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랑(龍狼) - 17

플루ton 2019-12-31 1

".........."

".........."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어나가는 나타와 레비아. 연구소에 있던 원혼들을 성불시킨 나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더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발을 옮겼다.

연구소가 있던 장소를 벗어나 산을 내려온 나타는 기차역으로 향하지 않고 바닷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저... 나타님?"

그러 나타의 뒤를 묵묵히 따라 걷던 레바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안 돌아가실 건가요?"

"......돌아가야지. 걱정마. 저녁 기차로 예약해 놨으니까."

레비아의 질문에 의도를 파악한 나타는 원하는 답을 대답하곤 쓰게 웃으며 바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하늘과 바다가 저녁노을에 모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주면 끝이라더군."

"...네?"

말없이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퇴원 말이야. 비실이가 그러더라. 다음 주쯤이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고."

"버, 벌써요? 좀 더 안정을 취하시는 게......"

불안한 목소리로 레비아가 조언했지만, 나타는 고개를 저으며 이를 부정했다.

"이미 충분히 쉬었어. 애초에 바닥난 위상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입원해 있던 거야. 위상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천천히 팔에 감겨있던 붕대를 풀어내는 나타. 그러자 붕대 밑에 있던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당황한 레비아가 다시 붕대를 감으려고 다가간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웅웅웅......

나타의 전신에서 위상력이 흘러나오더니 팔의 상처 위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위상력은 상처를 뒤덮었고 이에 반응하듯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아......!"

눈 앞의 광경에 탄성을 내뱉으며 움직임을 멈춘 레비아. 그녀가 바라보는 사이 나타의 팔에 있던 상처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이전이라면 위상력이 약해서 이런 짓은 꿈도 못 꿨지만... 지금의 나한테 이 정도 상처는 아무런 무제가 되지 않아. 그러니 퇴원은 문제없어."

상처가 나은 팔을 내보이며 설명하는 나타.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팔에는 이제 작은 생채기 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와전히 회복됐다고 할 수는...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회복하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레비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좀 더 입원해 있을 것을 권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위상력을 이용한 집중 회복은 겉보기랑은 달리 완벽한 회복이라고 볼 수는 없고 귀찮더라도 시간을 들여 회복하는 게 더 안정적이다. 이는 나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런 만큼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맞아. 나도 급한 일만 아니면 그렇게 했겟지...... 급한 일만 아니라면 말이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는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레비아에게 건네주었다. 의아한 레비아가 이를 살펴보니 단말기에는 여러 인물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위상력 강화 시술에 가담한 연구원들이다.."

"?!!!!"

예상치 못한 나타의 대답에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는 레비아. 그런 그녀에게 나타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김유정 그 아줌마... 전쟁이 끝나고 유니온의 실권을 거의 틀어잡았다더군. 그리고 복구잡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엔 그동안 뒤에서 몰래 행해지던 더러운 일을 청산하고 관계자를 모두 잡아들이려고 하는 것 같더라. 이 나타님에게는 비밀로 한 채 말이야."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자리에 없는 김유정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나타는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꼰대는 아줌마와 달리 나도 이 작전에 참여해야 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더라. 2주 전쯤 찾아와서 나에게 이 정보를 넘겨주더니 어떻게 할지는 내 자유라며 알아서 선택하라더군. 뭐 이 정도면 어떻게 된 건진 이해했겠지?"

설명을 끝낸 나타는 레비아의 손에서 단말기를 가져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을 전부 죽이실 생각이신가요?"

레비아가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며 물었다. 이에 나타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하, 하지만 김유정님이 그런 걸 용납하실 리가..."

"없겠지. 나도 알아. 그러니..... 선택해야겠지. 그 녀석들을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할지. 아니면 아줌마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쳐서 놈들을 전부 죽여버릴지 말이야."

차갑게 자기 생각을 읊조리는 나타. 전쟁이 끝난 이후 듣지 못했던 장난기 하나 없는 그의 냉정한 목소리에 레비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 안돼요. 나타님! 그런 짓을 하셨다간 다시 수배자 신세가 되실지도 모른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계속 복수를 하실 생각이세요? 이제서야 겨우 자유를 찾으셨는데 그걸 버려가면서까지 복수를 이어가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나, 나타님?"

