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검은양의 어느 여름날

웨이스트 2019-06-27 0


"더워어어어엇!"

신서울 강남 어딘가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무실.
그곳에 비치되어있던 허름한 소파위에 널브러져있던 검은 생머리의 소녀, 서유리는 손발을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공무원이라면 넓고 쾌적한 사무실에서 여름엔 춥게, 겨울엔 덥게 보내는거 아니야!? 아니 왜 이런 날씨에 에어컨 고장이냐구!!"
"애초에 설비가 낡았으니 이렇게 되는거겠지."

그런 유리의 옆, 의자를 까딱거리며 손안의 게임기를 연달아 두들기고 있던 이세하가 말을 받았다.

"에어컨 수리기사는 이틀 뒤에나 온다는데 어쩌겠냐. 그렇게 소리치면 더 더워질텐데."
"가만히 있어도 더운건 똑같잖아. 세하야,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너 오늘 내가 본 것만 다섯개째인데? 이제 하나만 더먹으면 배탈날걸?"
"그러지말구, 가위바위보해서 진 사람이 아이스크림쏘기 어때!"

어느새인가 세하의 옆에 다가온 유리가 파란 눈을 반짝이며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거니와, 결국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해도 유리의 말도안되는 동체시력에 농락당해 자신의 지갑이 원치 않은 다이어트를 하게 될 것이라는걸 알고있는 세하로선 관심을 주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겨우 열여덟살의 소년으로선 생각치 못한 난관이 있었으니.

"세하야, 세하야~ 우리 내기 하자, 응?! 세하야~"
"야, 자꾸 달라붙지말고 떨어져 빨리!"
"응? 으응?"

점점 달라붙어오는 유리의 몸에서 살짝 풍기는 땀냄새라던가, 더운 날씨덕분에 평상시보다 더 풀어해쳐진 요원복이라던가, 그런 요원복의 흐트러진 앞섬사이로 들어나는...

"이세하, 너도 더위먹은거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잖아."
"그,그런거 아니야! 그냥 달라붙으니까 더워서 그런거지!"
"...그렇게 더우면 선풍기 고정시켜줄까?"

리더로서의 아량을 베풀어 좁은 사무실안에서 유일한 냉방기기인 선풍기를 양보하려던 이슬비에게 세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네요. 나는 내가 알아서하니까 선풍기는 그냥 냅둬."
"...이세하, 아무래도 다들 덥고 힘드니까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지금 우리는 비상 대기중이야, 놀고있는게 아니라고.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신경질 부릴 시간에 그 게임기부터 집어넣지 그래."
"어차피 대기라고 해도 할 것도 없잖아?"
"나는 지금 뭘하는것 같은데?"

계속해서 움직이던 펜이 멈추고, 슬비의 따가운 시선이 세하를 향한다. 팀의 리더로서 작전경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해야하는 슬비는 이 더운날에도 머리를 굴려가며 펜을 움직이고 있던 와중이였다.

"그러니까 선풍기는 그냥 두라고 하잖아? 왜 또 시비야?"
"시비는 네가 먼저 시작했지, 나는 호의를 베풀어서...!"
"둘다 싸우지말고 아이스크림이나~"


세하와 슬비의 언성이 높아지려는 때였다.

"자자 얘들아.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지만 이렇게 불쾌한 날씨에서 싸웠다간 둘다 선을 넘을거다. 둘다 진정하고 이거나 먹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이는 깡마른 손으로 들고있던 비닐봉투를 뒤적거렸다. 소파에 늘어진 채 그 모습을 본 유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이스크림이다!"
"아쉽게도 아이스크림은 아니고...자자, 몸의 열을 빼주고 체감체온을 내려준다는 영양제다. 다들 두알...아니, 많이 더우니까 다섯알씩 먹고 기운내라고!"
"...제이씨, 그 영양제는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의 물품인가요?"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에서 찾아낸 희귀 영양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오빠만 믿어."
"...아저씨, 그랬다가 또 저번처럼 구급차 타고 실려나갈거에요."
"후, 역시 어른의 충고는 젊은 애들에겐 잔소리와 구닥다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건가."
"딱히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어찌됐던간에 제이가 흐름을 끊은 덕분에 세하와 슬비의 다툼은 사그라들었다지만 더위는 여전히 진행중.
오히려 사람 한 명이 늘어난 것 때문인지 체감 온도가 더 올라간듯한 느낌속에서 결국 유리가 폭발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 싫어, 싫어! 나는 도망칠거야. 시원한 곳으로! 그래, 남극으로 가자고 얘들아!"
"유,유리야? 진정하고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질거야!"
"야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네가 열내면 더 더워진다니까!?"
"그러지 말고 이 영양제를 먹어! 효과는 확실할거다! 오빠를 믿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검은양 팀의 사무실. 
날뛰는 유리와 유리를 진정시키기위한 세명이 내뿜는 열이 사무실을 가득채우고, 가득채우고, 가득채워...

