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의 화이트 데이는 번거롭다(하)

사일로시빈 2015-03-16 10

"오랜만에 보네요 제이 요원. 스킬큐브는 체크하고 있나요?"


 도연은 늘 하는 말로 제이를 맞았다.

나른해보이는 시선은 한 점도 흔들림이 없고, 가운에 감싸인 볼륨있는 몸매는 오래된 대리석 조각처럼 보인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했지만, 그 사무적인 태도는 감정을 어딘가에 잘라놓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름을 부른 시점에서 '클로저'라고 호칭하는 것보단 친근해진 단계다.


 제이는 의자에 앉은 그녀 너머를 바라본다.

여러개의 모니터에 뜬 X선 사진들, 쉴새없이 암호화된 문자가 올라가는 도표, 빼곡한 논문과 보고서.

과학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여성답게 그녀의 연구실은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술들로 가득했다.


"내가 바쁜데 방해한 건가?"

"맞아요. 하지만 제이 요원이 없다고 해서 한가해지는 건 아니죠. 마침 휴식시간이구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린다.

제이는 거기서 다큐멘터리에서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과정을 빨리감기로 보여주던 영상을 떠올렸다.


"이번엔 누굴 개조하려는 거야?"

"딱히 아무도요. 기왕 오셨는데 차나 한 잔 드세요."


 제이는 매번 야근을 해 피로해하는 그녀에게 쌍화차를 권한 적이 있다.

여성에게 권할만한 차는 아니었고, 물론 같은 연구동의 근무하는 연구원들은도그 쓴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연은 블랙 커피를 더 좋아했지만 가끔 생각이 날 때는 싸구려 티백으로 된 한방차를 입에 댔다.

그리고는 종종 눈두덩을 짚으면서 혀 끝으로 쓰디쓴 액체를 굴렸다.

그것은 어찌 보기엔 스스로를 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이는 이제 자신이 권했던 그 차를 받았다. 물론 매일같이 쓴 것으로 단련된 그에게는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도연은 물끄러미 의자에 걸터앉아있는 제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러셨죠. 기계랑 사람은 많은 점이 다르다구요."

"응? 뭐, 그랬지."

"맛도 느끼지 못하고, 향기도 맡지 못하고, 뾰족한걸 만져도 느낄 수 없다면서요."

"그래. 맛있는걸 먹을 수 없다는건 정말 많은걸 포기한 거야. 아프지 않으니 건강할 수도 없지. 그렇지?"

"그럼 우리와 똑같이 숨쉬고, 먹고, 만지고, 말을 나누고, 생각하다가, 숨이 멎으면 그건 인간인가요?'

"차원종은 인간이 아니지."

"로봇이 그렇다면요?"


 그녀의 귀걸이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을 때 검은 눈동자에 잠시 하얀 금이 갔다.

단순한 불빛이었을 뿐이지만, 제이는 거기서 어떠한 광기의 편린을 봤다.

차를 마시며 눈을 돌리니 그제야 논문에 써있던 글자가 들어왔다.

[생체물질과 전기저항을 이용한 인공후각 시스템 개발], [식품 품질 검사를 위한 표면 단백질을 이용한 전자미각의 응용]등등.


 제이는 다시 도연을 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반지가 껴진 손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작은 다이아가 껴진 은반지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벌레들을 차단하는 우수한 방충망이었다.

그녀는 그 반지를 한번도 빼둔적이 없다. 아마 반지를 뺀다고 해도 그 그림자가 손가락에 남아있으리라.

제이는 차를 몇 모금 더 마셔 혀를 축였다.


"아니. 부족해."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도 아닌가요?"

"부모가 자식을 낳았을때, 부모는 꼭두각시마냥 자식을 잘 조종해 자기가 못 이뤘던 것들을 이루려고 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지.

이미 자식은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온 파편이 아니라, 이미 자유로운 인간이니까. 로봇은 자유롭지 않지.

자네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흉내낼 목적으로 만든다면 그건 인간이 될 수 없는 거야. 본인이 더 잘 알지않나?"


 도연은 눈길에 날을 섰다. 제이는 선글라스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벽에 구멍이 났다면 그걸 메꿔야해요. 그렇지 않나요? 구멍난 벽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왜 그걸 채우려고 해? 그냥 놔둬도 괜찮아. 구멍이 아니라 문이라고 생각해. 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고, 해가 비칠 수도 있지."

