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빛은 뻗어나갈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설원 2019-10-13 11

※ 짧음주의

※ 부산 챕터2 스토리 초반부 참고

 

 

 

 

 

 -이세하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할 때, 가장 하기 싫은 것이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 나이가 되었으면 새로운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 것보다는 자기가 알고 지내던 사람과 친구로 계속 지내고 싶어 하는 안정적인 길을 택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런 자기소개 시간이 나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나보다.

 

 그리고 이미 나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저 아이인가 봐, 라고 말을 수군거리는 듯 한 눈빛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침착해지기 위해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진다. 이 순간만 잘 버티면 다음 부분부터는 무난히 흘러갈 것이다.

 

 -... ...

 

 그런데 자기가 학기 초에 모르는 30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어떤 자기소개를 했는지 전부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는 할까? 나 역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좀 재수 없었던 발언인 거 같았다. 이전부터, 그리고 매해마다 비슷한 말을 했었기에. 위상력이라는 힘을 가진,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어머니를 둔 부럽기 그지없는 인생을 사는 어느 남학생의 자기소개 따위를 누가 또렷하게 기억할까.

 

 자기소개가 끝난 뒤였다. 내 주변으로 몇 명이 모여들었다.

 

 -이세하?

 -...

 

 이렇게 학기 초, 나에게 다가오는 인물들은 나에게 순수한 호의를 건네지 않는다. 이번에도 당연했지만, 나에게 온 아이들의 눈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너네 엄마가 그 유명한 알파퀸이라며?

 

 익숙한 빈정거림.

 

 -그리고 너도 위상능력자라며? 참으로 부러운 인생이네.

 

 삐죽 튀어나온 조롱, 경계심.

 

 -그러게 말이야...그런 녀석이 여기를 왜 다니는지...

 -...

 

 입씨름하기도 지친 상황이다. 여기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저들은 나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정답이 없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반응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반응이 없는 나도 그 아이들 눈에는 마음에 차지 않은 거 같았지만, 더 할 말도 없는지 이내 발자국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일단 오늘 겪어야 할 고비 하나는 무난하게 넘긴 거 같았기에.

 

 어찌 됐든 이런 또래 아이들은 물론, 그런 시선을 가진 어른들을 적지 않게 보았기에 나는 나한테 다른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만남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왔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 아이가 이렇게 물어보았다.

 

 -너, 혹시 운동부에 관심 없어?

 -...?

 -괜찮으면 우리 검도부에 들어올래?!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검도부 스카우트 제의를 하던 사람이 바로 서유리였다.

 

 

 

* * *

 

 

 

 그 후로 서유리는 하루에 한번은 나에게 검도부에 들어오지 않겠냐며 권유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검도부를 제의하기에 나는 처음에는 서유리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내가 위상능력자라는 걸 알면, 저런 제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일주일 지속되자, 나는 내 쪽에서 먼저 밝혔다. 나는 위상능력자, 라고. 그 때의 기분은 좀 최악이었다. 나는 내가 위상능력자라고 밝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감추고 싶어 했고, 다른 사람들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걸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복합적인 것들 때문에 거의 고함을 치듯이 말했다.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들은 서유리가 여느 사람들처럼 바로 등을 돌리고 갈 줄 알았다.

 

 내 대답에 서유리는 일단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 왜 말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직후, 서유리가 이런 말을 했으니 그런 점은 확인사살이었다.

 

 -알고 있는데, 그걸 왜 굳이 지금 말하는 거야?

 -알고 있다고? 내가 위상능력자인거?

 -당연히 알고 있었지. 설마, 너 내가 그 정도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오히려 서유리는 앞부분보다는 그 뒷부분 – 억측 - 에 대해 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니, 난 네가 날 위상능력자인지 몰라서 그런 건줄 알았지. 잠깐, 그럼 위상능력자에게 검도부 제의를 한 거야?!