"다들 그마아아안!!!!"

팡팡팡,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고함 한번만에 이 상황을 정리한건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이자 보호자 김유정이였다.
그녀도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평상시보다 얇은 옷차림에 한 손에는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있는 프리한 복장이였지만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장악하는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잠시 뒤, 유정의 앞에 무릎꿇은 검은 양팀은 이어지는 유정의 꾸지람을 조용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다들 더운건 이해하겠지만 정신차리고 있어야지! 제이씨도 같이 있었으면서 같이 이러면 어떻게 해요?!"
"으음...나는 그저 새로운 영양제를..."
"하아...이래선 될 것도 안될거야.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유정언니, 유정언니도 덥죠? 이래선 클로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할거라구요! 그러니까 우리 에어컨 새로 사요, 새로 사면 당일 설치 당일 운전가능이잖아요!? 네, 유정언니~"
"나도 마음같아선 저 낡은 에어컨을 치워버리고 싶지만...그랬다간 우리 팀은 여름을 컵라면으로만 버텨야 할거야."
"에엑, 최소한 비빔면이라도..."

현실을 마주한 고등학생들이 절망에 빠져있을때.
그들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제이가 자신의 노란 선글라스를 쓱 추켜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유정씨, 그 방법 밖에 없어."
"그 방법이라니요?"
"내가 알기로 클로저 팀은 매해 1년 정기 휴가를 신청할 수 있지. 물론 심사가 까다롭고 성과도 확실해야 승인이 떨어지지만...우리는 미성년 클로저팀이야. 명분은 충분하지."
"미성년 클로저들의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름 휴가...라는 명분인가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서 승인만 떨어지면 휴가라고. 물론 팀 단위의 휴가니 어딘가로 피서를 가는데 전부이긴 하겠지만..."
"피서? 피서라구요! 피서하면 바다죠!!"

더위에 늘어져있던 유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가 어릴때 아빠랑 엄마가 큰맘먹고 해운대로 피서를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좋았다구요! 바닷물은 시원하지, 맛있는것도 많지, 예쁜 언니 오빠도 많지...이야, 지금 생각해도 정말 최고였어요!"
"바다라...그러고보니 나도 바다로 피서를 가본적은 없네. 여름엔 게임 이벤트가 많아서."
"난 유니온 아카데미때 수상 훈련을 위해 몇 번 가보긴 했지만...피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걸."
"후훗, 다들 반응이 좋은데. 상부에 보고해보는게 어때, 유정씨."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이런 환경에 클로저를 방치하는것도 관리요원으로서 실격이니까."
"앗싸!!"

유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고, 그런 유리의 모습에 놀란 슬비가 움츠리고, 그 와중에도 게임기를 슬쩍 들여다보는 세하와 어질러진 약통을 정리하는 제이.

그런 그들에게 검은양의 관리요원 김유정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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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비야...에잇!"
"앗, 나도 질수는 없지!"

갑작스럽게 바닷물을 뿌리는 유리에게 대항하는 슬비.
그녀 역시 바다에 손을 집어넣어 물을 뿌리며 유리의 몸을 적셨다.

"아하하하, 겨우 그정도로 나를 이기려 하다니, 백년은 멀었다구 슬비야!"
"나를 너무 얕보는거 아니야?"

두 소녀가 물장난을 치는 모습,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세하의 어깨 너머로 차가운 탄산 음료 한 캔이 비집고 들어왔다.

"너는 가서 놀지 않아도 되는건가?"
"...쟤네들이 저렇게 신나게 노는데 제가 낄 자리가 어딨어요? 그러는 아저씨도...으아, 아저씨 그 사이에 왜이렇게 탔어요? 그것도 얼굴만."
"훗, 어른은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해야지. 오랜만에 모래찜질을 했더니 어깨와 허리와 무릎의 신경통이 조금 나아진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는 제이가 선글라스를 슬쩍 벗어보이자, 눈 주변만 하얗게 자국이 생긴 것을 본 세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제이씨, 세하야. 여기 있었구나. 저기에서 이런 것도 팔던데 먹어볼래?"
"유정씨, 그렇게 보이는 대로 사먹다간...다음달 카드 고지서와 며칠 뒤 체중계의 숫자가 공포로 다가올거야."
"그,그런건 제이씨가 신경 쓸 게 아니잖아요?!"
"이런이런, 나는 충분히 그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그럴 사이라는게 무슨 말이에요?!"
"그야..."