"벌레가 들어오면요?"
"잡거나 내쫒을 수 있겠지. 인간은 자유로우니까."


 제이는 도연을 잘 알지 못했다. 뭇 어른들이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본인이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지랖이고, 잔소리이며,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제이는 말에는 온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몇 살인지, 언제 그 이와 헤어졌는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행복했던 시절의 그녀가 어땠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제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었어."

"............."

"당신이 나보다 똑똑하니까, 더 잘 알겠지. 내가 또 주제넘은 소리를 했군."


 제이는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또 아저씨같은 소리를 했다며 속으로 자책했다.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하는 법인데 점점 나이든 것을 티내고 있다고.

그는 주섬주섬 재킷 주머니에서 잘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화과자야. 차랑 궁합이 좋아. 화이트 데이 선물치고는 좀 노인네같은가?"


 도연이 울기 시작하자 제이는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것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에게서 알아낸 새로운 부분이기도 했다.  

제이는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그 표정이 무척이나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뭐야. 화과자 싫어하나? 혹시 내가 또 실수했어?"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도연은 스스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촘촘히 훔쳤다.

새까만 눈은 잘려나간 흑요석의 단면처럼 매끄럽게 빛났다.

마치 방금 전의 눈물로 인해 먼지가 닦여나간 것처럼 같았다.


"아뇨. 제이 요원이 비과학적이란 건 잘 알았어요."


 도연은 상자를 열었다. 파스텔톤의 색채가 인상적인 꽃봉아리 모양의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그녀는 부푼 볼을 숨기지도 않고 감상을 말했다.


"달아요."

"과학적인 맛인가?"

"인간적인 맛이군요. 고마워요."

"그래."

"안 좋은 꼴을 보였네요."

"아냐. 뭐, 그럼 더 방해하지 않을테니까. 수고하라고."

"아, 잠깐만요."


 도연이 손을 뻗어 재킷 끝을 잡기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보통 이런 식으로 큰 동작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 모습이 활짝 웃는 선우 란 요원만큼이나-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지만- 제법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실은 제가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만들었어요."

"호오."

"학교에 입학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율화된 로봇을 목표로 하고있어요."

"그래서?"

"제이 요원이 테스트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음, 이번 주말에요."

"난 연구원이 아닌데."

"연구자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로봇을 대해주셨으면 해요. 몇 번 말을 걸어보는 것뿐이지만요."

"뭐, 그래.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도와주지."


 제이의 대답에 도연은 아까보다 짙은 미소를 보였다.


"그래요. 아, 곧 휴식시간이 끝나요."

"후, 내쫓지않아도 가려고 했어."

".......그럼 다음에 봐요, 제이 요... 제이 씨."


 제이는 굳이 뒤를 돌아** 않았다. 그저 걸어가면서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

도연은 한참을 그의 약간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구멍을 통해 이미 뭔가가 들어와버렸다.

그것을 잡아야할지, 내쫓을지, 아니면 스스로 나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좀 더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비과학적인 감정이었다.


 한편 제이는 연구동을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았다. 회랑을 지나서 생물화학 관련 부서를 향했다.

이쪽 부서는 당장 출입시에 1차 소독을 거치고, 사원증을 긁어 신분을 증명한 뒤, 인터폰을 통해 방문목적을 밝혀야했다.

거기다가 구역에 따라서 소독 시스템이 달랐으며, 멸균구역에 입장할 때는 우주복처럼 생긴 멋없는 옷을 입어야했다.

제이는 이 에탄올 냄새가 나는 공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곳의 새하얀 조명은 언젠가 보았던 수술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예. 제이 요원. 수고가 많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대다수의 유니온의 연구원들은 제이라고 하면 "정말 울프팩 팀이었다고? 거기 그런 사람이 있었나?"하는 반응이었다.

정보가 검열된 그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세 시대의 인물을 보는듯 경이로운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경이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흥미로운 실험체를 대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들은 전설의 클로저 알파 퀸이 와도 같은 시선을 던질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G타워에서의 사건 이후로는 이들이 보다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한다.

제이는 어느 쪽이든 반갑지 않았다. 유명해지고 싶은 기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다.

