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하피의 파랑새

바람성운 2019-07-10 1

태그: #부산 #해운대




화창한 햇빛이 푸른 하늘을 아우르며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어느 여름날. 부산 해운대.


“후우...사람이 많은 것만 빼면, 정말 좋은 해변이네요. 쪼옥.”


벌처스의 늑대개 팀 소속 클로저인 하피는, 커다란 파라솔 밑에서 선베드에 드러누워 트로피컬 주스를 마시며 기분 좋은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여유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트레이너?”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하피.”


하피의 질문에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늑대개 팀의 담당 요원인 트레이너였다. 그는 파라솔 막대기를 사이에 두고 하피의 옆쪽에 배치된 선베드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나, 그렇게 보였나요? 후후, 사실 나쁜 편은 아니죠. 우수한 후배랑 귀여운 임금님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태스크포스 팀을 말하는 건가. 처음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들었다만.”

 
“네 뭐. 꼬박꼬박 바른 말만 줄줄 늘어놓는 후배나, 까다로운 꼬마 임금님을 모시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이렇게 같이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제법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만약 우리 늑대개 팀끼리 왔다면 이런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을 거잖아요?”

 
하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지평선까지 바다가 펼쳐진 해운대의 풍경을 바라봤다. 모래사장에 비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긴 했지만, 곧 시야가 돌아오자 여름철을 맞아 해운대를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꺄하하! 여기는 세트의 부하가 정말 많다! 다들 세트의 부하가 될 거다!”

 
“세트?! 아무나 붙잡고 부하라고 하지 말라고 했죠?! 지금 사과하러 다니느라 얼마나...자, 잠깐! 거기 서세요!”


일반인을 부하로 여기는, 임금님 놀이에 빠진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는 유니온의 전략병기이자 사냥터지기 팀의 클로저인 세트 세크메트다. 덧붙여 세트 하피와 퀸 오브 하트라는 태스크포스 팀을 짠 클로저다. 그리고 그런 세트를 말리며 사람들에게 사과하러 돌아다니는 검은 머리의 미녀는 세트의 선생님이자 같은 사냥터지기 팀원인 파이 윈체스터. 그녀는 휴가를 나와 수영복 차림인 상태인데도, 특이하게도 본인의 무기인 사검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세하, 너는 기껏 부산까지 와서 꼭 게임을 해야겠니?”


“뭐, 뭐가 어때서! 애초에 난 오고 싶어하지도 않았다고!”


“그래, 세하야. 이왕 해운대까지 왔잖니. 게임은 다른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바다에서 노는게 어때? 모처럼의 휴가잖아.”

 
“윽...유정 누나까지...”

 
트레이너의 옆에 있는 파라솔에서, 세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하피와 퀸 오브 하트 팀을 짠 검은양 팀의 클로저 이슬비가 한 소년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검은양 팀의 담당 요원인 김유정 또한 거들고 있었고 말이다.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던 그 소년의 이름은 이세하. 차원 전쟁의 영웅인 알파 퀸의 아들인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검은양 팀에 소속되어 클로저 활동을 하고 있다.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주변에 이렇게 상당한 수준의 미녀, 미소녀들이 있음에도 바다에서까지 게임을 하는 모습은, 완전히 둔감계 남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나타와는 다르게 이성에 관심이 없는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하피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같은 검은양 팀의 서유리가 나타나 “세하야 수영하자~!!”라면서 달라붙으니 매우 얼굴이 빨개져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서유리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이 크게 한 몫 한 것 같았다.


“하하! 세하 동생은 부럽구만. 바다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니, 완전 청춘이잖아.”


검은양 일행을 보고 있던 하피는,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야에는 떠올리던 사람은 없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만이 눈에 밟힐 뿐이었다.


“어딜 보는 거야. 이쪽이라고, 이쪽.”


