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최종화]

PlaylMaker 2020-07-20 4

 나에게서 시야를 뺏어왔던 잿빛 안개가 걷히고 익숙한 두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나의 반려와 나 자신이 대치하는 장면이 비친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줄곧 염려하던 일이 도리어 터지고 말았다. 암흑의 광휘로 인해 지배권을 뺏긴 최악의 상태가 지속하기를 6년.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지아비가 회롱당하는 광경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나섰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신보다 곁에 있는 사람이 상처받을까 더 걱정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 서리가 내려앉아 응어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그것을 한이요. 울분이라고 부른다.
비탄 속에서 살아가던 그가 나름의 결단을 내린 결과가 이것.

절망에 빠진 사람이 무슨 계기로 다시 현실과 싸우기로 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아이의 영향이 있지 않은 지 짐작하고 있다.

"금실이 좋기로 알려진 원앙조차 짝짓기를 끝내고 나면 남남이 되거늘. 어찌 이 어려운 길을 마다치 않으려 하십니까."

그의 칼날은 애처로울 정도로 무디다. 몇 번이고 대련을 한 끝에 내린 결론.
무기에 아무리 힘이 많이 실려도 결국 살의를 담지 못한다면 무조차 제대로 벨 수 없는 법.
처음에는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그의 마음은 너무 여리고 상냥하다는 것.
검을 휘두를 때마다 상대방이 상처받을 경우를 염두에 두는 움직임은 목각인형처럼 경직되고 더딜 수밖에 없다.
새로운 힘을 얻고 마음가짐을 다잡으려 해도 천성은 결코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쥔 얼음의 사검.
원래대로라면 나의 것이었을... 나만이 다룰 수 있을 검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들려있다.

"이제 와서 무기를 바꾼다고 해서 없던 가능성이 생길 거라 생각하셨나요?"

"아니. 틀려. 이 무기는 내가 사용할 게 아니거든."

"?... 그게 무슨 뜻이죠?"

그 순간,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서 그림자 같은 잔영이 일어났고, 검붉은 검기가 유성처럼 날아와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채 반응할 새도 없이 지나쳤다.

"....?"

잠깐의 정적 끝에 찾아온 격통. 오른쪽 볼이 인두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마치 힘에 취해 모든 존재를 아래로 보고 있었던 나의 타락한 영혼을 꾸짖기라도 하는 일격이었다.
시야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카타나를 쥐고 있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언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곧 구해드릴 테니까요."

틀림없이 서유리 요원님이다.
기척도 없이 어떻게 여기로 도달하셨는지 자세히 알 방도는 없으나 그가 사검을 든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뒤에서 거대한 대검이 날아들어 왔다.

챙!

육중한 무게감이 사검을 통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차갑고도 고고한 위세의 힘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격을 선사해준 당사자의 이름은

"아쉽게도 하이드를 이자리에 데려오진 못했지만 일단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겠군요."

바이올렛 대원님.
예전에 함께 했을 당시보다 월등히 강한 위상력이 느껴졌다.
그녀들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고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개척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족한 나와는 대조적으로...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지 않은가! 이러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말이네."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 D백작은 무언가에 감탄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의 일들이 그의 소행이라면 수긍이 간다.
무엇보다 D백작은 몽환 세계의 지배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명을 초대하기 위해 클로저 이세하의 힘을 빌렸네. 후우... 아무리 나라도 여기에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긴 힘들군. 그럼 무운을 빌지."

"저를... 감히 방해하시는 건가요?"

처음과는 명백하게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는 자신이 적의를 두르고 그를 노려본다.
하지만 특별히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공간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와 서유리 요원님, 바이올렛 대원님 사이에 붉은색의 실이 이어졌다.
이상을 감지한 내가 그것을 잡아보려 했지만, 형체도 없고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불가능했다.
실을 얽히고 설켜 어떤 문양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하나의 인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드...걸스의 문양?"

테스크포스 중 하나인 소드걸스의 문양이 그려졌다. 특유의 검과 날개 표식이 특징인 우리들의 유대의 상징.
높디높은 차원의 틈새를 넘어온 자들이 왜 그녀들이었는지 설명해주는 이유였다.