 -제의할 수도 있지. 너 슬쩍 봤는데 검도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런 좋은 인재를 썩히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고!

 -...


 인재...묘한 말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위상력이 각성된 이후에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말은 많이 들어봤다. 위상력이 타고났다, 위상력 잠재력이 역대 최고치이다, 등등...하지만 그 말들은 서유리가 말한 말보다 들어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인재든 뭐든! 어차피 위상능력자면 대회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꼭 검도를 배운다고 대회에 나가**다는 법은 없어.

 -...

 -취미 생활...응, 이게 가장 적절한 거 같다. 몸을 움직이는 취미 생활 하나쯤은 가져보는 것도 좋잖아? 앉아서 게임만 하는 것보단.

 

 운동을 위상능력자에게 취미 생활로 권유해보는 것도 이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위상능력자는 일반인보다 운동 신경이 훨씬 뛰어나다. 그렇기에 날아다닌다, 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실제로 날아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체육 관련 대회에 위상능력자 출신의 운동선수는 없다. 일반인과 위상능력자가 같은 출발선에서 정정당당하게 겨룰 수 없으니까.

 

 나는 그 때 여러 부분에서 꽤 좋은 의미의 신선한 충격을 많이 받아서 이상한 것에 괜히 떼도 쓰고 당황했었다. 대표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게, 게임만 하는 거 아니거든?!

 -내가 볼 때마다 게임만 하던데?

 -아니라니까!

 -과연...정말로 그럴까?

 

 서유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맑은 흑색 눈동자를 보자니 결코 이런 변명만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서유리는, 말을 하는 이로 하여금 솔직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순간만큼은 거기에만 집중할 수 있잖아. 그래서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 점 때문에 하는 것뿐이야. 절대 다른 뜻은 없어.

 -주변 소리?

 -위상능력자가 일반인 학교에 다니는 거, 고운 시선일리 없잖아.

 

 이렇게 깊은 이야기, 석봉이한테까지 한 적은 없었다. 석봉이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크게 작용했다. 이런 비슷한 이유로 엄마한테는 당연히 학교 관련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난 적어도 이때까지만 해도 서유리를 조금은 말을 터놓기 편한 타인으로 생각했던 거 같았다.

 

 서유리가 미소 지었다. 호의에 가까운 순한 미소다. 서유리는 이렇게 말했다.

 

 -난 세하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건 알 수 있을 거 같아. 나도 그래. 검을 잡고 서 있으면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오롯이 거기에 집중하게 돼. 그리고 난 그 순간을 너무도 좋아해.

 -...

 -어, 이상하다? 나 이런 거 다른 사람한테 말 잘 안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너, 다른 사람하고는 이런 말 잘 안 해?

 

 내가 알고 있던 서유리는 늘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 쌓여있는, 돋보이는 존재. 그래서 결코 이렇게 접점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존재. 일반인과 위상능력자, 그냥 이거 하나만으로도 나와 서유리의 벽을 높고 가파르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서유리의 대답은 의외였다.

 

 -잘 안 해. 검도를 하고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는 걸? 그리고 아이들은 검도 이야기 별로 좋아하지 않아. 왠지 고리타분하잖아?

 -...멋있기만 한 걸.

 -응?

 

 순간 본심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우연히 본 검도부 연습 현장은 발걸음을 한동안 떨어지지 않게 했다. 곁눈질로 본 것이 전부지만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 검도는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새었는지 몰랐지만, 서유리는 다시 한 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 고로 세하도 한 번 검도 해** 않을래? 차원종을 상대할 때, 검도에서 배운 기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아, 이 말도 아직 안 했구나.

 -응? 무슨 말?

 -나 정식 클로저 아니야. 고로 차원종과 싸울 일 없어.

 

 이때의 나는 클로저가 아니었다. 그냥 위상력 하나 가지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 * *

 

 

 

 한창 게임을 하는데, 비닐 재질의 무언가가 뺨에 닿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자연스레 나에게 빵 봉지를 건네는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서유리였다. 손에는 매점에서 파는 크림빵이 두 개 들려 있었다.