잠시 의아해하던 하피는, 다시 한 번 들린 목소리를 따라 살짝 아래를 내려봤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채 모래 속에 파묻힌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은양 팀의 팀원이자, 최연소 차원 전쟁 참가자인 베테랑 요원 제이였다. 그의 바로 옆에서는 늑대개 팀원인 레비아와 검은양의 미스틸테인이 제이를 파묻은 모래를 토닥거리며 형태를 잡고 있었다. 즉, 인간 모래성이다.


“흐응, 그러는 제이 씨도 여자아이를 둘이나 끼고 놀고 계시는군요?”


“어이, 꼬마에게 욕정할 정도로 **는 아니라고. 그리고 테인이는 남자야!”

 
“후훗,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아니아니,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말이지.”


“아, 그러고보니 트레이너, 티나 씨는 어디 갔죠? 아까부터 안보이는데요?”


“............”
 

하피의 질문에 트레이너는 슬쩍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물끄러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곳에는, 파란색의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하나 놓여 있었다.


“.........거짓말이죠? 아무리 티나 씨라고 해도...”


하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트레이너는 그저 조용히 아이스 박스의 뚜껑을 살짝 열었다. 그 살짝의 틈새에서, 하피는 곤히 잠들어있는 늑대개 대원인 로봇, Tactical Interface 01 Non-standard Android, 즉 티나를 볼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냉장고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서유리가 말렸다. 절충안으로 아이스박스에 들어간거지.”


담담히 대답하는 트레이너. 사실 트레이너가 선베드에 누워 눈을 감고 쉬고 있음에도 조금도 잠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무방비한 티나를 지키기 위해서(도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은 하피는 더이상의 말은 삼키고 얌전히 해변을 다시 바라봤다.

 
“하하, 좋군! 미녀들과 함께 하는 여름의 해변은 최고다!”

 
사냥터지기 팀 소속의 사내, 볼프강 슈나이더는 어느새 외모로 여자들을 꾀어 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세트를 쫓아다니던 파이는 그것을 보고 "선배는 파렴치한 난봉꾼 이었군요..."라는 말을 흘렸으나, 볼프강은 완고히 흘려듣고 여자들과 함께 유유히 걸어갔다.

 
사실, 부산에 함께 온 검은양, 늑대개, 사냥터지기 팀에서 외모로 어디 가서 꿇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각자 뭇 여성과 남성들의 심장을 흔들 만한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실제로 하피에게도 대략 한 시간에 10번도 넘게 남성들이 헌팅을 위해 접근했었고, 혼자 있던 하피가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도 그게 귀찮아서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새 한 곳에 서로 모여있던 것이다.

 
“싸부~! 바이올렛~! 세하 데려왔어어~!”

 
서유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들뜬 듯, 이세하의 팔을 잡고 바닷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 탓에 흔들리는 가슴에 뭇 남성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덤이다. 그 모습을 본 이슬비와, 사냥터지기의 루나가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패배감에 젖은 시선을 보낸 것 또한 덤이다. 루나 아이기스는 “와, 완전무결! 난 완전무결하니까! 내 몸 또한 완...전무겨얼...”이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같은 사냥터지기 팀의 소마는 그런 루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늑대개 팀원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더니, 사실은 검은양들과 어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바이올렛과 나타는 물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세하와 서유리를 기다린 듯 보였다. 여담이지만, 하이드는 바이올렛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들고 다니다가 익명의 여성에게 신고당해 안전요원이 신원확인을 위해 데려갔다.

 
문득, 하피는 꽤나 어두웠던 늑대개 팀의 예전 분위기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늑대개 팀은 과거 범죄자였던 이들의 집단. 초창기 분위기는 테러조직을 방불케 했었다. 하지만, 여러 이들과 조금씩 관계를 맺고, 팀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늑대개 원년 멤버들이 보면 놀라 까무러칠 만큼의 유대감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그 때의 날카로움이 조금 줄어들었으며, 이렇게 순수히 휴가를 즐길 정도의 여유를 얻었다. 그 사실이, 팀원들의 보호자격의 인물이었던 하피에게는 매우 흐뭇하게 다가왔다.