그를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소리치던 레비아는 당황하며 말을 멈추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진 나타의 손 탓이다. 당황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타는 살며시 미소 짓고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알잖아. 내가 멈추지도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건."

"하, 하지만......"

"난 죽어버린 실험체 녀석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그 썩을 연구원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복수하기로 맹세했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한 그녀를 달래며 나타는 천천히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놈들을 직접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어봤자 사법거래같은 뒷 수작으로 빠져나올지도 몰라. 그렇게 빠져나온 연구원놈들은 다시 연구를 진행할 거고 그 과정에서 나 같은 존재가 또 생겨날지도 모르지. 그 아줌마의 정의가 잘못됐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 방식으론 결국 한계가 있어. 그러니 해야만 해."

"하지만...... 그걸 나타님이 해야 하는 이유는..."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반박의 말을 내뱉은 레비아. 이에 나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에 죽은 녀석들과의 맹세를 지킨다는 거창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그 녀석들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한 이기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지.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어."

나지막이 동시에 확고한 의지가 담긴 나타의 대답. 이에 레비아는 더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런 레비아를 달래기 위해 나타는 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남아있던 팔로는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이해해달라곤 안 할게. 그저 너희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가능한 들키지 않고 처리할 생각이지만 혹여 일이 잘못돼서 내가 모습을 감춘다면 너희는 걱정할 테니까. 이런 구제불능의 멍청이를 말이야. 그러니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지내라고."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레비아.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작게 불만을 토하곤 양팔로 나타를 끌어안았다.

"어,어이?"

"아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라니. 그럴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저는 물론이고 하피님, 티나님. 바이올렛님, 그리고 트레이너님까지... 저희 늑대개 모두 나타님을 누구보다 소중히 생각한다고요! 그런데...... 걱정하지 않을리가 없잖아요!"

나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소리치는 레비아. 당황한 나타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레비아가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하시죠? 나타님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떤 결말을 맞이하시더라도 그 곁에서 항상 함께 있겠다고 했던 걸요."

"...그랬지"

레비아의 말에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나타. 복수를 위해 지금껏 함께 싸워왔던 검은양 팀은 물론 늑대개 팀원과도 거리를 두고 혼자가 되려 했던 나타에게 레비아는 똑같은 말을 하며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그런 그녀를 시작으로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각자의 방식으로 나타와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나타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하여 복수를 행하는 것을 미루게 되었다.

"그때와 마찬가지예요. 이 이상 나타님을 말리지 않을 거예요. 나타님의 의지를 꺾는 것이 불가능하단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나타님이 혼자가 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 곁에 있을게요. 나타님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고 그 곁에서 함께하겠어요. 설령 유니온에서 나타님을 다시 범죄자로 지목하더라고 그 곁을 지킬게요."

"......!!!"

레비아의 결의가 담긴 말에 나타는 할 말을 잃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커다란 보랏빛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한줄기씩 흐르고 있었지만 동시에 강인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복수가 끝나거든 돌아와 주세요. 저희를 걱정하셔서 혼자가 되려 하지 마시고. 저희 곁으로 반드시 돌아와 주세요. 부탁드려요."

"........."

쏴아아아아아아아------------.........

조용한 해변을 메우는 파도 소리. 두사람은 아무런 말도 않고 지근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이 끝나면."

고요한 정적을 깨며 먼저 입을 연 것은 나타였다. 레비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붉게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나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약 아무런 문제 없이 복수를 끝내고 유니온에 지명수배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게 몇 개 있어."

"...그게 뭔가요?"

레비아의 질문에 나타는 약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세계일주요?"

의외의 대답에 레비아가 의아한 기색을 띄우자 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래. 그동안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긴 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관광을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한번 둘러보고 싶어져서 말이지. 내가 지켜낸 이 세계를 말이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레비아의 격려에 나타는 미소로 답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일이, 가지고 싶은 게 있어."

"뭔가요?"

"......가족."

"?!!!"

처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타의 대답에 레비아는 적잖이 놀랐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타는 담담히 말했다.

