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R-15?]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오세린편- : 제저씨의 시점(2)

Maintain 2015-04-21 10

"음...이거 어쩐다...?"

캐롤의 의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지만, 건물 입구에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뭐랄까, 들어가기가 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캐롤네 의무실은 검은양 사무소와 가까운 건물에 위치해 있다. 사무소에서 걸어서 쭉 정면으로 나가서 한 3분 거리? 그래서 평소에도 약을 얻으러 자주 방문했었고, 캐롤은 그때마다 나에게 때에 딱 맞는 약들을 지급해 줬었다.  

그리고 아까 전에 말했다시피, 오늘은 캐롤에게 내 독감에 대한 진단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한창 캐롤도, 세린이처럼 부라ㄹ...아니, 아스타로트 건 해결이 된 후, 전근 문제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여유로운 시간에 진단해 달라고 했고, 저녁 때쯤에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건데.

"이래서야 원..."

손목시계를 보며, 나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몸도 별로 안 좋고 거리도 가까운데, 설렁설렁 걸어가도 늦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몸이 안 좋아지더니 시간개념도 안 좋아졌나. 약속 시간보다 무려 30분 넘게 지각을 하고 말았다. 사이킥 무브를 썼었다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전에 내 몸이 버티질 못했을 거다. 가뜩이나 착지할 때마다 뼈 마디마디가 쑤시는 마당이니.

물론 캐롤이 그런 것 때문에 쉽게 화를 낼 여자는 아니란 건 잘 알고, 미리 좀 늦어도 이해해 달라고도 전화로 양해도 구해 놨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늦으면 아무리 캐롤이라도 화를 내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전화로 말하고 다음으로 진료 약속을 미룰까?

"후..."

한창 고민하다가, 캐롤네 진료소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마음을 굳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캐롤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그리고 이대로 돌아가면 진료도 못 받고, 그러면 복귀도 늦어지겠지. 문자 그대로 게도 구럭도 다 잃을 게 뻔하다. 잔소리를 듣는 건 이미 익숙해졌으니, 한 귀로 흘려보내고 빨리 제대로 된 약을 받아서 건강을 되찾아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자고. 세린이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캐롤네 의무실은 건물 거의 꼭대기층에 위치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의무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영 기분이 좋지 않은 광경이 보인다.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거기다 사람도 하나 없는 좁은 건물 복도. 예전에 야간 시가전에 이런 광경을 많이 봤었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난장판이었고 침묵도 곧 차원종들이 내는 소리에 묻혔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분나쁜 광경임은 분명하다. 뭐, 그래도 덕분에 밤눈이 밝아졌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인가. 최대한 빨리 여길 지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뚜벅, 뚜벅. 

텅 빈 복도에 내 발소리가 울려퍼진다. 기분나쁠 정도로 크게 울려퍼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계속 걸었고, 저 멀리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하나 보인다. 음, 다 왔군. 나는 좀 더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    "
"...?"

-옮기려다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 같아 발걸음을 멈췄다. ...뭐였지? 잘못 들은 건가...

-...

...아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다. 어디서 나는 거지? 좀 더 움직여 볼까. 소리를 듣기 위해,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앞으로 이동한다. 

-응...

머잖아, 소리의 진원지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의무실 안? 문에 귀를 대자, 안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분명 캐롤 목소린데...근데 어디 아픈가? 왜 저렇게 신음 비슷한 소리를...?

-하아아...

뭔가 이상해, 아무래도. 나는 캐롤이 눈치 못 채게 살짝 문을 열었고,

"...!!!"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광경을.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입을 틀어막아 참을 수 있었다.

손질 잘 된 금발, 푸른색 블라우스에 타이트한 검은 치마, 그 치마 밑으로 뻗은,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매끈한 다리. 그리고 목에 감겨진 노란 머플러. 분명 캐롤이었다.

"하, 아앙..."

