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철부지에서 소녀가 되기까지

유진씨 2019-06-30 1

키워드 > 부산ㅣ광안대교





 살갗을 따갑게 파고들던 해가 모습을 감췄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수히도 많은 여신의 별을 띄워 보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어느새 달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고, 나는 이내 새침하게 눈길만 한 번 던져주고 반응을 말았다. 덥지 않은 밤 날씨와 저 멀리 보이는 별들이 나를 감성에 물들게 한 탓에 뺨이 붉게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낯과 다름이 없었다. 그저 나는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한 올씩 흩날려 뺨을 간지럽혔기 때문이라며 혼자 둘러댈 뿐이었다. 흠씬 달아오른 낯을 식히려 다홍빛 머리를 쓸어넘겼고,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손목시계는 10시가 다 되어감을 알리고 있었다.
 벌써 10시네. 빨리 안 가면 잔소리 듣겠다. 눈을 한 번 더디게 깜빡이고는 숙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는데, 바다가 왜인지 파도를 들입다 일렁여서 나를 불러세움이 그 이유였다. 성을 내고있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파도에 놀라 바다를 응시하던 와중에 내 눈망울 한 켠에 아스라이 반짝이는 대교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저 다리가… 그래. 광안대교였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 처음 마주친 대교였다. 제법 긴 길이에 앞서 밤이 되면 아름답게 빛이 난다는 재리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오색찬란한 야경들과 바다 위로 떠다니는 잔물결이 우수에 잠긴 분홍빛 눈망울에 한 아름 담겼다.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 대교는 아까 보았던 손목시계의 시침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ㅡ그러니까,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놓고 시간 따위는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ㅡ

  

 "재리… 당신은 이렇게 그림같은 풍경을 보며 살아왔군요."



 새벽이 되어 파도가 나를 바닷속으로 끌고 가도 행복할 것 같아요. 어쩌면 날 마중 나온 달님에 뺨이 발그레해진 순간부터 이 짧은 밤에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겠군요. 다만 내가 분에 못 이겨 바람 핑계를 대며 부정한 것뿐이었겠지.
언제나 그랬다. 난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져 본 적이 없었고, 마냥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어리광만 냅다 피우기 일쑤였다. 그런 주제에 조그마한 입술은 항상 완전무결이라며 떠들어 대었는데,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나의 지난날들이 이 아름다운 야경에 묻혀 사라지기를 바랐다.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바다는 내게 성을 내었지만 잔물결에 광안대교의 야경을 한 아름 담아 보낼 만큼 날 사랑했고, 난 그런 바다를 받아들이고는 잔물결에 잔뜩 담긴 야경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내 분홍빛 눈망울에 비추었다. 내게 밀려와 분홍빛으로 물들어버린 그 야경들을 무거운 눈꺼풀로 덮어 감추면 시원스레 부는 바람이 내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알았으며, 철부지를 벗어나 소녀가 되었다. 



 "좋아. 결정했어. 이번 여름휴가는 부산이야."



 별안간 결정한 여름휴가의 행선지는 부산이었다. 달님과 별님이 나를 마중 나오고, 바다가 떠나가는 나를 붙잡는 곳. 그리고, 저 너머로 광안대교가 보이는… 이곳.












"이 오색 영롱한 야경들이 위성처럼 머무니, 내게도 여신의 가호가 깃들게 해주세요."



한껏 미소지어 발그레 올라온 낯과 꼬옥 주먹 쥔 알량한 왼손이 달빛을 받아 예쁘게 빛났다. 주머니 속 잊고 있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만 들어오라는 문자를 보냈을 게 눈에 훤했다. 밤하늘에 작별인사를 고한 후 발걸음을 돌렸을 때, 바다는 그제서야 내게 성을 내지 않았다. 
2024-10-24 23:23:4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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