"가족이 가지고 싶어졌어.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집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이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 일이지만 지금은 왜인지 진심으로 그런걸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어. 뭐 난 평범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야."

마지막은 자조하듯 농담조로 말한 나타였지만 그 말에는 어느 것 하나하나 진심이 묻어났고 이를 느낀 레비아는 여러 생각으로 복잡해진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그...... 혹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글쎄. 뭐 한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하네."

혼란스러운 와중 그녀는 힘겹게 질문했고 이에 나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김이 빠질 정도로 간단히 대답했다.

"정말 바보같이 착해빠져서 나 같은 녀석에게도 손을 내밀어주고 또 환멸을 느끼지 않고 계속 다가와 준 그런... 나도 모르게 감정을 품게 된 녀석이 있기는 하지."

나타의 말을 듣던 중 레비아의 머릿속에 한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우 귀 장식이 눈에 띄는 후드티를 입고 밝게 웃음 지으며 자신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던 여성, 소영의 모습을 떠올린 레비아는 이어서 그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두던 나타의 모습도 떠올렸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동시에 납듣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시군요."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나 같은 녀석이 청혼한다면 받아줄까? 아니면 싫다고 거절할까?"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타는 마치 연애상담이라도 하듯 질문했고 이에 레비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야 나타님은 사실 섬세하고 친절할 사람이니까요. 그분도 아마 그걸 알고 있을 테니까... 분명 받아 줄 거예요."

가슴이 답답하고 매여져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레비아는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타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눈치 못 챘나 보네. 아니 모른 척하는 거라고 해야 하나?"

"네? 뭐라고 하셨......?!!!!"

그러더니 레비아가 무슨 말을 하기보다 먼저 나타는 레비아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곤 그대로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더니 그 손목에 입을 맞췄다.

"에? 무, 무슨...... 읏!"

당황한 레비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손목을 간질이는 감각에 신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는 천천히 입술을 떼더니 이번엔 손바닥을 가볍게 깨물었다.

"아읏...!!!"

갑작스런 통증에 참지 못하고 다시 신음을 터뜨린 레비아. 제법 큰 신음성에 부끄러워진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을 때쯤 나타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어때? 좀 감이 잡히냐?"

"네? 대체 무슨... 그전에 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레비아의 모습에 나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도 모르겠냐? 뭐 너답다면 너 다운 거지만."

한차례 불평을 토한 나타는 분위기를 진지하게 바꾸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그러니까 내가 아까 말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란 건...... 레비아 바로 너다."

"...........................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곤 얼빠진 소리를 내뱉은 레비아. 하지만 여전히 진지한 나타의 분위기에 이내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안 그래도 붉던 얼굴이 더욱 붉어지더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따.

"무, 무슨 말씀이세요?!! 그,그런... 절 놀리시는 건가요?"

"야, 야. 아무리 내가 성격이 나빠도 이런 거로 장난칠 정도는 아니거든?"

"그,그런... 대체 언제부터......"

믿을 수 없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레비아를 바라보며 나타는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언제부터 너를 그런 식으로 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그나마 확실한 건 이 마음을 확신한 게 전쟁 도중이었단 건 정도이려나?"

"대체 왜 저 같은걸..."

"그건 아마 네가 나에게 아무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어준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무리 험하게 내쳐도 긑까지 내 곁에 머물러준 얼마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 말이지."

레비아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나타. 시원스러울 정도로 빠른 대답에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추스른 레비아는 숨을 고르곤 가장 민감할 질문을 입에 담았다.

"하, 하지만 왜 저 같은 걸..... 나타님께서 호감을 느낄만한 여성이라면 저 말고도 있지 않나요? 그... 소영님이라거나."

"아, 여우 여자 말인가?"

레비아의 질문에 나타는 소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날 떄마다 웃으며 자신에게 어묵을 건네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뭐 확실히 그 여우 여자도 나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지. 그걸 부정하진 않겠어."

"그, 그렇다면 역시 제가 아니라."

"하지만."

레비아가 하려던 말을 끊고 나타느 고개르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에게 느꼈던 감정은 일반인이라면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은 애정이었어. 처음 느껴본 친절과 애정에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게 되면서 저절로 생기게 된...... 그런 감정이야."

