 구할 수는 없는거야?"


"준결승전티켓이야! 그것도 스크린과 가장 가까운 좌석 티켓이라 이젠 암표로도 구하기 힘들단 말이야! 그런데…그런데!"


"그,그래? 그럼 안타깝지만 혼자서라도 가면 되지 않아?"


"물론 갈꺼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게든 세하를 위로하려는 유리의 어깨를 붙잡고, 제이가 제지한다. 제이를 돌아본 유리가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내자 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쭈그린 세하와 유리의 앞에 선다.


"후…. 대장이 그래도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정말로 그 바람이 티켓이 증발하게 된 원인인 모양이야 소년."


제이는 세하의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도의 자상함을 담아 얘기했다.


"안됐지만. 포기해, 소년. 포기하면…편해."


"아저씨…!"


오늘만 벌써 몇번이나 데드리퍼에게 옷이 찢기듯 멘탈이 갈려나가고 있는 알파퀸의 적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제이를 올려다보았다.


"슬비를…이기고…싶어요…!"


농구를 하고 싶다며 울부짖던 모 고등학생처럼 세하는 절규한다.


훗날 얘기하기를, 미스틸은 그 당시 제이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도…!'라고 대답했다고 주장하지만, 오직 미스틸만 들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기에 제이를 둘러싼 진실공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런이런, 아직은 우리가 등장할 때가 아니었어. 누나. 울먹이는 이슬비의 표정을 한창 음미하고 있었는데, 아쉽게 되어버렸잖아."


"흥! 나도 알아, 애쉬. 하지만 저 분수도 모르는 계집이 꼬리를 치잖아!"


"내가 볼때는 오히려 이세하가 이슬비에게 작업을 거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분명 저 둘은 자각도 못한 상태였겠지만."


"아직 이세하는 유아같은 순수한 상태니까 모르는게 당연하지!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세하를 빨리 내가 조교해주지 않으면! 겸사겸사 서유리도 훈육하고!"


"…뭐, 나도 슬슬 이슬비를 훈련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어, 누나. 그럼 저들이 활동하는 곳에 우리들의 분신을 보내주면 될 것 같은데?."


"그래, 정한거야, 애쉬! 근데, 그냥 이 종이 쪼가리를 가지고 가면 되는거야? 종이에 적혀 있는 곳이 어디지?"


"훗, 당일 내가 알려줄게 누나. 그것보단 이세하를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해두는게 좋지 않겠어?"


"물론이지! 꺄핫, 기대된다♡ 이세하가 옆자리의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무지무지 흥분돼!"


-----------------------------------------------


완결 아닙니다.

2024-10-24 22:25:5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