"자! 이 틈에 빠져나오세요."

나를 구속하고 있던 얼음 감옥이 표식에서 내뿜는 빛에 의해 힘없이 녹아내린다.
동료들이 인도하는 길로 오랜 억압의 시간이 허물없이 무너진다.
저기로... 가면 나를 되찾을 수 있어.
고대해왔던 자유를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

......

"언니!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서유리 요원님의 품에 안겨져 있었다. 바이올렛 대원 님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친 부위가 있는지 면밀하게 확인하는 모양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세하 요원님은 무사하신지..."

"아......"

바이올렛 대원 님은 흘깃 바라보더니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떤 영문인지 같은 방향을 바라보니 사검을 땅에 꽂아 간신히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무리하게 위상력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에게로 다가간다. 아직 분리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의식이 온전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없는 힘을 억지로 짜내기 위해 광휘의 힘을 받아드린 몸이 결코 성할 리가 없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악화할 우려도 크다.

"여기......"

얼음의 사검을 받아들고 그의 허리를 잡아 몸을 지탱했다. 힘겹게 부들거리는 팔이 마음을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이것 또한.... 나의 업보.`

내가 더 강했더라면, 포기하지 않고 자신과 마주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터.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수긍할수록 힘들어지는 건 본인이 아니라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원죄의 대상을 심판하고 과거로 나아가는 것.

오랜만에 잡은 사검이 내 마음에 답하듯 공명하고 있다. 언제나 제멋대로 였으면서 이런 식으로 응답해주는 건 처음이다.

"하아... 또 방해인가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바득바득 덤비시는 의중을 잘 모르겠네요."

"네 이놈! 감히 나와 내 가족을 능욕하고 무사할 법 싶었더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실 건가요?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무력하게 짓눌려있을 때가 가장 어울리는데요. "

또다시 내가 평정심을 잃도록 도발하고 있다. 하지만 더는 저자의 간계에 넘어가 자아를 잃는 일은 없다.
집중하자. 분노와 증오를 발산하는 건 칼끝이면 충분하다.

시선을 그녀에게 집중시키자, 이를 바라본 반려는 스스로 나에게서 떨어졌다.
스스로 설 수 있는지 여쭈었지만 "부탁할게요." 라는 의사만 밝히고 주저앉았다.
숨이 가빠오는 걸 보니 아직 거동이 힘든 상태인 것 같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의 반려로서 상의도 없이 무모한 일은 꾸몄던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그동안 소명할 준비를 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

약간 어이없다는 듯 미소로 화답한다.
사실 알고 있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걸. 드라마같은 매체를 보면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게 더 낭만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답지 않다. 상황을 이용해 그런 고백을 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부부로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감정 표현에 너무나도 인색했다. 그가 나의 타락한 영혼에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 걸 인지한 이후로는 더 그랬던 것 같다.

상처를 주게 될까 두려워, 트라우마를 안겨줄 것이 염려되어 은연중에 거리를 두었던 게 오히려 유대의 연을 흐려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끝나고 나서 사태가 수습되면 다시 정식으로 마음을 전할 예정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짜 주제에... 건방지게 떼로 몰려오면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나요?"

"가짜는 네 녀석이다! 고독한 왕좌에 외로이 앉아 있다고 해서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후훗. 신? 그래요. 저는 신입니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를 구제한 하나뿐인 존재, 저를 신이라 지칭하지 않으면 누굴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말장난은 이제 끝이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다면 저승에 가서나 해라."

따로 신호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각자 스스로의 포메이션을 잡는다.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했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한방.

전열을 가다듬고 일제히 돌격하자, 분열된 어검들이 불규칙한 궤도로 날아들어 온다.
튕겨내도 다시 노려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통째로 얼려버렸다. 채 얼리지 못한 건 최소한으로 방어해내어 공격에 집중했다.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거의 같은 이상, 힘의 차이가 나도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다.
각 기술의 장단점을 이미 알고 숙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떠보는 식의 견제는 의미가 없다.

