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서는 그렇게 바라던 수영복에, 시달린다.

겨울용 2019-07-09 3

키워드 : #수영복 #해운대


 “제리! 지금 이거, 꿈 아니지? 내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어! 믿을 수가 없군! 확인 차 묻겠는데, 여기 명칭이 뭐라고 했지?”

 “해운대 해수욕장이에요. 부산에 있는 해수욕장이죠. 축하해요, 볼프. 드디어 꿈을 이뤘군요.”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내가 수집하는 가이드북에는 해운대에 대한 것도 있었으니. 그저 내가 드디어 휴가를 왔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조금 말이 많아진 것뿐이다.

 제리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풍경을 봤다. 황금빛 백사장, 각양각색의 파라솔. 태양빛에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바닷가. 시야 구석에는 매트를 사이에 두고 비치발리볼을 하는 무리가 보인다. 내가 바라마지않던 광경이다. 그야말로 꿈속에서 그리던 광경이었다. 앨리스가 보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지금 내 눈도 반짝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드디어, 드디어 왔어. 제리! 저것 봐. 진짜 바다야! 모래사장이야! 수영복 미녀야!”

 “네, 네. 수영복 미녀라면 여기에도 있습니다. 요원님.”

 삽시간에 얼굴이 굳고, 흥분해서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턱 내렸다. 옆을 보니 곁에 있던 안경 쓴 연구원은 말썽쟁이 2호에게 붙들려 머리만 내민 채 모래사장에 파묻히고 있었다. 제리가 있던 자리에는 지겹게도 봐 왔던 오퍼레이터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어머,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아니면.. 흠, 제 수영복 차림에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사냥터지기가 다 같이 휴가를 왔으니, 앨리스도 있는 게 당연하다. 다만 매일 일을 던져 주는 오퍼레이터의 얼굴을 휴가 때조차 본다는 게‥ 주말에 출근을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파라솔 그늘이라고 해도 기온이 높아서인지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의 얼굴엔 붉은 기가 약간 돌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바닷가, 그것도 해운대라는 배경에 걸맞게 수영복 차림이었다. 검은 색 비키니 수영복 위에 흰색 와이셔츠를 걸치고 밑동을 질끈 묶어 두었는데 얌전한 느낌이 들면서도 어쩐지 눈 둘 곳을 찾기가 애매한, 그런 모습이었다. 평소와 같이 땋은 머리를 앞으로 넘긴 헤어스타일이 수영복 차림이란 걸 더욱 돋보이게 했다.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앨리스를 마주보기가 힘들다. 평소 모습과의 갭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아니, 아니다. 미니 휠 모니터 속이든 실제로 얼굴을 맞대든 항상 타박만 하고 까칠한데다가 기분에 거스르면 휴가가 토막 날 위기를 가져오는 이 위험한 오퍼레이터한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그럼 ‘수영복 미녀’를 헌팅 하러 가 볼까?”

 “굳이 수영복 미녀를 언급하는 이유가 뭐죠?! 딴청 피우지 마요! 이봐요!”

 “오, 저기에 ‘수영복 미녀’가 있군! 거기 아가씨!”

 “미니 휠 전 포문 개방!”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녀의 옆에 떠 있던 미니 휠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그 덕에 날 돌아본 미녀는 기겁하며 도망가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뭐야, 휴가 오면서까지 미니 휠을 가져왔어?! 잠깐, 그만 둬! 나도 수영복뿐이고, 여긴 일반인도 많다고!”

 “큭‥ 이렇게 된 이상 휴가를!”

 “내가 잘못했어, 앨리스. 장난이 지나쳤던 것 같아. 미안해.”

 가끔 드는 생각인데, 내 휴가는 날 위한 휴식시간이 아니라 앨리스의 비장의 무기가 아닐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마치 쓰레기라도 보는 표정으로 날 주시하던 앨리스는 이내 미니 휠의 포문을 거뒀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요. 모처럼 입은 수영복인데 좋은 말 좀 먼저 해주면 덧나나요?”

 “내 칭찬이 그렇게 듣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듣고 싶었다기보다는‥ 그, 그냥 기분상의 문제죠.”

 “흐음, 그래? 내 말이 앨리스의 기분을 좌지우지한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는데.”

 “좌지우지라니…. 나 참 기가 막혀서.”

 앨리스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히기 시작했다. 파라솔 밑인데, 그렇게 더운가? 아무튼 난 진심이다. 내 휴가가 걸렸으니 말이지. 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수긍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자랑스러운 머리카락은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제리를 다 파묻고서 내 뒤로 돌아온 말썽쟁이 2호였다.

 “긴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두면 되게 붙잡고 싶게 변하네요. 볼프쌤!”

 “하늘같은 선생님 머리 건드리지 마, 말썽쟁이 2호.”

 너 붙잡으라고 기른 게 아니라고.

 “그러는 2호 너도 머리카락 올려 묶어 뒀네, 뭘.”