 
하피는 온 몸의 힘을 빼고 선베드에 몸을 맡기고는, 카드 한 장을 꺼내들었다. 하피가 애용하는 트릭 카드. 그 중 조커 카드였다. 카드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파랑 새가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이렇게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중얼거린 하피는, 슬쩍 자조 섞인 쓴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되는 바람인 것은 알고 있다. 애초에 자신들은 클로저.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차원종을 처치하고, 차원문을 닫아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휴가를 즐기고 있지만, 긴급 호출을 받거나, 당장 이 해운대에 차원종이 쏟아지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휴가는 끝나고, 바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다.


“후후...그녀의 속박에서 벗어난 걸로 만족해야 하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네요.”


스스로 그녀라는 말을 입에 담자, 하피는 그녀에게 붙잡혔던 시절의 나날들이 떠올랐다. 쓰레기를 주워 먹으라면 주워 먹었고, 사람을 죽이라면 죽여버렸던, 그녀의 명령이라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했던, 오로지 작은 자유만을 갈망했던, 무기력했던 그 시절을......

 
그에 비하면 지금은, 그녀, 홍시영이 본다면 절규를 해버릴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신뢰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며 말이다.


하피는 살짝 위상력을 담아 바람을 일으키며 카드를 잡은 손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카드는 가볍게 날아올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치 자유를 찾아 떠나는 파랑 새처럼, 높이, 더 높이............

 
이 평화가 언제까지고 지속되기를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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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그들의 여름 휴가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

 
 

생각보다, 일찍 끝맺게 되었다.

 

 
“...하, 하르파스...?”

 
“거짓말! 말도 안 되잖아! 하르파스는 오염지옥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세하와 서유리가 크게 소리쳤다. 플레인게이트:심층에서 벌어진 차원종들의 대오염작전에 대항해 벌인 유니온의 대정화작전에 참가했었던 15명의 클로저들은, 거기에서 싸웠던 괴조 하르파스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압감이, 가짜가 아닌 진짜 하르파스의 것이라는 것 또한, 모두 느끼고 있었다.

 
허나, 절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다에서, 육지에서, 하늘에서, 총 3개의 차원문이 더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차원문 넘어로부터 나온 것은...


“틴달로스! 니토크리스! 요, 요드?! 오염지옥의 차원종이, 여긴 왜...?! 아니, 어, 어떻게...?!”


이슬비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클로저, 요원, 민간인,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닷가의 상공을 쳐다봤다. 성수기 해운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적이 바닷가를 감쌌다.


1초, 2초, 3초.


대략 3초쯤 흘렀을까. 이윽고, 해변 어딘가에서 괴성이 퍼지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아악!!”


“차, 차원종이다!!! 누가 클로저 좀 불러!!”

 
평화롭던 해운대는 어느새 혼돈의 도가니가 되어있었다. 목숨의 위협에 이성을 잃은 민간인들의 폭주는,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있던 해변에 최악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서로가 도망치는데 급급하여, 타인을 밟으며 정신없이 해변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고기, 고기, 고기!”

-“오염은 시작되었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주를 허물고 삼켜서...내가 곧 우주가 되리라.”


“김유정 요원. 앨리스 요원과 함께 민간인을 대피시키시오.”


“트,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는 침착하게, 아니 냉철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아이스박스의 뚜껑을 열며, 뒤에 두었던 커다란 짐을 신속하게 풀었다.


-우르르르


그러자, 케이스에서 많은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총, 카타나, 건블레이드, 단검, 대검, 완드, 창, 부트 등등.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원들의 장비들이었다. 사냥터지기 팀원들은 이미 담당요원 앨리스가 챙겨주거나, 이미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제이는 주머니에서 너클을 꺼내 장착했고, 눈을 부비며 아이스박스에서 나온 티나는 허수공간에서 라이플을 꺼냈다.


숙련된 클로저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옷은 수영복 차림 그대로였으나, 각자의 무기를 들며 전투태세를 빠르게 갖췄다. 하피 또한 부트를 장착하며, 위상력을 끌어올렸다. 미약한 바람이 그녀를 감쌌다.