`가장 문제는 시간이 정지되는 타이밍을 어떻게 버티느냐다.`

안타깝지만 초월능력에서는 그녀가 압도적이다. 기본적으로 유지시간, 범위는 비교가 안 될 정도, 어디까지 응용 가능한지도 가늠조차 안 되는 상황.

능력은 알아도 특별히 대응방안이 없다.
이때, 서유리 요원님과 바이올렛 대원 님의 눈빛이 빛났다. 좌우 양단으로 나뉘어 광범위한 범위로 빠르게 벨 심산으로 보였다.

칼집에서 카타나가 뽑혀 나오는 순간.
그녀가 웃고 있었다.

"잠깐-"

얼마나 지났을까 0.1초? 아니 0.001초.
시각 정보가 뇌를 거치기 전까지의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시야에는 바이올렛 대원 님이 서유리 요원님을 베려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째서 이런 구도가 나왔는지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반사적으로 시간을 정지시키고 대검을 막아냈다.
0.3, 0.9, 1초.

"크윽..!"

제대로 자세를 잡을 겨를이 없어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어깻죽지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힌다.
가까스로 서유리 요원님을 구해냈던 다행이지만 그 여파는 상당히 값비쌌다.

"파이 요원님?!!"

"어떻게 하면 이 유용한 능력을 이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할까요? 역시 쓸모없는 존재는 무슨 힘을 가져다줘도 달라지지 않네요." 

"공간을 정지시키는... 능력이 아니었어?"

조금 전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단순히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하기엔 이질감이 크다.
서유리 요원님을 정지시켰다고 가정해 봤을 때, 기본적으로 바이올렛 대원 님과 그녀와의 위치가 다르기에 이런 상황이 나올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바이올렛 대원 님이 서유리 요원님을 그녀로 착각했다는 추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요. 이제 아셨나요? 저의 진짜 능력은 환각으로 만들어낸 공간을 사실로 인지하게끔 만드는 능력이랍니다. 당신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만요."

"뭐...뭣..."

그렇다. 힘의 차이가 아니었다.
과거의 맥없이 산산이 조각난 건블레이드도, 공중에 그대로 얼어붙은 위상력 조각들도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

나의 남편이 순순히 그녀의 욕망대로 응했던 이유도 이 능력을 통해 저항은 무의미하다는걸 여러 차례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각을 일으키는 매개체는 그녀 자체가 아닌 공간이기에 선배와 재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알면 당신이 뭘 할 수 있죠?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당신 따위가 아니라 저에요. 좀 느끼셨으면 좋겠는데요."

"어쩌면... 네놈의 말처럼 이세하 요원님은 한 아이의 아버지지만, 나의 반려는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인위적으로 맺어진 사이니까."

"그렇죠? 당신도 잘 알고 있네요. 그러면-"

"나는 절대로 요원님을 포기하지 않아. 그러니까 네 녀석은 빠져라."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지금까지의 어떤 얼굴보다도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상대보다도 불쾌한 건 나의 마음이다. 아내인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누가 내 것이니 네 것이니 시시비비를 가린단 말인가.

헤어지게 된 경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이세하 요원님이나 이슬비 요원님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 외에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그가 방금 전 한 발언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심 초조해져서 조심스레 눈을 맞춘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동공에 초점이 약간 빗나간 느낌이 들었다.

`......?! 설마...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나는 그의 각오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에 응해주는 것이 아내의 의무.
여기에서 최종오의를 꺼낸다. 

"이제부터 나는 그릇된 세상을 부수고 과거로 나아간다."

"하! 이제 능력도 쓰지 못하는 주제에. 좋아요. 현실이 어떤지 깨닫게 해드리죠."

조금 전 능력의 여파로 머리가 심하게 울리고 균형감각도 무너졌지만 상관없다.
이 일격은 절대로 빗나갈 일이 없으니까.

대지로부터 검은 용이 승천해 그대로 사검에 휘감겨온다.
범위는 극단적으로 줄이고 그만큼 위력을 높인 궁극의 비기.

많은 위상력을 조그마한 사검에 응집시키기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이내 평안을 찾고 잠잠해졌다.
완전히 검게 물든 칼날이 이를 말해준다.