"...정말로 그러신 건가요? 착각하신 건 아니고요?"

그 말을 들으며 아까부터 느껴지는 왜인지 모를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은 레비아가 물었다. 이에 나타도 아리송하단 표정으로 답했다.

"뭐... 솔직히 잘 모르겠네. 네 말대로 사실 여우 여자를 이성으로서 좋아한 걸지도 모르지. 그 여자가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란 걸 제외하면 이 감정은 뭐하나 정확한 게 없어. 전부 처음 느껴본 감정이니까."

"그렇다면 역시 소영님과...... "

"하지만 넌 아니야."

다음 순간 나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비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여우 여자랑 달리 레비아 널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명확해. 동료애나 우정 같은 게 아니야. 한사람의 남자로서 난 너라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어."

"읏......!!!"

이제느 오해의 여지도 없는 그 말에 레비아는 신음을 흘렸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나타는 처음으로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대해준 동시에 자신에게 삶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도록 해준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고백한다는데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무, 무리예요."

그 고백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다.

"저 같은 게... 나타님과 가족이 되다니...... 무리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

그녀의 거절에 담담히 이유를 묻는 나타. 이에 레비아는 어두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야... 전 차원종이니까요."

"............"

"아무리 김유정님께서 인권을 보장해 주신다곤 하셨지만 제가 차원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런 제가 나타님과 결혼해서 가족이 되려 하다니...... 말도 안 돼요."

어느새 레비아의 두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자조의 말을 늘어놓았다.

"거기에 전 둔하고 멍청하고 요령도 없고....... 단점투성이인 여자예요. 그러니 저 같은 것보다는 소영님과.......!!!"

하지만 이를 끝맺기보다 먼저 튕겨진 나타의 손가락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위상력은 커녕 힘조차 제대로 실려있지 않은 평범한 딱밤이었지만 자기비하에 빠져있던 그녀의 의식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를 올려다보자 장난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이 레비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선가 했더니... 뭘 다 아는 당연한 사실을 그렇게 어둡게 이야기하냐?"

"에........ 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레비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자 나타는 피식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너의 단점을 전부 감안하고서 너를 선택했다는 소리야. 그러니 그런 걸 핑계로 날 거절할 생각은 하지도 마."

"하, 하지만 전..."

"그리고 인간이 아닌 거로 따지며 나도 마찬가지야."

무언갈 말하려는 레비아의 입 앞에 왼손 검지를 새워 가로막은 나타. 다음 순간 그의 오른팔이 기이하게 뒤틀리더니 그 모습을 완전히 바꿔갔다.

인간의 것이 아닌 새까만 피부와 그 위로 돋아난 검보라색의 비늘. 돋아난 손톱은 맹수의 것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오른팔에 집중한 사이 다른 신체 부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오른쪽 눈이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그 주위로도 비늘이 돋아났고 머리카락은 색이 빠져나가며 일부분을 제외하곤 새하얀 백발로 변했다.

"지금의 난 외형 따윈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본모습을 말하자면 아마 이게 내 본모습이겠지. 어때? 일반인 과는 거리가 멀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형의 팔을 레비아의 눈앞에서 흔드는 나타. 이에 레비아는 얼마 전 김재리에게서 들은 나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의 몸은 전체의 60%에 가까운 부분이 차원종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그 말에 따르면 나타의 새로운 신체는 단순히 건강한 인간의 신체가 아닌 인간과 차원종의 특징이 적절히 뒤섞인 말 그대로 반인반차원종의 육체였다. 다행히 나타 본인의 힘으로 외형을 변화시킬 수 있어서 일상생활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은 물론 평범한 위상능력자도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처음 말한 네가 차원종이라는 이유도 나한테는 거절의 이유가 되지 못해. 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니까.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라? 이런 몸이 돼서 그 여우 여자를 포기하고 너를 고른 건 아니니까."

"읏......!"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당당히 말하는 나타를 바라보며 짧은 신음성을 흘리는 레비아. 그 입에서는 그 이상의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자~그럼 내 고백을 거절할 다른 이유는 더 없는 거냐? 있으면 말해봐 전부 다 반박해 줄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나타에게 레비아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갈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이에 나타는 만족스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물러나더니 가방 속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럼... 더 거절할 이유도 없어 보이니 진지하게 다시 해볼까?"