부엌 위쪽의 곰팡이처럼, 바위 뒤쪽의 이끼처럼 그늘에서 조용히 살고싶을 뿐이었다.


"캐롤을 만나러 왔는데."


 인터폰 너머로 한숨이 들렸다.


[화이트 데이 선물이라면 좌측 검역소에 놔두고 가시면 됩니다. 혹시 액상물질이라면 두번째 검역소를 이용해주십시오.]

"역시 캐롤이 인기가 많군 그래."

[뭐...... 그렇죠.... 네? 에?]


 어조가 바뀌었기에 제이는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설마 또 차원종이 위상력억제기를 무시하고 출몰했다던가, 연구실 내에 잇던 차원종 샘플에서 유독한 신종 바이러스가 누출되었다던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몇 차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후 문이 열렸을 때는, 하얀 가운으로 몸을 감싼 캐롤리엘이 나왔다.


"제이! 날 보러왔군요! 정말 기뻐요!"

"여기 아주 오기가 까다롭군 그래. 캐롤이 현장지원을 나와주지 않아서 특경대 친구들이 모두 슬퍼했다고."

"제이도 슬펐나요?"

"캐롤이 없으니까 약을 사려면 10분 거리에 있는 약국까지 걸어가야 했다고."


 능청을 떨자 캐롤은 방긋 웃었다. 그녀는 우윳빛깔 피부와 벌꿀색 눈동자는 무척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제이는 그녀가 갓 구운 빵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 향기에 이끌려 계속 사람이 모이는 것이리라.


 그녀는 내 정신 좀 보라며 보안경을 벗고는 아무렇지 않게 검역소에 올려두었다.

어쩐지 푸른 액체가 묻어있던 그것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벽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버렸다.

 

"바쁜데 내가 또 방해였나?"

"oh, 그리 급한 일은 아니에요.

스케빈저형 차원종이 어떻게 마나나폰형 차원종을 조종하는지 알고싶어서 신경전달체계를 좀 해부하고 있었어요.

이걸 응용하면 우리가 역으로 신경계를 교란시켜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제이는 완전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나중에 클로저가 필요없어지겠구만."

"더 많은 실험대상을 연구한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힘내고 있어요. so, 뭘 선물하러 오셨나요?"


 캐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얼굴을 들이밀기에 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거리를 뒀다.

이 여성의 흉부는 단숨에 간격을 좁히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무방비한 점이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 건 아니고, 오늘이 화이트 데이인지 뭔지라서, 자. 자네는 이미 너무 많이 받아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제이는 커피를 내밀었다. 물론 싸구려 믹스커피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이거저거 고려해서 좋은 원두를 썼다고 광고하는, 자기들은 화학물질이 적어서 비교적 더 건강하다는 제품을 골랐다.

캐롤리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카페인 중독자였다. 제이는 종종 캐롤을 만나면서 이 여자가 비싼 커피머신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았다.

한술 더 떠 카페에선 모든 메뉴를 마셔보았으며, 특별한 커피잔이나 티스푼을 수집하는 고상한 취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나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커피를 주는 것이 옳다.

건강을 사랑하는 그에게 건강식품이 최고의 선물인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캐롤은 손뼉을 마주대고 입을 가린채 숨을 들이마쉬고는, 이내 반달처럼 입을 벌렸다.

눈조차 반달을 그리고 있어서, 그 풋풋한 분위기가 싱그러운 열매가 매달린 낙원의 과일나무처럼 연상시켰다.


"thank you! 정말 기뻐요! 마침 저번에 사뒀던게 다 떨어지고 있었거든요. 들고오기도 불편하구요."

"너무 좋아해서 이거 쑥쓰러운데."

"oh.....그런데 이걸 어쩌죠? 전 발렌타인 데이에 제이에게 아무 것도 주질 못 했는데..."


 제이는 마른 기침을 하며 흐트러진 선글라스를 밀어올렸다.


"아니.... 그건 됐어. 나한테 그런 건 주지 말라고 부탁하는 거야. 일종의 뇌물이로군."


 아직 식약청의 허가도 나지 않은 수상한 약이 배합된 초콜릿은 앞으로도 받을 생각이 없다.

종종 임상실험을 동의없이 시도하는 것만 빼면, 캐롤은 무척 유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캐롤은 아주 잠깐 고운 미간을 찌푸르며 손가락을 물고 햄스터마냥 신음소리를 냈다.