절명검 일식.

찔린 대상은 일식의 달처럼 빛을 잃고 영구히 눈을 감는다. 워낙 위험한 기술이라 스스로 봉인을 하고 꺼내지 않아 왔지만 지금이야 비로소 금기를 져야 할 때이다.
누구보다도 증오스런 그녀를 향해 힘차게 발돋움을 한다. 원래대로라면 부작용에 못 이겨 휘청거렸겠지만, 어느 때보다도 발이 가벼웠다.

최대한 정직하고 올곧게 나아가 상대의 방심을 유도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가 능력을 사용했다.
0.1, 0.2, 0.3, 0.6, 0.8, 1초.

1분보다 긴 1초가 지나갔을 때, 사검에는 무엇을 베어내었다는 이물감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실패라고 규정지을 즈음, 눈은 한 번도 통한 적이 없던 공격이 그녀의 배를 관통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커...커흑! 어째서 고...공간이..."

수도꼭지가 망가진 것처럼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던 그녀의 능력은 결국 한 번의 일격으로 무너져내렸다.

"네놈이 환각으로 만들었던 공간은 이세하 요원님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이를 위해 시력마저 포기하셨지."

"그래...요? 결국, 저 여자를 ...선택하신건가요?"

이론상으로 보면 환각 능력에 걸리지 않기 위해선 시전자가 지정한 공간을 바라**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저 능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이 환각에 걸렸는지 그렇지 않은 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걸리지 않고 주변에 있는 공간을 통째로 바꿔치기 하면 된다.

당연히 무모한 시도였지만 평소의 저돌적인 성향과 맞는 도박이었다.
그나저나 또 혼낼 일이 늘었군.

"마지막까지.... 저를 봐주지 않으시네요. 정말 무심도 하시지..."

"......"

몸이 갈기갈기 갈라질 때까지 손은 그를 향했다. 애달픈 눈은 서럽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는 딱히 대꾸도 하지 않고 의연한 표정으로 위상력이 없어지는 걸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 대상이 사라진다는 걸 확인하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짐작은 가지만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갈라진 조각은 산산이 부서져 잿빛 나비로 변한다. 결국, 어둠의 광휘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대로 떠나보내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허전함이 남았다.

"드디어... 끝이 났군요.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만... 진상은 돌아가서 듣기로 하죠."

"후하.... 세하가 위상력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해서 **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언니."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세하 요원님이 많은 위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걸 눈치를 채고 재빨리 보충해주는 일이 선결 조건이었다.
초월된 능력을 사용하는건 상상 이상의 위상력이 필요하니까. 그런 점에서 소드 걸스의 멤버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아니, 이 언니도 그러네. 동료니까 당연할 일은 했을 뿐이에요. "

서유리 요원님과 바이올렛 대원 님의 육체가 희미해진다. 아무래도 공간 전이는 영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인 모양이다.
D백작.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은혜를 받은 만큼 감사 표시는 해두어야겠다.

"그럼, 이세하 요원님을 부탁합니다. 꽤 무리하셨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가시는 길, 잘 보필하겠습니다."

"세하야. 또 보자!"

"......응. 고마워."

이렇게 소드 걸스의 두 분은 전이되었고 동시에 연옥의 문이 열렸다.
왜 과거로 돌아가는 통로가 연옥이라고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미래를 위한 도약으로 느껴진다.
주변 공기의 흐름이 약간 어색해졌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 마음속에 막연하게 그려지지만, 막상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돌아가면 잘 부탁드린다고? 아니면...

"누나에게 부탁이 있어요."

"네?....네...."

일이 일단락되었음에도 그의 표정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영문을 몰라 문 쪽을 바라보니 난데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스며들어왔다.
.......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이제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문이 연옥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지금의 복잡한 감정도.
과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크나큰 대가가 필요하니까.

"돌아가게 되면... 여기에서의 저를 잊어주세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무엇을 우선시하고 무엇을 뒤로 둬야 할지 전혀 가늠이 서지 않았다.

내가 그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게 아니라 오히려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까?
이 상황에서 내 감정을 앞세우는 일이 과연 옳은 행위일까?