 “더우니까 그렇죠! 아무튼 아까 앨리스랑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볼프쌤은 칭찬에 무지 인색하네요!”

 앨리스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동감이에요, 소마.’

 …붙잡혔던 머리를 돌려받고 손가락으로 빗질하면서 말했다.

 “크흠, 난 칭찬해야 할 경우에만 칭찬을 하는 것뿐이야. 절대 인색한 게 아니라고. 칭찬을 받고 싶으면 칭찬받을 일을 해야지. 특히 2호 넌.”

 “그럼 칭찬해주세요!”

 “지금 내 말 듣긴 들은 거야?”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가 수영복을 입었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칭찬해줘야 하는 것 아녜요?! 입은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칭찬거리가 된다구요!”

 앨리스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말 잘했어요, 소마.’

 꼭 앵무새 같군.

 “막무가내구나 이젠.”

 “칭찬해줘요!! 진심을 담아서! 칭찬! 칭찬!”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여기서 무시했다간 나중에 숙소에 돌아가서까지도 칭찬타령을 할 게 분명하다. 그건 싫다. 푹 쉬고 싶다고. 칭찬을 하려면 우선 수영복 차림을 보긴 봐야겠지. 나는 가만히 소마를 보았다.

 “그래‥, 붉은 색 비키니가 잘 어울려. 올려 묶은 머리카락도 평소랑 느낌이 달라서 신선하네. 머리띠 색도 비키니 색이랑 같아서 신경 쓴 게 잘 전해져. 수영복 잘 어울린다. 예쁘네.”

 어찌어찌 길게 말을 늘려보긴 했는데, 문과출신이라는 말이 울겠군. 아니 애초에 학생의 수영복 차림을 어떻게 칭찬하면 되지? 이게 잘 한 건가?

 “볼프쌤 얼굴이 빨개요!”

 “더워서 그래.”

 진짜다. 난 정말 더워서 얼굴이 빨개진 거다. 아까 미니 휠을 피하려다 파라솔 밖으로 나와 버렸거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지, 2호 녀석은 실실거리며 팔짱을 끼고는 곁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찰랑였다.

 “흐흥, 아주 좋아요! 100점 만점에 50점!”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 치곤 점수가 야박한데. 그건 저번에 본 네 수학시험 점수잖아.”

 “전 원래 미인이라 저절로 아름다움이 전해지거든요! 과유불급행열차! 칭찬을 해 주셔서 오히려 감점이라 이거죠. 아, 물론 칭찬은 고마워요!”

 “어디에 맞춰야 하는 거야. 내 수고가 아깝군…. 앨리스, 넌 어떻게 생각해? 소마의 수영복 말야.”

 “….”

 대답이 없다. 다시 보니 앨리스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나와 소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툴툴거려도 항상 하고 싶은 말은 확실하게 하는 게 앨리스의 장점인데. 설마 자긴 칭찬 안 해줬다고 삐진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자의식 과잉이다. 너무 더워서 열이라도 나는 거겠지.

 “앨리스? 많이 더워서 그래? 가져온 아이스박스에 아이스크림이 있을 텐데.”

 음료수며 이것저것 들어가 있는 박스를 뒤적여 아이스크림을 꺼내 건넸지만, 앨리스는 손을 저어 사양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파이 요원님을 찾아와 주시겠어요?”

 “아, 후배한테 얼음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게 더 나으려나? 그런데 무기는 숙소에 두고 왔을 텐데, 가져오라고 시키지 뭐.”

 “그게 아니라, 파이 요원님은 아무래도 이런 북적이는 곳이 서투르실 테니까요. 혹시 모르니 찾아와 주시죠. 저랑 소마는 짐을 지키고 있을게요.”

 “에엣, 저는 볼프쌤이랑 같이 물놀이 하고 싶은데에‥.”

 “나도 수영복 미녀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고. 후배는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놀겠‥.”

 “찾아와, 주시죠.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

 아무래도 내가 앨리스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군. 어른은 다짐한 바를 바로 실행에 옮기는 법. 이 이상 그녀의 기분을 이 이상 상하게 하지 말자. 뭣보다 지금 앨리스의 표정을 직시를 못 하겠다고.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스스로의 얼굴이 약간 떨리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앨리스.”

 “아, 볼프쌔앰!!”

 “소마는 저랑 서로 선크림이라도 발라주도록 하죠?”

 “애, 앨리스? 얼굴이 무서운데요..?!”

 …얼른 찾아오자.