방금전까지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며 나타는 진지한 태도로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천천히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아......!"

작은 탄성을 내지르는 레비아. 드러난 상자 속에는 아름다운 한 쌍의 반지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은빛 몸체에는 정교한 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용과 늑대가 보석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반지였다. 두 반지의 차이점이라면 박혀있는 보석의 색이 각각 한쪽은 청자색 한쪽은 자주색이라는 정도일까? 그것은 장식품으로서도 예술품으로서도 상당한 가치를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반지였다.

'아... 이건 혹시 나타님이 직접......"

반지에 남아있는 미세한 위상력의 잔재. 이를 통해 그 반지가 나타의 수재라는 것을 춘치챈 레비아는 놀란 눈으로 나타를 바라보았다. 그런 레비아와 눈을 바주 보며 나타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 또한 너 못지않게 수많은 결점을 지닌 불량품이야. 성격 나쁘고 질투심 많고 이기적이지. 거기에 현재 가진 재산도 없고 미래의 계획도 불확실한... 한마디로 최악의 신랑감이지. 어떻게 보면 거부당해도 할 말이 없어."

"......"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게. 네가 나를 선택해 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세계가 적으로 돌아서는 한이 있어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썰어버리고 네 곁으로 돌아오겠어. 널 결코 홀로 남겨두는 일 없이 평생을 너와 함께하며 너만을 바라보겠어.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지."

담담히, 하지만 조금 불안하게, 그렇게 진심을 담아서

"그러니...... 사랑한다 레비아. 나와 결혼해 주겠어?"

나타는 자신의 마음을 레비아에게 전했다.

"읏......! 치사해요......"

이에 레비아는 결국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눈물로 얼룩진 그 얼굴에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밝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도...... 좋아해요. 정말로..... 그 무엇보다 나타님을 좋아해요. 사랑해요."

북받쳐오는 감정 탓에 단순한 말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나타는 이에 만족한 듯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케이스 안에서 자줏빛 보석이 장식된 반지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곤 자신의 왼손 약지에도 남은 반지를 끼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레비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고맙다. 나란 녀석을 받아줘서. 그 선택... 잘했다는 생각은 못 해도 최소한 후회만큼은 하게하지 않겠어."

"저야말로... 저를 선택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어느새 석양이 완전히 내려앉아 온통 붉게 물든 세상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듯이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딸칵------!!

"......?"

침묵 속에서 마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직후 레비아는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의문을 느끼며 나타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어? 어라?"

그러자 항상 거기에 있어야 할 초커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모로 당황한 레비아가 주변을 둘러보자 나타의 손가락 끄테 얼려잇던 자신의 초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건 이제 필요 없지?"

"나, 나타님 어떻게...?"

장난스럽게 초커를 돌리는 나타를 레비아는 믿을 수 없다느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초커는 일반적인 방법은 물론 자폭을 통해 사용자의 목 위를 날려버리지 않는 한 현대의 기술로는 벗길 수 없다는 게 유니온 기술부의 결론이었다. 그런 물건을 너무도 쉽게 벗긴 나타는 별거 아니란 듯이 자신의 목에 걸린 초커에도 손을 뻗었다.

찰카닥---!!

그러자 방금과 마찬가지로 장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초커가 풀어졌다.

"아직 수술이 끄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지루하던 차에 이 개목걸이에 여러가지 실험을 해봤지. 그러다가 제 3위상력을 이 개목걸이의 중심핵이 되는 부분에 일정하게 흘려주면 기능이 망가지면서 벗겨지더라고?"

흘러내리던 초커를 잡아낸 나타는 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별짓을 다 해도 안 벗겨지던 게 이렇게 쉽게 벗겨지다니 여시 어이가 없군. 뭐 그것도 이젠 상관없지만----!!!!"

그러고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초커를 바다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앗-......!"

레비아가 뭔갈 하기도 전에 던져진 초커는 순식간에 시야의 한계까지 날아갔고 곧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저런 개목걸이에 의지하지 않아도 네 힘 정도는 제어할 수 있잖아? 계속 끼고 있어봤자 답답하고 기분만 나빠지고. 안 그래?"