마음은 파도가 너울 치듯 너무나도 산만했고 그는 고뇌하고 있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은 채 어느새 문 앞까지 도달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죄책감과 후회가 뒤섞인 눈물만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동안... 저라는 사람을 좋아해 줘서 고마웠어요. 누나."

"....?! 저기"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 감사의 표시, 그리고 웃음.
나 역시 미소로 화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별말씀을."

무너진다.
보고 있는 형체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며 본연의 모습을 잃어간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응시했다.
얼굴에는 빛과도 같은 화색이 돌았다.

... 무슨 의미일까. 부부로서 오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세상을 괴롭혔던 근원은 나의 수행부족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힘들어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수없이 자아가 무너지고 좌절하기를 반복, 제대로 기댈 사람도 없었을 터... 오히려 든든하게 받쳐줄 사람은 내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소회를 풀자, 정신이 든 장소는 울창한 숲 속이었다.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지저귀는 소리가 알람이 되어 의식을 일깨웠다.

어떻게 되었을까 주위를 살펴보다 강에 비추는 나의 옛 된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돌아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내내 머릿속에 울려왔던 암흑의 기운이 맑고 청명해진 의식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곳곳에 새겨진 팻말을 따라 하산길에 오른다. 신서울대학교라는 지명이 언급된 것을 보니 관악산 인근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니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현실에 감사하며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약수터 근처에서 낯익은 모습의 여성이 보인다. 그럴 리가 없다며 나 자신을 다독여**만, 이 기척은 틀림없이 그 사람만의 것이었다.

"김유정 부국장님?"

"푸후후!... 어라? 파이 요원님이신가요?"

여기에서는 돌아가신 거로 되어있을 텐데... 어찌....

"혹시 제 아비를 보셨는지요?"

"네?! 파이 요원님. 결혼하셨었나요? 하지만 유니온 데이터베이스에는...."

혹시 몰라 슬며시 떠보았으나 몽환 세계에서부터 거슬러오시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진다고 해도 해소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우선 동료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있었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부국장님도 마찬가지 시군요."

"?..."

그 길로 유니온에 복귀하였고 확인 결과 세 팀의 클로저들은 신서울 곳곳에 흩어져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수팀이 꾸려졌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해산했다.

결론은 위상력을 지닌 클로저들의 진단 환각증세.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환각이라고 볼 수 없지만 결국 그렇게 잠정 결론 내려졌다.


***


3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들은 여기에서의 생활에 점차 익숙해졌다.
기간이 기간인 만큼 이 일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기엔 어려우나 일단 바쁜 클로저 생활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파이 요원님.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사냥터지기 팀의 오퍼레이터인 앨리스가 나를 불렀다. 역시 앨리스는 이곳에 앨리스가 어울리는 것 같다. 저쪽에서는 애석하게 약간 세월의 풍파(?)를 피하지 못했으니까.

"조금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최근에 2분대 아이들을 교육하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요즘에는 딱히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사이에 사고라도 있었는지요?"

"... 그 반대에요. 갑자기 너무 어른스러워져서 놀랐달까. 장난기는 있지만, 매우 점잖아져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아이들의 내적 성장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하다.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은 정도.
선배도 같이 와서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빈둥거리는 건 여전하다. 역시 다시 잔소리를 시작하지 않으면...

"제가 더는 가르칠 소양은 없습니다. 그대신 선배는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지만. 아 참! 휴게실에 분실물이 하나 들어왔는데요. 혹시 아는 물건인가요?"

앨리스는 어떤 액세서리를 내밀었다. 그건 바로 검은 장미 모양의 헤어핀이었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이건... 혹시.
뒷면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For Mystic』

이 물건의 주인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각인.
가슴 한편이 점점 아려오기 시작한다.
세계를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마음을 타고 그의 선물이 다시 나에게로 왔음을 실감한다. 

"파이 요원님? 괜찮으신가요?"

"잠시 이세하 요원님께 다녀오겠습니다."

"네?... 잠깐만요!"

달려간다.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그에게로.

운명은 우리를 강제로 붙이고 또, 다시 떼어놓았다.