-


 백사장을 걷다 보니 금방 찾았다. 서둘러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헌팅도 포기하고 돌아다닌 덕도 있겠지만, 흑발 성인 여성과 주황색, 붉은 색 머리를 가진 여학생 둘의 조합은 평범하게는 볼 수 없는 법이니 눈에 금방 띄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파이 녀석, 애들이랑 같이 가면 말이라도 해 줘야지.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녀석들은 어느 포장마차의 카운터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아하, 어쩐지 눈에 확 들어온다 했다. 해수욕장에 포장마차라는 언밸런스한 조합도 한 몫을 한 것 같군. 아무튼 포장마차의 손님은 그 셋이 전부였다. 위치가 해수욕장의 가장자리 부분이라 그런지 손님이 적은 것 같았다. 사실상 그 세 명이 손님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뭐야, 너희들끼리만 맛있는 걸 먹으러 온 거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데 먹을 게 생기면 하늘같은 선배 먼저 가져다 드려야지?”

 “아, 선배. 오셨습니까아?”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던지며 다가가자 파이가 고개를 돌렸다. 말투는 왜 저래? 어디 뭘 먹고 있나 볼까? 슬러시 같은 거겠지?

 “…너 뭘 마시고 있는 거야?!”

 “녹즙입니다. 헤헷.”

 “이거 너무 맛없다! 웩!”

 “아, 선생님…! 저, 전 완전무결한 클로저니까, 어떤 거라도 먹을 수… 웁!”

 “루나? 세트?”

 루나와 세트는 거의 구토 직전인 상황이었다. 아니, 내가 말을 걸자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에 이마를 박았다. 말썽쟁이들 앞에도 반쯤 비워진 녹즙 잔이 있었다.

 “애들한테 뭘 먹이는 거야? 애초에 왜 그런 걸 먹고 있는 건데?!”

 축 늘어진 채 해롱거리는 두 꼬마를 챙기며 다시금 보니, 날 보는 파이 녀석도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게 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게 뭐야 대체?

 내 지식이 잘못된 건가? 한국의 해수욕장에선 녹즙을 파는 건가? 그 전에, 녹즙 좀 먹었다고 이렇게 될 리가. ‥아니 잠깐만. 이 불길하게 부글거리는 표면과 음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끈적이는 액체. 알싸하게 코를 찌르는 냄새도 난다. 게다가 이 흉흉한 녹색‥ 많이 본 그 색이다. 건강을 설파하고 다니면서 정작 하는 짓은 사신의 낫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그 양반이 자주 들이키던 바로 그 드링크다!

 “여어, 후배! 역시 후배도 같이 와 있었군?”

 “역시 어르신이었습니까!”

 포장마차 카운터 안에서 하얀 머리가 나왔다. 타이트한 긴 바지 수영복 차림에, 기름 대책인지 검은 티셔츠를 하나 걸치고 계셨다. 역시 어르신이 범인이었다. 하지만 역시라고는 해도 이해 안 가는 부분 투성이다!

 “너도 한 잔 할래, 후배?”

 “이 상황에서 뭘 태연하게 권유하는 겁니까! 단호하게 거절하죠! 대체 뭘 팔고 있는 겁니까! 애초에 클로저가 이렇게 따로 일을 해도 되는 거예요? 공무원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나도 썩 근면한 놈은 못 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성실한 공무원인 것 마냥 말하게 됐다.

 “그렇게 열 낼 것 없어 후배. 그 부분은 걱정 말라고. 봉급을 받지 않고 있으니까. 여우네의 소영이가 한철장사로 여기다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볼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봐 주고 있는 것뿐이야.”

 “점주가 없으면 아무 메뉴나 팔아도 되는 겁니까? 메뉴판엔 녹즙의 녹자도 없는데요?!”

 “그런 거에 얽매이면 진짜 건강을 찾지 못해 후배. 난 정말 좋은 마음으로 대접한 거라고.”

 “차라리 사약을 주시죠! 위상능력자니 그 정도는 버틸 겁니다!”

 “너무하는군.”

 어르신이 낙심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틀린 거 없다고. 애초에 클로저를 이 모양으로 만드는 정체불명의 녹즙에 공포마저 느껴진다.

 “아니, 메뉴에도 없는 걸 이 녀석들은 어떻게 알고 주문한 거야?”

 “그건 내가 설명하지.”

 포장마자 안에서 몸을 숙이고 있었는지 솟아나듯 나타난 것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티나 선배님.. 망할 할멈이었다. 이 양반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지, 틀림없이 잠깐 가게를 봐 주면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겠다, 뭐 이런 말에 낚인 게 분명하다.

 내 입장에선 이제 전혀 해수욕의 느낌이 나지 않지만, 마귀할멈 역시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꽁지머리로 묶어 두었고, 검은색 바탕에 흰 줄무니가 들어간 디자인의 비키니였는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매우 안 어울렸다. 평소의 악감정이 들어간 건 부정 못 하겠지만.

 “…버릇없는 녀석.”

 “윽, 왜 물총을 쏘는 겁니까!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아무튼 설명하지. 처음에는 그냥 메뉴에 있는 음식을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서 와라. 개인적인 추천 메뉴는 슬러시다.

-파이! 늑대개 녀석이다! 늑대개 녀석이 있다! 하얀 검은양 녀석도 있구나!

-세트! 먼저 뛰어가지 말라니까!