 

 -짠! 오늘은 크림빵이다!

 

 나는 익숙하게 빵을 받아, 포장지를 뜯었다. 서유리도 익숙하게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같이 빵을 뜯었다.

 

 -오늘은 네가 쏘는 거야? 너, 검도부 연습은?

 -오늘은 쉬는 날! 땡땡이 아니니까 걱정 마!

 

 걱정하지 말라고 눈앞에 검지를 흔들거리는 그 뿌듯한 모습이 그냥 웃겨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방과 후 학교에 둘이 남아서 간식을 오물거리는데 서유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세하는 그래서 검도 안 배울 거야?

 -...그 검도부 스카우트 제의는 아직도 유효했던 거야?

 

 깜짝 놀라서 먹던 빵이 목에 걸릴 뻔 했다. 그래도 유연하게 상황을 넘긴 내 자신이 참 자랑스러웠다.

 

 어느 새 옆에 있는 사과 주스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 제의는 고맙지만 위상능력자를 상대할만한 멤버는 거기에 없지 않아?

 -나 있잖아. 왜 나는 쏙 빼놓고 말해?

 -네 검도 실력이 엄청나다는 건 알지만, 나, 이래 뵈도 위상능력자라고?

 -걱정 마, 위상능력자라도 검도 초심자에게 질 일은 없을 테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다칠 수도 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최대한 의식해서 위상력을 검에 안 실어, 검도를 하는 건 가능한 일이었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말도 있었다. 나의 질문에 서유리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장비를 잘 착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장비가 제대로 막아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세하 넌 가만히 보면 왜 최악의 최악만 생각해? 조금 쉽게 생각하면 안 돼?

 -그게 안 되니까 이런 말 하는 거야!

 

 학기 초, 서유리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가끔씩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하는 건 아니고, 이렇게 방과 후 인적이 드문 체육관 앞이라든지...뭐, 이런 데에서. 그냥 내가 어디에 있든 서유리가 뿅, 하고 잘 나타났다.

 

 서유리는 어쩜 그렇게 날 잘 찾는지. 참 신기했다.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감정이 격앙되어 눈앞에 있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른 걸 깨달았다. 난 바로 내 잘못을 수긍하고, 사과했다.

 

 -...미안.

 -미안하다니, 그런 말 들을 것까진 아닌 거 같은데...세하야.

 -...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

 

 무섭다니. 또 하나 안 사실. 서유리는 생각보다 예리한 사람이었다. 공부 머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서유리는 가끔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이렇게 사람의 뒤통수를 한 대 시원하게 갈겼다. 난 또 서유리에게 한 방 먹은 걸 깨달으며 말했다.

 

 -...네 눈에는 내가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여?

 -아니, 그런 표현이 아니라...!

 -맞을 수도 있지. 예전에 위상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거든.

 

 이런 거북한 이야기, 숨기고 싶은 비밀, 친한지 안 친한지 애매한 아이에게,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한테 할 거리가 되는 게 아닌데.

 

 서유리 앞에서는 술술 말하게 된다.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닌데. 너무 참을 수 없어서 살짝 밀었을 뿐인데.

 -...나빴네.

 -그치? 아무리 기분 나빴어도 내가 참아야 했...

 -아니, 세하 네가 안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 애가 더 나빴다고.

 ‘응?’

 

 이런 소리를 들어도 되는 걸까? 난 잠자코 있었다. 서유리는 다 먹은 포장지를 꾸깃꾸깃 소중히 접고 있었다.

 

 -누구나 그런 심한 말 들으면 화 안 날 사람이 있겠어? 물론 그 애가 다친 건 세하의 잘못이긴 하지만.

 -...

 -...하지만 그 때 그 아이는 세하를 화나게 하는 말을 했어. 난 거기에 더 큰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 애초에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세하가 그 아이를...