그 캐롤이, 등받이 없는 바퀴달린 둥근 의자, 환자들이 진료받을 때 앉는 그런 의자에 앉아 있다. 다만 앉아 있는 그 자세는, 다리는 무방비하게 선정적으로 벌어져 있고, 블라우스는 앞섬이 풀어져 속옷과 하얀 언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얼굴은 잔뜩 상기가 된 채 땀이 흐르고 있고, 호흡은 잔뜩 거칠어진 채 왼손은 자기 가슴에, 그리고 오른손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저 위치는...

"무, 무, 슨."

그 광경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니 뭐, 남자들만 그렇고 그런 짓을 하라는 법은 없지 물론. 남자나 여자나, 3대 욕구 중에서 그쪽에 대한 욕구를 혼자서 푸는 일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여자들의 그런 걸 접한 건 컴퓨터에 있는 우수한 시청각 교보재에서 뿐이었고, 현실에서 저런 광경을 보는 건 오늘이 내 인생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격이 훨씬 더 센 거겠지. 아마 입안에서 짠 쇠맛이 도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 쇠맛의 출처가 입 안인지, 코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그나저나. 이거 어쩌지? 계속 이걸 보고 있을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그냥 재빨리 사이킥 무브라도 써서 도망치는 편이 더 나으려나? 어쩌지? 대체 어쩌면 좋은 거냐. 머릿속이 터질 듯이 혼란스러워서, 문자 그대로 돌이 되어서 굳어 있는데,

"하아..유, 유정...언니..."

캐롤의 신음섞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유정 씨라고 했나?

"유정 언니...좋아...해요...유정 언니..."
"..."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캐롤 저 녀석, 분명 유정 씨에게 마음이 있었지. 통돌이 마왕의 안경을 통해 그걸 처음 봣을 땐,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캐롤이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나. 단순히 연애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었는데.

뭐...누가 누굴 좋아한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안 된다. 경우야 다르지만, 나도 한때는 남이 보기에는 여러 의미에서 말도 안 되는 사람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으니. 물론 그건 동성이 아닌 이성이었고, 결국 마음도 전달되지 못했지만. 

캐롤의 속마음을 봣었을 때, 한쪽에서 왠지 모를 동정이 들었던 건 아마 그 때문이겠지. 저 캐롤이 좋아하는 당사자인 유정 씨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까.      

"후..."

거기까지 생각하자, 왠지 남의 말 못한 사정을 본 게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진료는 그냥 다음에 받기로 했다. 캐롤한텐 좀 있다 전화하자. 나는 소리하지 않게 문을 살짝 닫았다. 

...후, 걷기 힘드네. 아무리 마음은 냉정해졌어도, 몸은 정직해서 말이야. 오늘 밤에 잠은 다 잤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집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정말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뭔 일이 있었냐고? ...그건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자.

설마 세린이 그 녀석...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줄이야...





예, 안녕하세요. 며칠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음, 제목에서도 보실 수 있으시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세게 나가 봤습니다. 약간 성인틱하게, 라고 해야 할까요? 왠지 오늘따라 이런 글도 써 보고 싶었고요. 혹시나 반응이 좋다면, 조금 아슬아슬하게 이 노선을 유지할 수도?
근데...써 놓고 생각해 봤지만...역시 전 그쪽에 대한 묘사는 약하네요; 더 세게 나가는 방법도 모르겠고, 그리고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랬다간 바로 글이 잘릴 거 같아요ㅠㅠ 그래서 저번처럼 글도 많이 짧아졌고...엉엉. 그쪽 묘사를 더 잘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건 단순한 저의 그쪽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은 아닌, 나중의 이야기를 위한 복선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 점을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후후후.
아무튼 오세린 편에서 제저씨의 시점은 이번 글로 끝이네요. 다음에는 오세린의 시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과연 오세린은 제저씨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요? 그건 다음 글에서 확인해 주시길 바라며,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25:5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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