-티나 요원님과 제이 노사님이시군요. 여기서 뭘 하십니까?

-자원봉사 같은 거지. 기왕 온 거 뭐라도 먹겠어?

-세트는 임금님이니까 가장 좋은 걸 먹어야 한다! 가장 좋은 걸 내놔라!

-잠깐만요, 세트. 저는 그렇게 돈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슬러시가 가장 좋다. 슬러시를 주겠다. 값도 싸다.

-잠깐, 모처럼 온 기념으로 그것보다 더 좋은 걸 먹지 않겠어? 건강을 따지면 이게 이 가게에서 제일 좋은 거라고. 게다가 공짜야.

-제이. 또 그걸 권할 셈인가? 권유받은 모든 손님들이 도망을 치는데,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들 시도도 않고 빼는 게 잘못된 거라고. 한번 마셔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까. 자, 나왔다.

-아니 아직 주문 안 했는데요. ‥이게 뭐죠? 생긴 게 좀 이상한데요. 아저씨?

-내 특제 녹즙이야.

-‥저기 아저씨, 그냥 슬러시로 부탁드리‥

-공짜에 제일 좋은 거라지 않냐? 난 마셔 보겠다!

-세트? 진심이세요?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맞아, 세트. 그냥 멀쩡한 슬러시를 먹자.

-땅딸이랑 파이는 못 먹을 것 같나 보구나? 괜찮다. 내가 두 사람 몫까지 먹어 주겠다!

-‥누가 못 먹겠다고 했어? 먹을 수 있어! 먹으면 되잖아!

-잠깐, 루나까지‥

-아가씨한테는 어른답게 알코올을 첨가한 초특제 녹즙을 추천하지. 숙취도 없다고.

-…후, 제자들이 먹는데, 그 앞에서 제가 안 마실 수는 없겠죠.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이 노사님!


 “…이렇게 된 거다.”

 “끝까지 말렸어야지, 파트너!!”

 손님이 없는 이유가 이거였나! 나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어 버렸다. 아니, 이제 그냥 포기하자. 데리고 돌아가면 제리한테 떠넘기고 헌팅이나 하러 가야지. 모처럼 온 휴간데 이렇게 시간 낭비할 순 없어.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은 영 상태가 안 좋다. 아무래도 여자애들이니, 업고 가기보단 위상력으로 띄워서 옮기는 게 좋겠다. 남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지. 팔도 부족하고. 파이는..

 “선배!”

 “깜짝이야. 뭐야, 후배. 걸을 수 있어? 그럼 수고를 덜겠군. 잘 따라오‥”

 “선배는 참 못났습니다.”

 “엉? 아, 꼬맹이들 염동력으로 띄운 거 말하는 거야? 이거야 나중에 애들이 부끄러워할까봐‥”

 “후배가 힘들어하는 것도 눈치 못 채고! 그게 후배를 이끄는 선배의 태도입니까!”

 “어엉?”

 “어엉?이 아닙니다! 힘들단 말입니다! 속이 상한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박차고 일어나서 한다는 말이 뭐 이래? 한쪽 다리로 바닥을 팍팍 차고 있다. 파이 녀석, 이런 생각을 해도 입 밖으로 안 내는 녀석인데. 가만, 아까 어르신이 준 녹즙에 알코올이 들어 있었댔지? 아까부터 초점도 잘 안 맞는 것 같고. 설마?

 “너 취했냐?”

 “저 안 취했습니다!! 말 돌리지 마십쇼!”

 삿대질을 해댄다. 아니긴 뭐가 아냐. 아이고, 골치야. 이젠 주정뱅이 상대까지 해야 하는 건가? 평소랑 분위기가 딴판이다. 얌전한 모습은 어디가고 머리 위로 펑펑 증기를 뿜으면서 성을 내고 있다. 이제 보니 아까까진 괜찮던 얼굴도 새빨개졌고 말이야.

 이걸 또 어쩐다. …아니지, 이 녀석 말마따나 선배로서 후배의 힘든 점을 캐치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다.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고, 뭐가 고민인지 잠깐정도는 들어 줄까.

 “그래.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뭐가 고민인데?”

 “소마 양이, 얼마 전에 원주율을 배웠다면서, 절 놀린단 말입니다‥. 파이 선생님의 이름은 끝이 없다!라면서 놀린단 말입니다!”

 “어린애냐! 그딴 걸로 고민하지 마!”

 너무 하찮아서 하마터면 애들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리고 그건 상담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 수학담당인 제리한테 가서 말하라고.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네가 방금 속상하다면서면서 칭얼거렸잖아?!”

 “선배, 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수영복 차림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몇 마디 말이라도 해 주는 게 예의 아닙니까?!”

 “뭐야! 도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들 수영복으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앨리스, 소마에 이어서 이젠 후배녀석까지 이 난리라니. 나중에 세트와 루나가 정신 차리고 나면 또 수영복 어떠냐고 물어볼 것만 같다. 이쯤 되니 아까 제리가 ‘제 수영복 디자인 이상하진 않죠, 볼프? 아무래도 제 타입은 아닌데, 캐롤이 선물해 준 거거든요.’하고 묻지 않은 게 불가사의하게까지 느껴진다고.