"그건..... 그렇죠."

"완전한 자유도 얻었고 새로운 계획도 세웠으니 그걸 기념하는 의미에서 확실히 처분한 거지."

나타의 설명을 들은 레비아는 이내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맘ㄴ 동시에 조금 허전하다고 생각하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다른 곳보다 확연히 밝은 피부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뭔가 계속 목에 차고 있었던 만큼 허전하다고 할까..."

"뭐 그렇긴 하네. 쉬원섭섭한 기분이군."

레비아의 말에 동의하든 나타도 초커가 사라진 자신의 목을 긁적였다. 레비아보다 더 차이가 심한 피부톤이 얼마나 긴 시간을 초커를 차고서 보내왔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에 또 기분이 울적해진 레비아. 이를 눈치챈 나타는 쓰게 웃으며 다시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뭐 나중에 목에 걸칠만한 거라도 사러 나가든지 하자고."

"...네. 꼭 같이 가요."

자신을 위로하려는 나타의 마음을 눈치챈 레비아도 이내 기분을 풀고 그를 마주 안았다.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끌어안는 사이 붉었던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었고 희미하게 별과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슬슬 돌아갈 기차를 타러 가야 하려나?"

레비아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단말기로 시간을 확인하는 나타. 그 말을 들은 레비아도 팔을 풀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그 얼굴엔 아쉬움이 살짝 묻어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감정이었지만 나타는 이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러고 보니 레비아. 알고 있냐? 키스는 하는 부위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뀐다는 사실 말이야."

직후 나타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레비아에게 물었다. 이에 레비아는 양 볼과 함께 조금 전 나타가 입을 맞춘 왼쪽 손목과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런가요?"

"그래. 일단 기본적으로 머리카락은 사모, 이마는 우정, 귀는 유혹, 볼은 친애."

새빨개진 레비아를 놀리듯 나타는 말을 하면서 설명하는 부위에 손을 뻗어 스치듯이 쓸고 지나갔다.

"목은 집착, 팔은 연모, 손목은 욕망, 그리고 손바닥은 간원."

조금 전 자신이 입을 맞춘 왼손도 살며시 쓰다듬은 나타는 순간 그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다시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자~ 그럼 여기서 깜짝 문제다. 과연 키스 시 사랑을 뜻하는 신체 부위는 어딜까? 힌트는 가장 일반적인 곳. 자~ 맞춰보라고?"

"그, 그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진 레비아를 내려다보며 나타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내가 몸소 알려주겠는데...... 어때?"

"읏......!!"

짖궂은 나타의 질문에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레비아. 동시에 간신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주세요..."

"음? 뭐라고?"

"알려...주세요...!"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나타에게 다시 한번 작게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레비아. 이에 나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두 눈을 꼭 감은 그 얼굴은 부끄러움과 약간의 수치로 완전히 물들어있었고 나타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천천히 그 귓가에 속삭였다.

"정답은...... 입술이다."

다음 순간 레비아의 작은 입술에 부드럽게 자신의 겹쳤다. 입술이 겹친 순간 몸을 떠는 레비아. 단순한 입맞춤이었지만 순수하고 무지했던 그녀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자극이 전신을 훑었다. 잠깐 그 상태를 유지하던 나타는 이내 천천히 입을 때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나타를 마주보고 있던 레비아의 눈은 반쯤 감긴 채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이거 소설에 나온 대로 혀까지 집어넣었다간 기절했겠군.'

머릿속으로 불순한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린 나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럼 가볼까?"

"...네."

아직 멍한 레비아의 상태를 보며 나타는 실소를 터뜨리며 유쾌해진 마음길로 귀갓길에 올랐다.

---------------------------------------------------------------------------------------------------------------

끝!! 즐감하셨나요? 나타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문제들(복수, 죄책감, 행복, 자유, 수명 등등등) 전부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고 거기에 레비아랑 이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도 끝이 보이네요. 2화 정도 결혼식 에피소드가 올라가고 에필로그 몇편정도 추가하면 끝날 것 같네요. 그럼 다음주에 다시 돌아올게요~

2024-10-24 23:35:0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