자신들 만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두 어른을 보고 있던 세하의 얼굴이 다시금 떨떠름해질때였다.

"야, 이세하. 거기에서 그러고 있으면 휴가를 온 이유가 없잖아."

파라솔 아래에 앉아있던 세하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한 소녀의 모습. 바다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드러난 새하얀 피부를 목격한 세하는 고개를 홱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휴가는 쉬라고 있는거라고. 굳이 바다에 들어갈 이유는..."
"이.세.하아~!"
"으아악?!"

슬비에게 신경이 쏠려있던 세하의 뒤를 잡은건 어느새인가 뒤로 돌아온 유리였다.
뒤에서 세하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들어올린 유리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에 왔으면 입수지! 가자아아!"
"야,야,야, 자,잠깐만?!"
"가자아아아!!"

등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 기겁하며 발버둥 치던 세하는 결국 허공으로 붕 떠올랐고, 정신을 차렸을땐 바닷물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채 마구 소리치는 중이였다.

"이슬비, 서유리!! 둘이 합심해서 나를 빠뜨려!?"
"휴가를 즐기지 않으면 굳이 부산까지 온 이유가 없으니까. 팀원을 챙기는게 리더의 역할이라고."
"맞아맞아, 바다에 왔으면 물에 들어가야지!"
"이,이이...너희도 한번 당해봐야지! 귀에 바닷물 들어가는 기분을 알아!?"
"꺄아악! 도망가자 슬비야!"
"어,어어?!"
"거기 서!!!"

씩씩 거리며 해수욕장으로 뛰어가는 세하. 그런 세하를 피해 도망치는 유리와 슬비. 파라솔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붉어진 유정과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제이.

그 풍경은 클로저라는 숙명을 내려놓은 이들의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풍경.

그 모습을 살짝 떨어진 곳에서 보고있던 한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이스크림 사왔어요! 어, 세하형 자는거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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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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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테인아?"

맑은 미성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난 세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미성의 주인을 바라봤다.

도저히 남자애라고는 보이지 않는 뽀얀피부와 동그란 눈동자. 언제나 해맑게 웃고있는 미스틸테인의 걱정스런 얼굴을 본 세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다는?"
"바다요? 무슨 이야기에요? 뭘 받아야되요?"
"응...?"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세하의 머리 위로 게임기가 툭 떨어졌다.

"이세하, 정신차려...휴가는 승인이 안났잖아. 우리가 빠지면 신서울 방위에 구멍이 생긴다고."
"...그랬지 참. 그래서 서유리가 실망한거 달래준다고..."

꿈이였나,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왜 그런 꿈을 꾼걸까. 혹시 그런 풍경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세하에게 미스틸테인이 다시금 말했다.

"하하하, 세하형 꿈꿨구나! 재밌는 꿈이였나봐요, 세하형 계속 웃고있었는걸요?"
"...딱히 그런건 아니였어."
"하여간, 정신차려. 휴가 대신이지만 유정언니가 회식비를 수령해오셨어."
"그래...? 그럼 정신 차려야겠네. 아, 아이스크림 고마워 테인아."
"헤헷, 에어컨이 고장났길래 사왔어요! 형이 좋아하는 비X빅도 있어요!"
"고마워. 아, 그래도 서유리는 주면 안..."
"앗, 아이스크림이다! 테인이가 사온거야?! 우와, 시원해! 고마워~ 맛있겠다! 잘먹겠습니다~!"
"자,잠까안?!"

세하의 고함이 무색하게도, 유리는 아이스크림을 덥썩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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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 집 고기 맛있는데?"
"음, 품질도 훌륭하고 불의 세기도 적당해. 아, 이거 익었어."
"앗, 고맙습니다. 슬비누나!"
"오늘 회식비가 꽤나 많이 나왔다고 하더군. 자자, 많이들 먹어라. 더울땐 몸보신을 해야지!"
"제이씨도 드세요...밥에 영양제는 넣지 마시고."

고기집은 뜨거운 불길이 있음에도 시원했다.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 그 성능에 감탄하는 검은양 팀의 가운데.

"으아앙! 나도 먹을래!"
"안돼, 넌 배탈났잖아!"
"배탈났을때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안될거야."
"유리 누나...그러다가 큰일 날 수 도 있어요."
"그래, 그러니까 고기 대신 이 고기맛 영양제를..."
"으아아앙! 고기, 나도 고기이이!!"
2024-10-24 23:23:3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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