이후에 옆으로 올려묶은 나선형 머리카락을 리드미컬하게 흔들었다.

마치 느낌표가 정수리 위로 반짝 솟아오른 느낌이었다.


"right! 자요! 이걸 줄게요!"


 캐롤은 힘찬 표정으로 엄숙하게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하사했다.

제이는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약인가 불안해했지만, 의외로 평범한 텀블러가 있었다.

윤기나는 붉은 빛의 슬림한 디자인이다. 물론 이런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것은 평범해보이진 않았다.


"더치 커피에요!"

"그건 무슨 커피지?"

"상온의 물을 한방울씩 떨어뜨려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에요.

네덜란드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향이 무척 좋아요.

일주일 정도 오래 보관할 수도 있구요. 제 자신작이니까 한번 드셔보세요!"

"너, 너무 갑작스러운데...."

"커피의 좋은 점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게 훨씬 기뻐요!"

"아, 이건 다 마시고나면 돌려주면 되나?"

"음.... 그래요!"

"어... 뭐. 그래. 잘 마실게. 이거 내가 선물하러 와놓고는 선물을 받고 돌아가니 기분이 이상한데."


 제이가 뺨을 긁었지만 캐롤은 굳이 손을 뻗어 그의 손에 병을 쥐어주었다.

손이 마주친 동안 전류와 함께 체온이 흘러 제이는 어른답지 못하게 닭살을 세웠다.

캐롤이 손을 놓지않은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이에요, 제이. 주말에 혹시 시간 비나요?"

"음? 글쎄? 모르겠군."

"저번에 가고싶은 카페가 있었는데, 제이가 함께 가줬으면 해요."

"캐롤이랑 같이 카페에 가고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도 많을 거라고."


 돌려서 거절하자 캐롤이 입을 뾰족히 세우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제이가 아니면 안돼요!"

".............엉?"


 그가 식은 땀을 흘리며 무척 당황해하자 캐롤은 그제야 쥐었던 손을 놓고는 가운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 아니. ummmmm..... 그러니까요.... 다른게 아니고..."


우물쭈물 몸을 앞뒤로 흔들다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눈치를 살핀다.

그녀는 워낙 피부가 하얘서, 조금만 붉어져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제이는 또 아무 의미 없이 목을 문질렀다.

캐롤이 조심스레 묻는다.


"제이도 분명 좋아할만한 가게라고 생각해요. 안될...까요?"

"..........그렇게 물으면 어떤 남자가 거절하겠어."


 캐롤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방긋 웃고는 고맙다면서 그를 껴안았다.

생소한 감촉에 제이는 항복하는 자세를 취하며 또 어린애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뺨에 나뭇잎 모양의 열기가 진하게 남았을때, 그는 보기 드물게 잘 익은 피부를 보여주었다.


 캐롤에게는 단순한 인사였던 모양이었음에도 그녀 역시 달뜬 표정을 하고있다.

그녀는 주말에 보자면서 처음 나왔을 때와 같이 바람처럼 자동문 너머로 사라졌다.


 제이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뺨을 문질렀다가, 히죽 웃었다가, 기침을 하고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제이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을 때, 인터폰에선 누군가가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각 유정은 잔뜩 쌓인 선물들을 옮기고 있었다.

부활절에나 쓸법한 바구니에 알록달록한 사탕꾸러미와 금빛으로 포장된 초콜릿, 먹지도 못할 비누로 만든 꽃다발등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데이비드가 선물한 꽃다발에는 호텔 저녁식사 초대권이 꽂혀있었지만, 유정은 정중히 데이비드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유정은 이미 서류만으로도 자리가 모자란 사무실 책상에 쌓인 선물들을 굳이 카트에 싣지않고 들어서 옮기기로 했다.

그것은 "이거 봐, 나 김유정이야! 나 아직 안 죽었다고!"라는 무언의 외침과 같았다.


 유정은 내심 제이를 만나기를 기대했다.

매번 지병 때문에 죽겠다며 엄살을 부리고, 먹히지도 않는 농담을 꾸준히 던져대고, 늘 알게모르게 폼을 잡아대고,

관심이 있는척 다가오다가도 이쪽에서 한발 다가가면 한발 물러서서 장난이었다고 둘러대는 비겁한 남자말이다.

