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없애고 희망을 준다면 가짜 영웅이라도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요..

엘이예요 2024-03-26 1

갉작. 갉작. 갉작. 갉작.

“사.. 살려줘..!!”

하늘이 검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하늘이 독기로 보랗게 물든 뒤로는 유니온이 보낸다는 지원도 언제 오는지 막연했고, 우리도 희망을 포기했다.

나도 방금까지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으나 그 불씨도 점점 **가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차량을 몰던 친구의 팔이 창문을 깨고 들어온 벌레의 거대한 턱에 집어삼켜졌다.

앞 좌석에서 짧은 단말마와 함께 수도 없이 갉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점점 느리게 움직이고, 차량이 거의 멈추자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도망쳤다.

우리들은 광안대교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니,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앞은 차원종들의 향연, 대기엔 독가스가 퍼져있으며, 도시는 사람들의 광란으로 가득 찼다.

생존을 위해 나와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의 비명이 점점 멎는다.
두려움에 고개를 돌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바라봤고 이내 후회했다.

하늘은 독 안개와 메뚜기를 닮은 차원종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독안개 사이로 들어오는 찰나의 노란 빛조차 황충 무리가 황광(黃光)을 만들어내는 것 같이 보여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떴을 때 정차되거나 부서진 차량들이 잔뜩 보였다.
모두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가 누구도 부산을 나가지 못하고 벌레들에게 유린당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부산 시민 전체가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나비였던 것이다.

“으아아악!!”
“아아..! 아아아!!!”

대교를 뒤돌아 달린다.
차를 지나칠 때마다 꽉 닫힌 유리문 사이로 계속해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잠깐 옅어진 독기에 주변 풍경이 선명하게 보여오자 머리는 역으로 점점 하얘졌다.

광장에 거대한.. 매우 거대한 메뚜기가 있었다.

“아..! 아...!”

부산을 침공한 A등급의 차원종 아폴리온.
뉴스와 기사로 본적이 있었다.
부산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 독기를 만들어내던 차원종이다.

저 차원종이 때문이다.
저 차원종 때문에 부산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그런데 광장에 있을 차원종이 광안대교에 어째서..?

“오래간만의 식사 자리에 나왔건만. 흥을 깨는 먹이가 있구나.”

…!

아포리온이 말하는 것을 들음과 동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차원종이 말을 한다는 것에 놀랐고 그저 우리들의 고통이 저 차원종에게 열량을 공급하기 위한 것뿐이란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래선 안 될 일이지. 안될 일이야.”

아포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고개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할 수 없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속에 이렇게 큰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구나.

끝없는 미로를 걷는 아라드네와 같은 두려움. 연옥의 구덩이에서 헤엄치는 죄인과 같은 절망감.
나를 향해 날개를 퍼덕이는 노란빛들의 메뚜기 무리를 보자 순간적으로 운전하다 잡아먹힌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툭.

아.

시야가 점점 낮아진다.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거대한 황충은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며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들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누가, 누가 제발 좀 도와줘요...”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하얀 머리. 파란 눈.
유니온의 요원복을 입은 자신을 히어로라 소개하는 소년.
무너진 내 앞을 막아선 그 소년 주위에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거기까지다, 차원종! 히어로가 왔다!”
“건방진 인간 녀석.. 또 네놈이냐..!”

차원종과 소년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벌레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다가온다.
아니, 분명 내 앞의 소년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 소년은 입가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알파나이트. 이 도시의 어둠을 몰아낼 불꽃!”

소년의 손끝에서 파란 화염이 피어오른다.
그 불꽃은 촘촘한 회오리의 형태를 취하더니 소년을 습격하던 곤충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불꽃이 산개하여 광안대교를 가득 채웠다.
그 불꽃에 우리들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하나둘씩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어둠을 모두 밝힐 때까지.. 나는 결코 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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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모두가 나를 영웅이라고 떠받들어도, 나는 그저 철부지 애송이일 뿐이다.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싸우는 것밖에 몰라서, 그 하나만 열심히 할 뿐인.

애송이는 죽어가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
피를 쏟는 전우를 지키지도 못했다.

그랬다.

울프팩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맨날 도움받던 그는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고는 깨달았다.

팀이 아닌 개인으로써의 자신은 못 하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도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어린이 프로에 나오는 히어로들의 대사를 내 나름대로 수정해서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나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최소한, 사람들이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전쟁 중에도 생각만 나면 적어댄 덕인지 노트는 금방 가득 찼고, 그만큼 나의 노력도 인정을 받은 건지 낡아빠진 대사가 전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차원종이 무섭더라도, 자신을 구해줄 영웅이 여기 있다는 희망이.

“각오해라 차원종!!”

능력이 부족했던 나의 비효율적인 외침.
유치하고 낯간지러운 자세.

그런 촌스러운 것들은 다행스럽게도 등 뒤의 평범한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데에도 좋은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망치고 싶다고,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하지만…!

“들어라 차원종, 아니 아폴리온!”
“하찮은 인간 주제에.. 황충의 왕인 이 몸을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영웅이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알파나이트..! 이 도시의 어둠을 몰아낼 불꽃!”

내가 진짜 영웅이 아니더라도 좋다.
그저 그런 것을 흉내 내는 것뿐이더라도.

“이 어둠을 모두 밝힐 때까지.. 나는 결코 꺼지지 않아!”
“…!”

그들이 나를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힘을 낼 수 있다.

“뭐냐! 어떻게.. 어떻게 한낱 인간이 이런 불꽃을…!!!”
“모두가 준 희망의 불꽃이니까! 한 방 먹여주마, 아폴리온!”

눈앞이 파랗고 몸은 뜨겁다.
전신의 열기에 집중하여 한주먹에 모아서...

“…! 네이놈!”

내지른다!

“염화 염동권!!”
2024-10-24 23:37:4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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