 “휘우. 부러운 걸 후배? 그런 말을 듣는 건 남자의 로망이라고.”

 “포장마차에 팔꿈치 괴고 구경하지 마시죠, 어르신!”

 망할 할멈은 아이스크림을 두 개째 까서 먹고 있다. 음? 어르신과 잠깐 대화를 하는 사이에 파트너의 새빨간 얼굴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잠깐, 이 감각은‥.

 “그래서 제 수영복에 대한 감상은 어떻습니까? 선배?”

 “말 해주면 지금 잡힌 멱살 풀어 주는 거냐. 후배?”

 “어떻습니까!”

 “….”

 정말이지, 말썽쟁이들이 기절한 상태라서 다행이군. 이런 모습을 보여줘선 선생님의 위엄이 죽지. 어쩔 수 없지. 한번 볼까.

 “하아…. 그래. 내가 졌다. 검은 비키니가 흑발이랑 잘 어울리네. 평소랑 다른 생머리도 괜찮고. 비키니에 장식으로 달린 레이스가 포인트야? 예쁜 거 잘 골랐구나.”

 어쩌다보니 조금 놀리는 투가 됐지만, 멱살 잡힌 입장에서 이 정도로 말했다고 하면 다들 나한테 박수를 칠 거다. …그렇지? 합격점인지 후배 녀석은 잡고 있던 내 후드집업의 멱살울 풀었다.

 “…칭찬 고맙습니다. 미숙한 저한테는 과분할 정도네요. 하핫.”

 “…그러냐?”

 한 대 정도는 맞지 않을까 각오했었는데 말이야. 취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습니다. 앨리스 양의 완벽한 수영복 차림에 비하면 저는 새 발의 피입니다. 아까 탈의실에서 본 그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완벽했다구요.”

 “그 정도였다고?”

 뭐, 평소랑 달라서 예뻐 보이… 신선해 보였지.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음? 아까까지는 그렇게 방방 뛰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이제야 앨리스한테 돌아갈 마음이 든 건가 보군.

 “…선배, 혹시 앨리스 양에게도 저한테 한 것처럼 먼저 칭찬을 안 하신 건 아니겠죠?”

 예상 밖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나도, 파트너도 무기는 분명 숙소에 두고 왔을 텐데, 지금 파이에게서는 분명히 한기가 느껴졌다. 한여름 태양빛 아래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여전히 취기에 얼굴을 붉지만, 암살자라는 본업에 어울리는 싸늘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안…하긴, 했는…데.”

 “선배는 참 못났습니다!!”

 “으헉!”

 순식간에 뱀처럼 날아온 주먹에 명치를 맞았다. 말로만 듣던 취권 같은 건가? 주먹의 궤도를 읽을 수가 없다.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배를 감싸 쥐었다. 자칫하면 떨어뜨릴지도 몰라, 염동력을 조절해 아이들을 어르신에게 보냈다.

 “앨리스양이 그 수영복을 얼마나 숙고해서 골랐는지 아십니까앗!”

 “쿨럭, 지금 내가 맞은 이유가 그거야?!”

 “그렇습니다! 2분대 아이들과 다 같이 수영복 매장에 가서, 다들 결제가 끝날 때까지도 고심하셨다고요! 5시간 넘게 둘러보셨단 말입니다! 앨리스 양의 노력을, 고민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선배는!”

 말끝마다 바닥을 발로 퍽퍽 차고 있다. …그 수영복 차림, 그렇게까지 신경 썼던 건가. 정말로 미안해지기 시작하는데. 아무튼, 나는 파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정말로 실수한 것 같군. 알았어. 나중에 앨리스한테 꼭 잘 어울린다고 말할게. 그러니까 그만 때리라고.”

 “…거짓말 아니죠?”

 “선배를 그렇게 못 믿냐?”

 “그럼 됐습니다. 아, 뛰었더니 어지럽다. 발도 아파.”

 내 말을 듣고 이제 만족했는지 파트너는 정말로 얌전해졌다. 그냥 지친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그만 해. 방방 뛰는 것도, 바닥을 차는 것도 너랑 정말 안 어울린다고, 2분대 애들이 봤다면 울음을 터뜨렸을 거야. 그 정도로 평소와의 갭이고 뭐고 없이 완전 아웃이라고. 응? 뭐야, 쓰러졌잖아?!

 “파트너?!”

 “쿨….”

 자는 거냐! 포장마차 바로 앞 모래사장에 대자로 누웠다. 새빨개진 얼굴로 세상 곤히 잠들어 버렸다. 뜨거울 텐데 우선 위상력으로 띄워 둘까. 나 참, 사람 하나 쥐 잡듯이 잡아 놓고는 뻗어 자다니,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나중에라도 이 녀석이랑은 절대 술 마시지 말아야지.