바람에 의해 나풀나풀 날리던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하피는 살며시 트레이너를 돌아봤다. 비단 하피 뿐만이 아니었다. 나타, 레비아, 티나, 바이올렛. 다른 늑대개 팀원들 또한 마찬가지로 트레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그에 답하듯, 트레이너는 나직이 읇조렸다.


“......준비는 끝났나보군. 개가 아닌 늑대의 이빨을 보여주는 거다.”


-팟!

-투다다다다!

-우우웅!

 
트레이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늑대들은, 아니, 클로저들은 오염된 위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재앙을 흩뿌리는 차원종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아, 한 사람은 빼고.


“어머, 어딜 가는 거죠, 하피?”


우뚝. 막 날아오르려던 하피의 몸이 얼음에 언 것 마냥 멈춰버렸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굳은 얼굴로, 하피는 거짓말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봐서는 안되는 그 사람을, 보게 되어버렸다.

 
존재할 리가 없는 그녀가, 존재한다.


이윽고, 하피의 새파랗게 변한 입술이 움직였다.

 
“...홍시영...씨...?”


급속히 말라붙은 듯한 하피의 입에서는 그저 갈라진 목소리만 새어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마음이 경종을 울려댔지만, 기어코 하피는 뒤돌아보고 말았다. 그녀, 홍시영이 있는 배후를 말이다.

 
“후훗,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요? 아, 죽기 전에 당신따위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것 때문인가요? 저런, 마음이 너무 여린 것 아닌가요?”


하피의 눈동자가 시종일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G타워에서 헤카톤케일 웨폰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악몽과도 같은 광녀, 홍시영 그 자체였다. 그녀의 손과 발이 되었던 하피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진짜 홍시영이라는 것을. 몽환세계에서 보았던, 자신의 사념속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다, 당신이, 왜, 아, 아니, 어, 어떻게, 여기 있는거죠? 당신은 분명, G타워에서...”
 

“아아, 확실히 죽었죠. 죽었고 말고요. 당신이 죽음을 확인했던 그 사람은, 분명 저에요."
 

“그럼 당신이 어째서 살아있는 거냐고요!”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이 몰아붙여진 하피는 침착함을 잃고 무심코 소리질렀다. 그러나 반대로 홍시영은 여유롭게 미소짓고는, 이윽고 광기에 찬 얼굴로 표정을 바꾸며 웃어젖혔다.

 
“꺄하하하! 하피? 정말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요? 당신 때문이잖아요, 당신! 저는 당신을 갖기 위해 돌아왔다고요! 이전에는 포기해야만 했던 당신을! 더욱 강한 힘을 갖고서!!”

 
“뭐, 뭐라고요? 설마 저 오염위상의 존재들을, 당신이 데려온 건가요?!”


“후후! 아하하하! 하피, 저는 당신이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스럽다구요, 당신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어요. 겨우 오염 위상의 차원종들 따위로 당신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질 않았답니다!”

 
** 듯이 웃는 홍시영의 핀트가 어긋난 듯한 대답에 하피는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조금 전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낀 하피는 즉시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이세하! 너무 들어가지 마! 유리랑 포지션을 나눠가면서 공격해!”


“아, 알고 있다고! 앗! 아저씨!”


“어이, 걱정 말라고 동생! 이정도는 끄떡 없으니까! 윽! 쿨럭! 비, 비타민!”


-투쾅! 투쾅!

 
“큭! 빈틈이 너무 없잖아!”


“나타! 너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너무 돌격하지 마라!”


“꺄, 꺄아앗!”
 

“레비아!”


-투다다다다!

-쾅! 쿠우우웅!


“루나, 막아줘!”

 
“큭, 반격을, 못하겠어...!”

 
“하아아아아!!!”


대한민국의 피서를 책임지던 해운대는 이미 명소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 오염된 위상력을 흩뿌리고 있었고, 클로저들은 그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피만 제외하고서 말이다.