 -그런 비난은 익숙해...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냥 여기서 그만 하자.

 

 신선함...보다는 다른 간지러운 감정 때문에 대화를 여기서 끊어야 했다. 허나 서유리의 의문은 계속 되었다.

 

 -왜 사람들은 세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거지? 알고 보면 의외로 재밌고, 그렇게 무서운 사람도 아닌데.

 -그럼 한 번 물어봐도 돼?

 -응? 뭘?

 -서유리 네가 보기에는 내가 친구가 될 만한 사람 같아?

 

 이런 거 왜 물어보는지, 참 나도 내가 싫었다. 서유리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금방 답해주었다.

 

 -물론이지!

 -...

 -그래서 세하가 검도를 한다고 하면, 내가 사부가 되어주겠다고 한 건데? 세하는, 착한 아이니까.

 -...

 

 이런 위기가 올 때마다 익숙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아내는 건 익숙한 일이다. 허나 그것이 울분이 아닌, 작은 환호성이었던 적은 없었다.

 

 서유리는 다시 한 번 끈덕지게 권유했다.

 

 -그래서 마침, 오늘 검도부 연습장 비는데, 한 번 가볼래?

 

 한 번 가볼래? 그게 내 안에 새로운 바람을 조금 불어넣어주었다. 내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한 번쯤은...

 

 해볼까? 나의 이런 태도에 서유리는 웃었다.

 

 

 

* * *

 

 

 

 -요즘 우리 아들 기분 좋아 보이는데?

 -그, 그렇게 보여요?

 

 아침 식사를 만드는데 익숙한 백허그를 당했다. 물론 이 집안에는 나와 엄마밖에 없으니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엄마겠지만.

 

 아무튼 엄마의 저런 반응은 나를 당혹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니. 뭐, 기분 좋을 만한 일은...있었던 거 같았다.

 

 슬그머니 지어지는 미소를 미처 지우지 못해서 그 상태 그대로 엄마한테 들켜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농담조로 물어보셨다.

 

 -여자 친구라도 생겼어?

 -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그래도 다행이네. 우리 아들이 행복하다면 이 엄마도 참 행복해.

 

 이렇게 간질거리는 상황에 오랫동안 버틸 자신이 없어서 나는 도망치기 위해 서둘러 책가방을 맸다.

 

 -그럼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아들~ 그럼 오늘 저녁도 고기반찬으로 부탁해~

 -그 고기만 먹는 습관 좀 고치시라니까요...

 

 엄마가 뒤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듣지 못했다. 나는 평소보다 한가한 등굣길에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서유리는 검도 대회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오늘 학교 가도 서유리는 없다는 뜻. 꼭 자신이 우승할 거라며 아주 자신만만했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뭐, 내가 보기에도 우승할 거 같았다. 서유리의 실력은 그야말로 ‘재능’ 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다. 내가 정말로 가지고 싶어 했던 쪽의 재능.

 

 나는 그런 서유리를 부러워하고 또...

 

 이런 낙천적인 생각은 그 날 점심 무렵에 깨졌다. 서유리가, 대회에서 실격패를 당했다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서유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 라며 나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도 다같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 소란은 누군가의 이 한 마디에 정리되었다.

 

 -서유리 걔, 위상능력자였다며?

 

 그 날 방과 후, 아이들이 다 하교할 때까지 기다린 나는 익숙하게 검도부 연습실로 향했다. 결국 오늘 학교에 나타나지 않은 서유리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이었다. 난 정답을 잘 못 고르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정답이었다.

 

 연습장 한 가운데에서 서유리는 정좌를 한 채 있었다. 검도복을 입은 채로.

 

 -...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언제나처럼 서유리였다.

 

 -나, 실격이래.

 -...

 -그런데, 아예 검도도 다시 할 수 없대.

 

 아니, 그런 말은 그렇게 웃으면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건 서유리 쪽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종국에, 서유리는 울고 있었다.