 어찌됐건 겨우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니 그만 앨리스에게 돌아가야겠군. 이거 하나가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아이들을 돌려받으러 어르신을 돌아보니, 양 어깨에 하나씩 말썽쟁이들을 들쳐 얹고 계셨다. 루나와 세트의 양 갈래 머리가 중력에 이끌려 축 늘어져 있다.

 “…오해 마. 이렇게 안고 있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걱정 마시죠. 오해 같은 건 안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리고 미안하게 됐어. 아가씨가 술에 약한 걸 알았으면 초특제 녹즙을 권하진 않았을 텐데. 내 실수야.”

 “그냥 녹즙 자체를 권하지 말아 주시죠….”

 “하핫. 그것보다, 팀원들 차림을 칭찬하지 않는 거야? 그럼 안 돼. 다들 작정하고 꾸미고 왔을 텐데 먼저 말해주는 게 신사 된 도리라고. 아니면 정말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가, 후배?”

 떠 보는 말이다. 여기에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은 베테라누스 뿐이니, 막내 취급을 받는 거로군.

 “…뭐, 오늘 본 수영복 차림은 다 어울렸어요. 말썽쟁이들도 다들 귀엽게 입었고요. 그냥, 저는 가까운 사람을 칭찬하는 게 영 서툴러서요. 그래서 그렇죠.”

 어정쩡하게 말을 맺었다. 나도 참, 나잇값도 못 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그런 날 보며 어르신은 다 안다는 듯 씩 웃었다.

 “힘내라고, 후배.”

 “…응원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지만요.”

 이제 정말로 돌아가야겠다. 가는 길에 앨리스에게 할 말도 골라야 하고 말이야. 어르신에게 아이들을 돌려받으려 위상력 조절을 위해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뭐, 어르신의 수영복도 멋지십니다. 진심이에요. 망할 할멈은 안 어울리지만요.”

 “후후, 고맙군, 후배. 자네도 잘 차려입고 나왔어. 우리 애들 수영복 차림도 보여주고 싶어지는데, 다들 수영하러 가서 아쉽게 됐군. 그럼 얼른 가보라고.”

 “예. 그럼 다음에….”

 “잠깐 기다려라.”

 “예? 뭡니까? 망할 할멈.”

 어르신의 어깨에 염동력을 가하려는 찰나에 아까까지 잠잠하던 우리 테스크포스의 홍일점이 입을 떼었다. …베테라누스로 같이 작전에 참가했던 난 알 수 있다. 아마 어르신도 눈치 채셨을 거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다는 걸. 우리 둘은 약간 식은땀을 흘리면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만화도 아니고 이마에 힘줄을 세운 채 몇 개째인지 모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망할 할멈이 있었다. …그리고 총구도 있었다.

 “저기요, 티나 선배님? 그거 물총 맞죠?”

 퓻!

 소음기를 지나 탄이 발사되고, 내 바로 옆 착탄지점의 모래가 치솟았다. 실탄이다. 아기자기한 물총 대신 소총을 견착한 할멈이 말했다.

 “수영복이 안 어울리는 선배가 버릇없는 후배에게 트레이닝을 시켜주지. 레슨 원.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살아남아봐라.”

 인정사정없는 총알세례가 시작됐다. 나도, 옆에 있던 어르신도 회피를 시도했다. 반사적으로 피한 탄환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하다.

 “이봐요! 난 수영복 차림이라고!”

 “아무래도 후배가 안 어울린다고 말한 것에 상처받은 모양인데. 어쩌지, 후배? 이 근처라면 몰라도 조금만 나가면 일반인이 잔뜩 있어.”

 “게다가 애들이랑 파트너도 있죠. 하, 어쩔 수 없나.”

 위상력으로 탄환의 궤도를 비틀면서 한편으로 파이를 어르신에게 건넸다. 어르신 역시 눈치 챘는지 아이들을 양 팔로 옮겨 들며 허공에 떠 있던 파이를 업었다. 역시 척하면 척이시군. 탄환을 피하면서 작전이랄 것 없는 작전을 전달했다.

 “목표는 접니다. 그러니 어르신이 파트너랑 말썽쟁이들을 앨리스에게 데려다 주시죠. 전 여기서 슈팅게임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사냥터지기 엠블럼이 박힌 파라솔이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금방 돌아올게. 맡겨 두라고 후배. 살아서 보자.”

 “걱정 마시죠. 전 휴가를 만끽하기 전까진 죽을 생각이 없어요.”

 파트너와 말썽쟁이들을 들쳐 업고 뛰어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잠시 본 후, 다시 내 앞의 마녀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모처럼 온 휴가인데, 왜 수영복 때문에 이 고생이냔 말이야!”

 총알이 다시 빗발쳤다.