특히나 늑대개 대원들은 홍시영을 보고 반응할 법도 하건만, 그들은 오히려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피만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하피는 돌연 수치심이 들기 시작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보니, 스스로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한 번 위상력을 끌어올렸다. 당장은 홍시영을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피?”

턱.

 
“어딜.”

 
철그럭.

 
“가시는 거죠?”

 
철컥.

 

“거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요.”

 
홍시영의 서슬 퍼런 호령과도 같은 언령이, 하피의 발을 묶었다. 하피가 움직이지 못한 것에는, 그 어떤 물리적인 구속도 없었다. 아까와 같이 놀라움에 의한 것도 아니다. 당황도 아니다. 그저, 그저 그것은, 단순한 ‘공포’요, 하피에게 새겨진 ‘무기력함’이었다.


일찍이 홍시영이 하피를 구속하는데 사용했던, 물리적인 행위를 제외하고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하피에게 유일하게 유효한 제어수단. 홍시영은 그것을 극대화하여 꺼낸 것이다. 말로만으로 사슬에 얽매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하피를 길들였던 홍시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명령’이다.

 
“가지, 않을 거죠?”

 
문득 돌아온 여유로운 목소리에, 하피는 식은땀만을 흘릴 뿐, 고개를 끄덕이지도, 다만 한 발자국을 움직이도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그저 시야 너머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를 어이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하피에게 홍시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굳어버린 하피의 뒤에서 그녀를 천천히 껴안았다. 마치 뱀이 맛있는 먹이를 몸으로 휘감듯, 천천히 쓸어안았다.


“아하하,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요. 제대로 선물도 가져왔답니다. 기뻐해줬으면 좋겠네요.”


딱.


홍시영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였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하피의 귀 바로 앞에서 튕긴 덕에 그녀에게는 유독 크게 들렸다.

 
-우웅

 
곧 이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것은, 차원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우웅!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차원문이 열렸다. 하늘을 빼곡이 채워버릴 정도였다.

 
-케게게게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온갖 차원종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마리의 스케빈저부터, 군단장급 차원종까지...

 
-“제법이구나, 맹자들이여.”

 
그렇다. 군단장급. 서피드, 데르바토비아, 무스카와 함께 나타난 것은, 분명히 파리왕 벨제부브였다.

 
순간, 클로저들의 눈빛에 아연실색함이 여실히 비춰졌다. 아스타로트, 헤카톤케일은 물론이요, S급 차원종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의 하급 차원종들이 쏟아지는 그 광경은, 가히 과거 차원전쟁을 방불케 하는 재앙이었다.

 
“......이건 누님이 100명은 있어야 되겠는걸. 차원 전쟁따위 애들 장난으로 보일 지경이군.”

 
...실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제이의 감상에 따르면, 그 때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인 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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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광경은, 참혹 그 자체였다.

 
아무리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모두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인 특수요원급 클로저들이지만, 그래봤자 특수요원 스무 명도 안 되는 인원에 불과했다. 차원전쟁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차원종들을 상대로, 그 적은 숫자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이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원래는 자세하게 묘사하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을 담지 말라는 조항을 이벤트 페이지에서 봤기에 그 끔찍함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쉬울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모두가 죽었다.

 
김유정, 이세하, 이슬비, 서유리, 미스틸테인, 제이.


트레이너, 나타, 티나, 레비아, 바이올렛, 하이드.

 
앨리스, 볼프강, 파이, 세트, 루나, 소마.

 
그 어떤 역경도 반드시 헤쳐나왔던 그들이, 한낱 고깃조각이 되어 차원종들에게 유린당했다.


그리고, 하피는 홍시영에게 붙잡힌 채 그 모습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똑똑히 보고 있었다.


중간에 몇 번정도 홍시영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기에, 지금은 몇몇의 차원종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이미 도망칠 기력도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아, 아, 아, 아.”

 
...이미 정신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채, 턱을 삐그덕거리며, 언어를 잃은 듯이 “아, 아.”만 연발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티나가 쓰러지면서부터, 하피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내려 버렸다. 무기력함은 이미 도를 넘어, 자괴, 절망, 실의 등의 부정적이고 무력한 감정들이 마음 깊숙이 박혀버렸다. 이미 사람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도 그럴게, 이것은 싸움의 결과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소중한 동료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죽어나가는 것을 말이다.