재차 인연을 이어나가려는 것이 누군가의 의사에 반하고, 신조차 허락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물며 연민이나 동정 같은 이유도 아니다.
단지 그가 보고 싶으니까. 그저 함께하고 싶을 뿐이니까.

딱히 수식어를 더 붙일 필요도 없는 클로저 이세하, 그 자체에 반했으니까.
이런 나의 마음을 뺏어간 업보는 달게 받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멋대로 정해놓은 그의 의무다.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아내가 오매불망하도록 만든 무책임한 남편은 혼을 나야 하니까.
그러니 이번엔 무승부라고 할 수 있다.

설령 그가 나와 다시 이어지는 걸 망설이고 두려워한다고 해도 진정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도록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알려줄 것이다.

한 15분 정도 정신없이 달렸을까, 검은양과 늑대개팀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 역시 함께 자리하고 있다.

"?!!"

나는 지체없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는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름대로 도움을 요청하려는 신호일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어.... 파이 윈체스터 요원님이시죠? 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미래에서 선물하셨던 물건을 다시 맡겨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검은 장미 헤어핀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집중해서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 이런 물건을 맡긴 적이 없는데요... 그보다 본 적도 없어요."

"......"

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가 결혼 선물로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 주길 바라면서, 헤어핀처럼 흩어진 추억도 역시 소멸하지 않았길 바라면서.

"으...음."

검은양팀 동료가 서 있는 곳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럼에도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없이 헤어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회의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봐도.... 이건 제가 드린 물건이...."

"아......"

흘러넘친다.
그의 눈가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이전 세계로부터 흘러나온 추억의 사념이
주체 없이 흐르고 있다.

"어라? 어째서 눈물이?"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려 하지만 완전히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하하... 이상하네..."

"여기 있습니다."

청색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순간 망설였지만 결국 건네받고 말았다.
분명 제대로 기억하는 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매우 기뻤다.
무수한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고 나를 일부라도 추억해준다는 사실이, 의지가 심금을 울리게 하였다.

"이번엔 반칙 같은 건 쓰지 않겠습니다."

"?!"

"그대가 다시 제게 이 헤어핀을 선물해줄 마음이 들 만큼 연모하게 만들 테니까요. 그러니까...."

"어머......"

바이올렛 대원 님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소설책으로 입가를 가린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차있었다.

"가....각오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

"야, 뭘 멋대로 지르고 도망치는 거야."

선배가 도망치고 있는 나에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핀잔을 준다.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못 보여줄 광경을 보여주는 바람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털어내면 후련해 질 줄 알았는데 막상 하고 나니까 몸서리쳐질 정도로 부끄럽다.

"선배?!... 여긴 어떤 연유로 오셨습니까?"

"나야 신고하러 왔지. 미성년 클로저에게 불건전한 교제를 신청하는 후배를 어떻게 단죄할지를 심도 있게 논의하려고 했는데 마침 현행범이 여기 있었네?"

"으으... 이건 악몽일거야..."

"하하하하하!"

이 모습을 바라본 유니온 및 벌처스 그리고 협력업체 사람들까지. 졸지에 고백을 동네방네 소문낸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부끄러운 건 감정에 못 이겨 도망치려고 했던 점이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농담이고, 다시해. 설마 이렇게 끝낼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선배. 저의 마음을 다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전혀 감사할 일이 아닌데.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보고 있는 내가 더 민망하다고."

후우.
정신을 재차 가다듬고 당찬 기백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했던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픔과 슬픔을 딛고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선다.

의지가 있음에도 행하지 아니하는 건 용기가 없음이라.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인연은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늘은 이름 모를 별이 보일 정도로 맑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그의 눈처럼.
언제까지고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반드시 지켜내 보이겠다.



-----End------



좋은 소재를 가지고 내용 전개를 너무 중구난방으로 구성해서 많이 아쉽습니다. 결혼 생활이 어땠지도 거의 언급이 없네요. ㅜ 부족함이야 말로 다할 수 없는 글이지만 즐겁게 봐주신 분들이 계시면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10-24 23:35:3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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