-


 몇 시간 뒤, 나는 홀로 해안가를 따라 걷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어르신은 돌아오셨고, 마침 같이 온 늑대개와 검은양 요원들이 말려줘서 겨우 벗어난 참이었다.

 녹초가 다 됐다. 총을 피하는 동안 어느새 머리끈은 사라져 있었고, 그 덕에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다. 계속 입고 있던 여름용 후드집업은 땀을 머금어 끈적거리는 수준이고 슬리퍼 안으로는 소금기를 머금은 모래가 밟힌다. 땅을 보며 걷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저물어가는 태양이 보였다. …바다 너머로 기울어가는 노을이 예쁘다.

 …망할 할멈.
 망할 할멈!!

 결국 해질녘까지 붙들려 있었다. 저 은발 마녀의 냉장고를 기필코 부숴버릴 거다. 내 버킷 리스트에 적어 두자. 하아, 모처럼 온 휴가가 이렇게 되다니. 대체 세상엔 난 못살게 구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오히려 근무할 때보다 몸이 더 쑤시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역시 날이 저무니 사람 찾기가 힘들군.”

 나 참, 분위기에 취해 산책하러 다니는 커플 몇몇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헌팅은 글렀다. 그 많던 파라솔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는 건 거품을 내며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바다와, 모래사장 밖에 없다. 그래도 노을을 받아 타오르는 빛깔의 모래언덕과 붉은 빛의 바다는 나름 운치가 있었다. …내 상황이 너무 처참해서, 나도 모르게 감정적이 되는 것 같은데. 

 “말썽쟁이들은 다 숙소로 돌아갔겠군.”

 아무래도 밤바다는 위험할 테니 말이지. 저 멀리 숙소로 잡은 콘도가 보인다. 애들만 돌려보냈을 리 없으니 제리나 앨리스도 다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 잠시만, 나 혼자 바다구경이라도 할까. 조용한 시간 좀 갖자고. 생각할 것도 있고.

 “….”

 모래사장에 걸터앉아 다리를 펴고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했다. 그대로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자니, 잔잔하게 치다가 나가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파도소리는 사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던데. 진짜 효과가 있나 보군. 하루 동안 깎여나간 신경이 어루만져지는 느낌이야. …어느 커플이 그렸는지 모를 하트모양 낙서가 파도에 쓸려나가는 게 보였다. 씁쓸하군.

 “하도 안 돌아오셔서 찾으러 왔더니, 혼자서 청승을 떨고 계셨네요.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냅둬. 난 치유 받고 있는 중이라고.”

 고민하려던 대상의 목소리를 듣자, 잠잠해지던 머릿속이 다시 어지러워진다.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팔짱을 낀 앨리스가 옆에 서 있었다. 혼자 왔는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매번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이렇게 올려다보니 꽤 신선한 느낌인걸. 시점의 차이는 역시 무시할 게 못 된다니까.

 그리고 역시라고 할까, 수영복은 갈아입은 후였다. 땋아뒀던 머리는 풀어 포니테일로 올려 묶어 두었고 타이트한 흰색 반팔 티에 검은 칠부바지 차림,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내가 계속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녀 역시 내 옆에 앉아 정면의 노을을 보기 시작했다. 다리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는 모양새였다. 약간 떨어져 앉는 것도 그렇고, 눈치를 보니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모양인데. 우선 신경 쓰이는 것부터 물어볼까.

 “…그렇지, 애들은 좀 괜찮아졌어?”

 “제리 요원님이 돌봐줘서 다들 괜찮아졌어요. 근처에 계셨던 김유정 임시지부장님이 제이 요원님을 아주 호되게 혼내시던 걸요.”

 “그래서 늦으신 거군‥.”

 각혈하면서 임시지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앨리스는 더 이상의 말은 없이 저물어가는 노을만 보았다. 그 옆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르고 있자니, 잠자코 있던 앨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날 보진 않은 채로.

 “제 수영복은 별로 안 어울렸나요, 요원님?”

 바로 숙소로 안 돌아가고 청승떨고 있던 게 그걸 고민하려던 건데 말이야. 계속 말을 골랐던 것도, 그게 맴돌아서였고. 파이가 말했지, 몇 시간을 수영복만 봤다고. 하고 싶은 말. 맴도는 말.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단어의 나열. 그런 것들 중 하나도 고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짓궂은 말을 하게 된다. 정말이지, 애들 보고 말썽쟁이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

 “뭐야,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 그 포니테일은 설마하니 내가 소마의 수영복을 칭찬한 걸 보고 따라 한 건가?”

 “읏. 아니거든요! 이건 그냥, 그냥! 더워서예요! 더워서라구요!! 에잇, 됐어요!”

 얼굴이 새빨개진 앨리스가 머리끈을 풀어버렸다. 조금 씩씩대던 그녀는 팔을 풀어 무릎을 지탱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계신 걸 봤으니 됐어요. 애도 아니고, 혼자 돌아오실 수 있죠? 전 갈게요.”

 “….”