 
“아하, 아하하하! 꺄하하하하! 하피! 하피?! 왜 그러죠? 괴롭나요? 절망했나요? 아니면...이제, 전부 싫어졌나요?”

 
“아, 아, 아, 아.........”


“후후후, 최고에요! 당신은 최고라고요! 이렇게 매력적인 당신을, 그저 초커 따위를 채워서 제어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요!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고요!”


홍시영의 말투는 이미 충분히 광기에 젖어 있었다. 일반인을 포함한 무차별적인 학살 이후의 불온한 정적이 지배하는 해운대에, 오직 그녀의 끔찍한 환희만이 끝없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피는 생각했다. 절망의 깊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탄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뭘까.


왜 이렇게 된 걸까.


단순히 휴가를 즐기고 있었을 뿐인데.
 

줄곧 싸우기만 했으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여유를 갖고자 했을 뿐인데.

 
왜, 왜 이런 것도 안되는 거지?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잖아.


그저, 그저 조금만. 아주 작은, 아주 약간의 ‘자유’를, 바랐을 뿐이잖아.


어째서,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지? 아니, 벗어나고서도 왜 다시 사로잡혀야만 하는 거지?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왜에에에에에!!!”

 

-훙

-퍼억!

 
“윽!!”

 
쉬어버린 목이 찢어지도록, 하피는 소리 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질러진 그녀의 발은, 아지 다하카의 몸을 찢으며 홍시영의 복부를 걷어찼다. 이미 몸에 힘이 빠져있었고, 위상력을 끌어올리는 시간이 부족했으며, 아지 다카하의 단단한 몸뚱어리 때문에 위력은 급감하여 홍시영은 건장한 일반인 남성에게 얻어맞은 정도의 충격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결과’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명백한 ‘반역’이었다.

 
“하피, 하피, 하피이이!! 당신, 지금 제정신인가요? 이제 와서 반항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요? 동료가 죽을 때도 가만히 있었던 주제에!”

 
“시끄러워요! 더 이상, 당신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의 장난감이 아니에요!!”


직후, 하피의 몸에서 푸른 빛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위상력이다. 무기력하게 미약한 저항을 하느라 거의 바닥나버린 위상력이지만, 하피는 죽을 힘을 다해 쥐어짜냈다. 즉, 폭주인 것이다. 내버려 두면 자멸해버릴 거란 사실은 이미 명백했다. 어차피 차원종들이 주변에 떼거지로 있기 때문에, 자멸하지 않아도 살해될 것이겠지만.


회광반조라 했던가. 흔히 무협 소설 등에서 촛불이 꺼지기 직전 크게 타오른다는 표현으로 쓰이곤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하피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회한, 분노, 원망, 살의 등을 담아, 그 감정을 홍시영 하나에게 집결시킨다.

 
“한때는, 그러니까 당신이 죽을 때, 아쉬워한 적도 있어요. 저는 당신을 보며 자라왔고, 당신을 보며 어른을 이해했으니까.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그립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피의 눈이 혁혁하게 빛났다. 끝이 다가온 것이다. 폭주하는 위상력을 다리에 모두 쏟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당신은 이제, 제가 원망해야만 하는 최악의 원수에요!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홍시영은 차원종으로 막으려는 생각조차도 안 하고 있는 듯했다. 설마 하피의 전력을 몸소 받으려는 생각일까.


“이 지긋지긋한 인연,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해요!!!”

 
“하피...하피이이!!”

 
-후웅.

 
두 사람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질풍이 일었다.

 

-쾅!

그리고, 세상이 빛에 휩싸여갔다.

 
-투쾅!

 

폭발이 일고,

 

-카아앙!

 

 

 

 

하피의 돌진이, 막혔다.

 
“......?!?!”

 
곧 이어 하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목숨을 쥐어짜낸, 전력을 담은 일격이, 눈 앞의 백발 여성에게 손쉽게 막혔다.