 

 -세하야, 이세하.

 -...

 -나, 어찌 하면 좋을까?

 

 그 때의 나는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없었던 힘이 없는, 위상력만 가지고 있던 고등학생이었다.

 

 

 

* * *

 

 

 

 “세하야!”

 “어...?”

 

 잠시 멍을 때리고 있는데 나를 부른 소리에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벤치에 앉아 있어서 비슷했던 눈높이가 내가 대답과 함께 일어서버려서 훌쩍 커버렸다. 문득 서유리의 얼굴이 나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니 신기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건 저쪽도 똑같이 인지했다. 서유리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요 녀석, 이세하...언제 이렇게 키가 컸어?”

 “그러게, 어째 쑥쑥 크네.”

 “첨에 봤을 때는 완전 쪼그맸는데.”

 “그렇게 쪼그맣지 않았어. 나름 평균 키였다고.”

 

 하지만 좀 짧아진 밑단을 보니 걱정도 같이 들었다.

 

 “이러다가 또 요원복 주문해야할지도 몰라. 어째서 나만 계속 추가 주문만 쌓이냐...”

 “그만큼 잘 크는 중이라는 거지. 요 녀석!”

 “아야, 그렇게 잡아당기지 마...”

 

 서유리는 날 잡아당기다 말고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익숙한 디자인의 크림빵이다. 학교 내 매점에서 팔던 크림빵과 똑같은 제품이었다.

 

 “자!”

 “뭐야, 유리 네가 쏘는 거야?”

 “응, 편의점 가보는데 똑같은 크림빵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샀어.”

 “고맙다, 안 그래도 좀 당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헷, 내가 이런 건 아주 잘 알지.”

 

 으쓱하는 서유리를 옆에 두고 빵을 얼른 베어먹었다. 그 날과 비슷한 맛이 났다. 당연하겠지, 같은 크림빵이니까.

 

 한밤중에 때도 아닌 간식을 먹고 나니, 좀 옛날 생각이 들었다. 뭐, 1년도 지나지 않은 일 가지고 그렇게 칭하는 것이 약간은 이상했지만, 우리에게는 까마득하게 멀었던 시절 이야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

 “응?”

 “청소 시간에 빗자루 들고 필살기라면서 나한테 보여주었던 거.”

 “아, 그거...?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는 왜 꺼내!”

 “부끄럽다고 사람 등을 그리 내려칠 건 없잖아...”

 

 쓰라린 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투덜거렸다.

 

 “그 때도 그 필살기 이름마다 네 이름 붙였던 거 같은데...”

 “응?!”

 “아까 작전 구역에서 봤는데...그 버릇, 여전하구나 싶어서.”

 “아니 그러니까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왜 계속 꺼내!”

 

 친구에게 등짝 스매싱을 두 번이나 맞았다. 심지어 손이 매운 친구에게. 과장해서 말해보면 눈물이 찔끔 났다.

 

 “그게 뭐가 부끄러운 일이야, 난 그렇지 않은데.”

 “어...?”

 “그 때 나한테 먼저 말 걸어준 것도, 간식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그런 것들이 지금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것도 아니잖아...”

 “세하 네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지!”

 

 또 등짝을 맞을 거 같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서유리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짬나면 학교 이야기 다시 하자고 했었지?”

 “응? 어, 어...그랬지.”

 

 다른 화제를 넌지시 건네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이다음에 펼쳐질 일이 무엇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나부터 시작해야겠다. 정미 말이야...”

 “그래, 그래...”

 

 문득 떠오른다. 비슷한 크림빵을 먹었던 날, 난 처음으로 장비를 착용하고 죽도를 손에 잡았다. 그 때는 내가 검 부류의 무기를 쓸지는 몰랐고, 애초에 클로저 일을 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날 유리의 말대로 검을 쥔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뜻밖의 곳에서 찾은 기분 좋은 고요함이었다.

2024-10-24 23:27:5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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