물론 그녀에게 주어진 선물들은 단순히 김유정 관리요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물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난 당신이 놀려댈만큼 헤픈 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로비로 가는 회랑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얗게 샌 머리는 북극곰마냥 햇빛에 따라 다른 얼룩이 보였고, 그를 가볍게 만드는 샛노란 선글라스 너머로는 눈이 보이질 않았다.

헐렁한 차림새에, 헐렁한 걸음걸이에, 헐렁한 말투까지. 유정은 이 헐렁한 남자가 늘 눈에 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아주 약간 화가 나는 일이었다.


"유정씨는 이제 택배 일도 하고 그러나?"

"누구 주는 게 아니라 다 제가 받은 건데요?"

"그게 택배지 뭐야. 여기까지 이러고 오는데 아무도 안 도와줬나?"

"여기 사람들이 모두 제이씨처럼 날강도는 아니니까요. 당연하단듯이 사탕 하나 가져가지 말아주실래요?"


 자연스럽게 유정의 짐을 나눠든 제이는 포장을 벗기던 막대사탕을 원위치시켰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그는 전부 자신이 들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사도 없이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다가와선, 자연스럽게 반을 가져가고, 자연스럽게 눈을 그녀에게 맞췄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못 들겠다는 엄살도 잊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에게 사탕 하나 정도는 기부해줄 수 있잖아?"

"제이씨는 불쌍한 사람치고는 인기가 너무 많지 않나요? 발렌타인 때도 엄청 챙겨갔잖아요."

"유정씨에 비하면 너무 적은데. 이거 다 누가 준거야?"

"궁금해요?"

"아니. 기억도 못할테니까."

"다, 다 기억하면서 받았거든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유정은 누가 어떤 것을 주었는지 까맣게 잊고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못난 여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은 자존심 상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대단한 그녀를 무척 편하게 대하는 그가 괘씸하기도 했다.

그렇다. 오늘은 화이트 데이다. 남성이 호감을 가진 여성에게 선물을 주며 환심을 사는 로맨틱한 날이 아니던가.

제이 역시 그녀에게 줄 물건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제이는 여전히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걷고있을 뿐이다.

유정은 헛기침을 했다.


"음? 뭐야. 기관지가 안 좋아? 여기 내가 애용하는 진해거담제가 있어."

"그, 그런 건 됐거든요? 무슨 주머니에 약국이라도 들어있어요?"

"약사나 할 걸 그랬어."

"제이씨가 약국을 하면 절대 안 갈 거에요."

"왜? 유정씨한텐 특별히 서비스로 내 특제 건강차를 대접할 거라고."

"평범하게 커피로 대접하면 어디가 덧나요?"

"그 말은 나랑 커피를 같이 마시고 싶다는 거로군?"

"아닌데요?"


 제이와의 대화는 일종의 탁구와도 같았다.

그녀가 언제나 뾰족한 말로 톡 쏘아붙일 때마다 그는 부드럽게 받아 넘기는 것이다.

때로는 아예 받지 않고 넘겨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에게서 점수를 따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화내는 그녀를 보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평화로운 오늘 제이씨는 어딜 그렇게 나돌아다니셨나요?"

"나? 나야 아주 바빴지."
"흐응. 저보다도요?"

"그거야 모르지. 난 유정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진 않거든. 혹시 궁금하면 내 저녁메뉴라도 알려줄까?"

"제일 필요없는 걸 알려주려고 하지마세요."

"닭가슴살이야. 맛은 없지만 근육을 만드는데에 도움이 되지."

"피, 필요없다니까요!?"

"내가 샐러드는 이제 녹즙만큼 잘 만드는 기분이야."

"계속 그러면 저 화낼 거에요?"
"그래서 유정씨는 어땠어?"

"뭐 늘 하는 일이죠. 밀린 보고서 올리고 결제된 예산이 너무 적다고 공문 보내고... 아니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거지?"

"유정씨 목소리가 아주 듣기 좋은데. 계속 말해봐."

"이, 이제 한 마디도 안 할 거에요!"


 엘리베이터 앞에서서 볼을 부풀린 유정을 제이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유정은 발을 까딱거리다가, 이내 힐이 그런 동작에는 안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힐끔 눈을 돌리니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빙긋 미소 짓고있다.