 
“...대정화 작전 이후인가? 오랜만이야?”

 
그녀는, 차원전쟁의 영웅, 알파퀸 서지수였다.

 
“이게, 무슨...”

 
“뭐 일단 진정해. 그리고 가만히 있도록 해. 움직이면 죽을 거야. 거 참, 수영복 차림으로 짓을 다 하는구나.”


“아, 알파퀸. 다, 당신이 어떻게...? ......아!”

 
순간, 하피는 온 몸의 힘이 완전히 사그라지는 것도 잊고 탄식을 내질렀다. 지인 중에, 그녀와 연관된, 결코 떼어서 볼 수 없는 인물이 있는 것이다.

 
하피는 무심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기억이 옳다면, 서지수의 아들, 이세하는 모래사장 위에서 괴조 떼에게 파먹히고 있었을 것이다.

 
“응? 왜 그러는...아아, 저거 때문이구나?”

 
그러나, 놀랍게도 서지수는 자신의 아들의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저거라고 말하며 깎아내리기나 했다.


“하하, 역시 아들의 시체를 보는 건 별로 기분 좋진 않네. 아무리 꿈이라지만 말이야.”

 
“...꿈?”

 
서지수의 혼잣말에,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섞여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피는, 그것을 다시금 조용히 읊조렸다.


“응. 꿈, 이거 다 꿈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하피를 내버려 둔 채, 서지수는 새하얀 건블레이드를 어깨에 걸치며 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서 심상찮은 양의 위상력이 흘러나왔다. 전력을 담은 하피의 폭주하는 위상력도 한 줌의 촛불로 보일 정도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위상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번에 해방했다.


-펑!

-퍼벙! 퍼버벙!


변화는, 매우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부산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차원종들이 터져나갔다. 하위, 중위, A급, 군단장급 등등.

 
수많은 강대한 차원종들이, 차례차례 터져나갔다.


“이, 이게 지금 무슨...”


그러자 잠시 방치되었던 홍시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뜬금없이 알파퀸이 나타난 것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알파퀸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현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응? 아, 너도 몽환존재구나. 너도 지워야겠지.”

 
-퍼버버벙!


“자, 잠깐! 꺄, 꺄아아아악!!!”

 
서지수가 홍시영을 향해 손을 한 번 내젓자, 홍시영은 거짓말같이 터져 사라졌다. 몇 페이지에 걸쳐 하피를 괴롭힌 그녀로서는, 조금 전의 극적인 상황에 비해 어이없을 만큼 가벼운 최후였다.

 
-퍼어엉!

 
마지막으로 요드까지 터져나가자, 오염되어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다시 원래의 푸른 색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마치 작업을 끝냈다는 듯이 손을 휘휘 털던 서지수는 하피를 돌아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하피, 수고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응. 설명해줄게. 사실 얼마 전에 좀 특이한 게 하나 발견되어서 말이지. 형상복제자라고 알아?”


“형상...복제자...? 알긴 아는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


“사실, 차원종의 형상을 복제하는 형상복제자가 발견되어서 말이야. 그것도 고위급 차원종. 내가 그걸 쫓고 있었거든.”


“...고위 차원종, 형상 복제자...꿈,,,? ...! 설마!”

 
서지수의 말에서 키워드를 찾아 되읊은 하피는, 알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오, 알았나보네. 놈이 복제한 건 놀랍게도 D백작이야. 그 와중에 하필 네가 몽환세계에 잡혀버린 거지. 개입하는데 고생 좀 했다니까. 하하.”


“그럼, 이거, 전부 꿈인가요? 현실이 아닌 거죠? 모두...모두, 살아있는거죠?”

 
하피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찔거리며 서지수에게 매달리듯이 물었다. 그녀가 긍정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서지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응.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안전하다 못해 네가 이런 경험을 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를 걸? 으음...아마 지금 부산으로 가는 KTX 안일 텐데. 총장을 쫓으러 간다고 했었나?”