 일어선 앨리스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계속 떠오르던 수많은 단어는 문장의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평소엔 이렇지 않았는데, 앨리스를 작정하고 칭찬하려 하니 정리가 안 된다. 왜 이러지? 미안한 마음만으로 이렇게 되던가? 문과출신답게 온갖 미사어구는 떠오르는데, 정작 출구가 막혀있으니 계속 안에서 난동만 부릴 뿐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칭찬을 해야 할까? 아니면 사과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애들한테 한 것처럼 뜯어보면서 느낀 점을 말해야 할까, 지금 붙잡아야 하나? 나중에 말해도 될까? …항상 냉정한 내가 왜 이러냔 말이야.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서 결국, 나온 말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였다.

 “수영복, 어울렸어.”

 “….”

 걸어가던 앨리스가 멈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붙잡지 않으면 다신 쥘 수 없는 헬륨가스 풍선처럼 지금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느꼈다.

 “…잘, 어울렸어. 갈아입은 게, 아까울 정도, 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모르겠다. 나오는 말이 왜 이럴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정말 많은데, 그 중 하나도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없다. 답답하고, 그래서 초조하다. 초조해서, 답답하다. 정말 노을을 받아서 감정적이 된 것도 아닐 텐데.

 앨리스가 돌아보았다.
 웃고 있었다. 자신을 비추는 노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일까, 언제나 보던 얼굴일 텐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이건 설마‥.

 멍하니 있는 나에게 앨리스는 한걸음씩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실래요?”

 “어… 뭐?”

 “멀어서 잘 못 들었어요.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바보처럼 말이 더듬어져서 나오지가 않는다. 뭔가 엄청나게 부끄러운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나를 주시하는 그 눈동자에 이끌리듯 다시 입이 열렸다.

 “수영복, 잘, 어울렸다고….”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던 앨리스는 아까 전 활짝 웃는 것과는 달리 갓 피어난 꽃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후후, 하며 웃었다.

 “그 말 한번 듣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네요, 정말. 어차피 말해줄 거 아까 입었을 때 말해줬으면 좀 좋아요?”

 “아, 뭐. 음. 그러게.”

 “그래도, 말씀해 주셨으니 됐어요. 칭찬 고마워요,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깔끔하게 해결된 것 같으면서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뭐야, 이거? 주변에 말썽쟁이들이 없어서 천만 다행이다.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애들 얼굴도 못 봤을 거야. 아니, 언제까지 얼어있을 건가. 그만 정신 차리자.

 앨리스가 능청스레 받아줘서 그런지, 나도 조금은 냉정이 돌아온 것 같다. 동시에 부끄러움도 몰려오지만, 그걸 신경 쓰면 상처받는 건 나다.

 화제를 돌리자.

 “큼, 흠,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앨리스?” 

 “노을한테 치유 받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

 “후후, 농담입니다. 아이들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그만 돌아갈까요?”

 그렇게 말하고, 앨리스는 뒤로 손깍지를 끼고서는 아까처럼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었다. 아까랑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어딘가 퐁퐁 튀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그 뒤를 쫒아가 옆에 나란히 섰다. 슬쩍 보니, 살짝 붉은 얼굴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아까 파이 요원님이 인사불성이라고 뭐, 말 못할 행위를 하신 건 아니겠죠, 요원님?”

 “무슨 소리야. 주정뱅이 상대라고, 주정뱅이 상대. 난 그 녀석하고는 절대 술자리를 가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

 “후후,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니 저도 파이 요원님의 주사가 궁금해지는걸요?”

 “말도 마. 그것보다, 저녁은 제리가 준비해 주기로 했었지?”

 “네. 제리 요원님 요리솜씨 아시죠? 기대하셔도 좋아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재료 중에 와인이 있었는데….”

 “좋아, 그건 절대 후배한테 먹이지 말자고.”

 아까 전까지의 그 분위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가는 동안 이런저런 잡다한 말을 나눴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 노을은 거의 다 넘어가 있었다.

 하루 동안 별 일을 다 겪었다. 이게 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해변가와 수영복 덕에 일어난 일이라니 웃음도 안 나온다. 그러나 그것 덕에 하나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 모처럼 휴가를 와서, 헌팅도 한번 못 하고 새로운 만남 역시 한 번도 없었지만 이 생각할 거리 하나만으로도 충실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만큼은 귀찮다고 미뤄두고 대충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물론 성격상 –설마 만에 하나라도, 내가 팀의 오퍼레이터에게 그런 감정을 가졌을 리 없다. 아까 전에 떨리던 그 감정은 그냥 하루 종일 상처받아서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답을 내려볼까도, 잠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고 싶지 않다.

 이 감정이 진짜 그 감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해운대에서의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 그 답을 내려야겠다.

 -그렇게 바라던 휴가를 와서,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수영복 덕에 할 일이 생겨 버렸다. 정말이지, 나는 쉴 수가 없다니까.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볼프앨리 파세요(소근)
2024-10-24 23:23:5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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