그 모습이 마치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같아서 유정은 불편한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유니온이 쓸데없이 건물을 고층으로 만든 탓에 승강기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3층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정은 먼저 "계단으로 가죠."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유정은 이 모든게 오래된 농담처럼 여겨졌다.

두 부부가 말을 오래 참는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집 안에 도둑이 들어왔는데도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말이다.

전광판에 뜬 붉은 글씨가 마침내 5로 바뀌었다. 화살표는 올라가겠다고 안간힘을을 쓰지만 숫자는 요지부동이다.


 유정은 다시 제이를 살폈다. 제이의 표정도 아까와 같았다. 미소가 좀 더 짙어졌을 뿐이다.

이제 그녀는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좀 더 많은 피를 뿜어내고, 빠르게 도는 피가 혈관을 따라 얼굴로 올라가 피부로 열기를 배출한다.

역시 이런 상황은 오래된 농담이었다. 저런 표정을 짙고 있을 뿐인데 저런 남자에게 이렇게 가슴이 뛴다는 것은 넌센스다.

유정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뭐죠?"

"역시 목소리가 듣기 좋군 그래."

"그렇게 절 놀리는게 재밌어요?"

"무슨 소리야. 내 농담이 훨씬 더 재밌지."

"아뇨. 재밌던적 한번도 없어요."

"물이 영어로 뭐게?"

"셀프라고 하려고 그랬죠?"

"하, 이것 봐. 역시 우린 통하는 점이 있어."

"아, 아냐! 그럴리가 없어요!"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두 명이 마저 내렸기에 마침 안쪽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버튼을 누르고 있던 제이가 레이디 퍼스트라며 유정을 안으로 들여보낸 후 따라 들어온다.

문이 닫힐때쯤 제이가 입을 열었다.


"실은 내가 들고있는 이거말야."

"왜요."

"유정씨한테 줄 화이트 데이 선물을 숨겨놨어."

"에?!"

"뭔지 맞추면 보너스를 얹어줄게."

"초콜릿이죠?"

"바로 들키는군. 반지라고 말해주길 바랬는데."

"서, 설마 반지에요?"

"물론 아니지."

"그럼 그렇지."

"기대했나?"

"전혀요?"

"물론 내 초콜릿은 평범하지 않아."

"녹즙으로 만들었다 그러면 버릴 거에요."

"좋은 아이디어로군."

"아뇨, 폐기해야할 아이디어라구요."

"오빠라고 한번만 불러주면 못 줄 것도 없어."
"뭐가 그렇게 거만해요!? 흥. 그래요. 안 받을래요."

"그렇게 날 오빠라 부르는게 어렵나? 역시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가?"

"..........."


 유정이 눈을 흘기는 것과 동시에 제이는 식은 땀을 흘리며 발을 비비 꼬았다.


"힐로 사람 발을 밟는건 굉장히 잔인한 일이야 유정씨."

"........흥."

"안 받아줄 건가?"

"그냥 좀 주면 어디 덧나요?"
"받고싶기는 한가보군?"

"아닌데요?"

"아쉽군 그래. 초콜릿은 양주와 잘 어울린다더군."

"에?"

"내가 유정씨를 위해서 와인이랑 위스키도 챙겨왔는데말야."

".............으으...."

"주인이 없으니 이걸 이제 누굴 줘야하나....."


 제이가 휘파람을 불며 창 바깥을 보고 딴청을 피우자 입술을 깨물고 그를 쏘아보던 유정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선물에 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주, 주세요."

"..................."

"..........오, 오, 오...빠."

".................."

"............제이씨?"


 유정은 선물더미 뒤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그녀는 그의 얼굴색이 다르단 것을 알았다.

1층까지 내려가는 승강기 안에선 잠시동안 심장소리만이 달음박질쳤다.


"이거 예상 외로 파괴력이 강하군."

"빠, 빨리 주기나 하세요."

 

 그때 1층이 열렸다. 다른 직원들이 무척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둘은 서둘러 내렸지만, 여전히 별 말을 나누진 않았다.

제이가 곧 그녀가 들고있던 선물 위에 서툴게 포장된 상자를 올렸다.

곽 안에는 동그란 초콜릿들이 일렬로 박혀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어설픈 것이 직접 만든 것처럼 보였다.