“아...하아...! 흑! 흐윽...! 다행이에요...정말 다행이에요...!”


하피는 너무나 안심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 그만큼 그녀의 경험은 괴로웠던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마음의 구원에, 그녀는 피로가 급속히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놓으려 했다.


“이런, 정신을 놓으면 안 되지. 하피, 여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공간이야. 형상복제자를 처리했으니, 네가 이 공간을 부숴줘야만 해.”


“그, 그런가요...어떻게 하는 건가요?


”으음...간단해. 네가 이 공간에 묶였던 의미에 저항하면 돼. 그러니까 여기서 네가 강요당했던 일을 거부하면 된다는 거지
 

“그렇군요. 으음...”

 
하피는 잠시 고민하는 듯, 으음, 으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눈을 번쩍 뜨며 손뼉을 쳤다.

 
“아아! 알았어요. 할 말은 이것밖에 없네요.”


“호오, 뭐지?”

 
“후후, 저는요...”

 
하피는 어디서 꺼낸 건지 파랑새가 그려진 조커 카드를 들었다. 카드의 끝부분에는 살짝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하피는, 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망을 입에 담았다.







 

-저는,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원해요.







 

순간, 해운대의 해변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서지수가 등장했을 때와 매우 흡사한 광경이었다.


빛은 점점 퍼져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엉! 쨍그랑!


청량한 파음이 울렸다. 고급 글라스가 깨지는 듯한 맑은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이번에야말로 하피는 의식을 잃었다.

 

 






*
*
*
*
*
*
*


 





 

“선배님? 도착했어요.”


“깡총이 녀석아! 일어나라! ...응? 왜 안 일어나냐?”


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실눈을 떠 보면, KTX의 창가 너머로 뜨거운 햇살이 날아들었다.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으음...흔들지 마세요...”


하피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거칠게 자신을 흔드는 세트의 손을 느꼈다. 답지 않게 잠투정을 부리다가,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만다. 세트의 손? 눈이 번쩍 뜨였다.


“...세트?...후배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들을 부르는 하피를 보며, 이슬비와 세트는 살짝 당황했다. 그들이 알던 하피와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의 하피는 조금 삐딱하면서도, 늘 여유를 잃지 않는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하피도 그 사실은 알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피는 본능적으로 둘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아, 정말 기뻐요. 그다지 정은 붙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들은 이미 제게 상당히 중요한 존재군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다시금 놀란 이슬비와 세트는, 이제는 본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피를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하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저, 선배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정차 시간이... 나가야 해요.”


“아아, 그러도록 하죠.”

셋은 곧장 KTX에서 나와 부산역을 빠져나갔다. 깨끗한 유리 문을 열고 역 밖으로 나온 순간, 하피는 또 한 번 화창한 햇살에 얼굴을 찌푸렸다. 날씨는 유독 맑았고, 좋은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문득 꿈속에서의 불쾌한 공기를 떠올린 하피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젓고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뒷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끼룩 끼룩 끼룩.


돌연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서는 갈매기 때가 진을 이루며 날아가고 있었다. 하피는 햇빛을 가리며 그 광경을 살짝 보고, 이번에야말로 카드를 바람에 실어 힘껏 날려보냈다.


모퉁이에 핏자국이 눌어붙은 파랑새 조커 카드가 힘껏 날아올랐다. 갈매기 떼를 향해서, 태양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자유를 추구하며...


“선배님, 빨리 오세요!”

 
“으아 날씨 좋다! 있지 유정 언니! 총장만 찾으면 우리 해운대 가자! 수영하고 싶어 수여엉~!”


“아하하. 그래, 그래. 하지만 일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건 알고 있지?”


“당근이지~!”

 

날아가는 카드를 보고 있자니, 앞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하피는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들의 여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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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초고 상태 그대로 올리게 되었네요. 문법적이나 내용적으로 많이 어색하겠지만,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시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충성충성^^7

복귀한지 얼마 안되어서 애들 캐릭터를 잘 모르겠...ㅠㅠ;;
2024-10-24 23:23:5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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