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임금님이 바닷가에서

파비오리오네 2019-06-28 0

<키워드 부산, 해운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어둠 속에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불규칙한 소리가 세트의 귓가를 여러 번 때려왔다. 그것은 세트에겐 언젠간 들었던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처럼 다가왔다. 한번, 두 번, 세 번…… 몸을 뒤틀며 새벽달 밑에서 흔들리는 파도는 작은 세트에겐 위협적이었다. 세트는 저도 모르게 모래사장에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몸을 웅크린 세트의 모습은 겁먹은 고양이와 같았다.


세크메트, 나의 임금님. 무서우면 도망쳐도 돼.

 

아니 그럴 수 없다. 임금님은 겁먹을 순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세트는 바닷가에서 길을 잃은 도둑고양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서 일어나,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세트의 작은 어깨가 해운대의 달빛 아래서 움찔거렸다. 세트는 언젠간 자신에게 부산으로 향하라던 둥실이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부산은 바다와 가까워요. 요원님의 임무는 바다서 나타나는 B급 차원종의 샘플 수집이에요.

 

바다가 뭐냐. 아무리 둥실이가 바다에 대해 설명해봐도 세트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세트는 바닥에 물이 가득 차 있다는 말에 경계심을 품었다. 세트의 머릿속엔 언젠간 보았던 실험실의 가득 찬 약품 통이 떠오르고 있었다. 약물이 가득 찬 통에는 이따금씩 청녹색 기포가 피어올랐다. 둥실이는 그런 세트의 귀에 들릴 정도로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암튼 보시면 알 거예요.

 

파이는? 땅딸이는? 분홍이도 같이 가는 것이냐? 둥실이는 세트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세트는 부산에 가는 것이 자신 혼자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누구보다 당당한 임금님으로서, 그들을 곁에 두지 못한다는 사실은 세트를 낙담시키기엔 충분했다.

 

요원분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어요. 세트 임금님은 분명 혼자서도 잘 해내실 거예요.

 

하지만! 세트의 표정이 어둡자 둥실이는 말을 이었다.

 

잠깐 딴 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맘때 해운대는 아주 멋지거든요.

 

뭐가 멋지다는 것이냐. 세트는 고개를 들어 바닷가를 훑었다. 노란 달빛에 물든 바다는 크게 입을 벌렸다 닫았다 세트를 위협했다. 세트는 자신이 읽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와 맞서 싸우는 임금님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다. 나는 용감한 임금님이다. 세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세트는 둥실이의 말대로 늦은 밤에 미리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도착했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다는 것이 세트 임금님의 신조였다.

 

바다는 어때, 세크메트?

 

코가 무척 시리다. 세트는 말했다. 알 수 없는 짠내가 세트의 코끝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나도 좋지 않다, 안나. 부산이 멋지다는 건 둥실이의 거짓말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 세크메트. 목소리가 세트를 달랬다.

 

한번 귀를 기울여봐.


세트는 모래사장 중앙에서 바닷가로 귀를 기울였다. 새벽 파도는 잠깐 고요하다 싶다가도 크게 몸을 일으키며 거대한 소음을 냈다. 세트는 큰 소리에 어금니 한쪽을 꽉 물어댔다.


어때?

 

목소리에 세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안 된다. 왜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이냐.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바다에 오며 마음이 편해진다나 봐. 어때, 세크메트? 한번 물에 몸을 담궈 봐. 싫다. 세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트의 임무는 바닷가에서 샘플 채취를 위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랬잖아. 잠깐 딴 짓을 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라고.

 

물에 몸을 담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아마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저 물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

 

아마 우리 발이 닿지 않을 거야.

 

그럼 하고 싶지 않다. 세트는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 아직 시간은 많아.

 

그런 건 필요 없다. 세트는 파이가 보고 싶을 뿐이다.

 

여긴 너무 춥다. 세트는 목소리가 떨렸다. 여름 공기는 습했지만, 몸 한 구석이 계속 시린 것이 세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딘지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누가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금새 울적해진 세트를 목소리가 살며시 건드렸다.

 

우리가 연구실에서 도망치던 때 기억나니, 세크메트?

 

, 물론이다. 비참했다. 세 번이나 도망쳤지만 어른들은 끝내 세트를 찾아냈다.

 

어쩌면 저 바다에 빠지면 그들이 우릴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몰라.

 

그게 정말이냐? 그럼 바다는 좋은 것이냐? 근데 왜 그때는 바다가 없었던 것이냐?

 

아마 거기는 부산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바다는 부산에만 있는 것이로구나!

 

아마도.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목소리가 신경 쓰이는데, 갑자기 파도가 길게 혀를 뻗어 세트의 발밑을 건드렸다. 세트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차갑다! 발이 젖은 것이다! 세트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텅 빈 해수욕장. 세트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버렸다.

 

저런 거에 몸을 담구면 세트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아. 나의 용감한 임금님이 바다에 빠져 죽을 리가 없잖아.

 

세트는 파도가 닿지 않는 곳까지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올랐다. 세트는 적당한 모래사장 위에 자리 잡고 쓰러지듯 앉았다. 세트의 눈에 바다가 비쳤다. 부산의 바다 너머는 달빛이 줄 하나를 그어놓고 있었다.

 

저 바다 너머에는 뭐가 있는 것이냐.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혹시 보고 싶은 것이냐? 그럼 이 세트가 직접 바다를 가로질러 보겠다.

 

아까는 물에 몸을 담구기 싫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안나가 보고 싶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어쩐지 세트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스친 것 같았다. 세트의 입 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나의 용감한 임금님.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냐?

 

충분히 쉬어 두도록 해, 세크메트. 곧 해가 밝을 거야. 바다는 더욱 선명해질 거고 사람들이 몰려들겠지. 그리고 그곳엔 세크메트가 맞서 싸워야할 적이 나타날 거야.

 

세트는 두렵지 않다. 안나도 백성도 이 세트가 지킬 것이다. 모두를 지키는 것이 임금님이 할 일인 것이다.

 

그렇지, 안나? 세트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목소리는 답을 주지 않았다. 안나? 세트는 안나를 부르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안나를 찾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안나는 보이지 않았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세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언젠간 보았던 안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세트의 곁에서 함께하던 그녀는 몸의 주인을 넘긴 채 사라진지 오래였다. 세트는 코를 훌쩍였다. 눈 안쪽이 뜨거워지는데, 세트는 크게 숨을 삼켰다.

 

걱정 마라, 안나.

 

클로저에게 긴 휴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세트도 무의식적으로나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파이의 얼굴이 보기 힘들었다. 세트는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지금 할 일이 있었다. 세트는 모래를 털고 자리서 일어났다. 붉은 눈동자에 햇살이 스미기 시작했다. 부산에서의 짧은 휴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딴 짓을 하는 건 괜찮다고 하지 않았더냐?


세트는 어쩐지 달콤한 것이 먹고 싶어졌다. 

 

2024-10-24 23:23:3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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