 제이는 이젠 그녀와 보폭을 맞추지 않고, 약간 앞서서 걷고 있었다.

앞에서 어색하게 떠들기 시작한다. 마치 악보를 잊은 지휘자 같았다.


"그런 걸 위스키봉봉이라고 부르더군. 나도 한번 만들 수 있겠어서 도전해봤어. 나름 비싼 술 쓴 거야."

"..............제이씨."

"그, 뭐냐. 유정씨도 발렌타인 데이때는 손수 쿠키를 만들어줬으니까, 나도 만들어주는게 도리에 맞지 않을까해서."

"...............제이씨?"

"유정씨가 어떤 정도로 단 맛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평범하게 만들어봤어. 좀 장식이라도 할 걸 그랬나?"

".............."

"그리고 유정씨는 술이 약하잖아. 내가 매번 비싼 술을 사줄 수는 없지만, 그거 먹고 기분이라도 좀 내라고."


 유정은 그의 등을 보았다. 약간 굽어있고, 흘렁하고, 많은 상처가 담긴 등이다.

이 남자의 등에선 소독약과 파스 냄새가 났다. 그는 이런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서 핑크빛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다가갈수록 세피아빛으로, 잿빛으로 덧칠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약간 보폭을 넓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횡설수설 떠드는 그를 향해, 박치기를 하듯이 등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제이가 걸음을 멈추자, 유정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맙지."

"이제 그거 다 주세요. 퇴근할때 가지러 가기 전에 넣어둘 거였거든요."

".............."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아냐."

"이제 좀 쉬시구요."

"그래."


 평소보다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말한다.


"제이씨는 제 저녁메뉴는 안 궁금하세요?"
"궁금하지."

"그럼 주말에 봐요."

"...........응?"

"아, 그리고."


 뒤돌아선채 유정이 입을 열었다. 깃털이 가라앉아 땅에 닿았을 때는 필시 그런 소리가 나리라.

그것은 호수에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할만큼 작은 울림이었지만, 제이는 분명히 그 말을 들었다.


"저도 반지 좋아해요."


 유정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자 제이는 잠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의미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자,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던 경비원들은 이번에는 저 양반이 또 무슨 약을 잘못 먹어서 그러나 생각했다.


 제이는 그 날만큼은 드디어 자신의 인생에 너무 늦게 봄날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허나 봄은 변화무쌍한 꽃가루와 먼지와 꽃샘추위로 가득한 격정적인 계절이었다.


 주말이 돌아왔을 때, 이제 그는 여러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무척 부러운 상황이어야함에도 그는 무척 곤혹스러워했고, 누가 봐도 그녀가 모두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제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모두가 한마디씩 화살을 쏘아댔다.


"제이 아저씨 이 거짓말쟁이! 제 사복차림을 보고싶다고 하셨잖아요!"

"아저씨는 제 요리를 도와준다고 하셨잖아요?"

"아뇨. 제이 요원은 제 로봇의 테스트를 도와주기로 했을텐데요."

"그런 건 나중에 해도 괜찮잖아요!"

"실례지만 요리야말로 뒤로 미뤄도 급하지 않은 문제가 아닐까요?"

"모두에게는 미안하지만, 제이와 저는 선약이 있어요. 우린 둘이서 카페를 가기로 했거든요."

"바람둥이."

"방금 김유정 요원이 한 말이 무척 흥미롭군요."

"유정씨?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어머? 잘못 들은 건데요? 전 제이씨가 인간쓰레기라고 했을 뿐이에요."


 여성진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제이는 식은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노란 선글라스 안쪽으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같은 그 측은한 눈길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슬비와 유리는 팝콘을 먹고 있었고, 미스틸은 싸움이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며, 세하는 게임기 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때 세하와 제이의 눈이 마주쳤다. 간절한 SOS신호에, 세하는 안쓰럽다는 눈길과 함께 희미한 미소를 답했을 뿐이다.

그 의미는 아무리 눈치없는 그라도 해석할 수 있었다. 무척 간단한 비웃음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배 탄다고 말한게 누구였죠?"




**


 히로인이 많으니 드럽게 길군요.

끈기있게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화이트데이 당일에 올리려 했는데 늦었네요.

전 제이유정을 지지합니다!

2024-10-24 22:24: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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