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광 파이

SummerDia 2019-02-22 5

 소녀는 꽃점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 얼음 절벽으로 둘러싸인 추운 곳에서 꽃이 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래서 소녀는 꽃점을 볼 때마다, 자신이 꽃을 만들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꽃은 너무도 정교해서 단단하게 보일 거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꽃잎 부분은 똑똑- 잘 떨어져나갔다.

 소녀는 그걸 가지면서 곧장 놀곤 했다.

 “좋아한다, 싫어한다...좋아한다...! 싫어한다...”

 꽃잎을 하나씩 따낼 때마다, 소녀의 얼굴에선 희로애락의 빛이 시시각각으로 지나간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에는 화사한 상승선을, 싫어한다는 한 마디에는 그만큼 쭉 내려가는 하강선을...소녀가 만드는 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짝수 개의 잎을 가질 때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꽃점을 볼 때마다 나오는 경우의 수는 언제나 같았다.

 꽃잎점은 그분께서는, 소녀를 싫어한다, 라는 결과로 항상 나온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한층 시무룩해진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잡아서 새 꽃을 만들어내서 다시 점을 본다. 이런 무의미한 행동을 왜 계속 하는 걸까? 소녀를 가끔씩 찾아오는 더스트가 항상 하는 생각이다.

 자기가 온 목적은 그런 소녀를 놀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에, 더스트는 헛기침을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부르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소녀를 불러본다.

 “오랜만이네, 파이.”
 “더스트...”

 한창 자신만의 세계에서 행복감에 빠져 있던 소녀의 얼굴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파이라고 불린 소녀는 검을 이미 검집에서 살짝 뺀 상태였다. 검의 힘을 아주 조금만 개방시킨 것인데도 불구하고, 더스트가 서 있는 곳 중심 외의 모든 곳에 날카로운 얼음벽이 순식간에 세워졌다. 그 벽에 붙은 얼음송곳은 전혀 가다듬지 않은 상태라 그 끝은 날카롭게, 누군가를 찌를 기세였다는 듯이 진열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려고 하던 것을 도중에 멈춘 것인지, 더스트의 얼굴과 불과 몇 센티미터의 차이밖에 나지 않은 가장 뾰족한 얼음 창은 더스트의 얼굴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아군은 아니지만, 새삼 자신을 놀라게 만드는 그 솜씨는 칭찬해주기로 했다.

 “여전히 넘쳐나는 힘이네. 그분의 은총은 잘 받고 있나?”
 “네가 여기엔 웬일이지? 설마...”
 “아, 안심하라고. 너에게서 ‘그분’을 빼앗을 생각은 아직까진 없으니까.”

 아직까지, 라는 말에 파이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이했다. 더스트는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쉽사리 알고, 그 마음을 가지고 놀리는 것을 잘 했다. 예전의 파이였다면 이 교활한 차원종에게 혐오 그 이상의 감정을 내뱉었을 텐데, 지금의 파이는 그와는 다르다. 상대방을 가지고 노는 영악함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닌, 그분의 은총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에 더 위협을 느낀다.

 그 차갑고 무뚝뚝한 손길 하나에도 저렇게 발광을 하는 꼴이라니...역시,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인간을 보는 건 매번 즐거웠다.
 더스트가 말했다.

 “부탁할게 있어서 왔어. 내 일을 방해하는 녀석들이 있는데...그 녀석들 좀 처리해줄 수 있어?”
 “네가 뭔데 나에게 감히 명령을 하는 거지? 나에게 오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분’ 뿐이야.”
 “아, 그렇게 냉정하게 굴지 말라고. 서로 윈윈하는 일이라고?”

 멈칫- 파이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더스트가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인 다음에, 파이를 단숨에 움직일 수 있는 말을 꺼내었다.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분께서, 눈독을 들여 보았던 아이들이야.”
 “...”
 “어때? 넌 그분의 은총이 오로지 너에게만 향하기를 원하지 않았나? 그분을 빼앗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셈이야?”
 “...”

 더스트는 파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이는 그걸 보고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 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멈칫-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파이는 오소소 몸을 떨었다. 도대체 어느 때를 생각하는 걸까, 자신은. 이제는 상관없고, 쓸데없는 어느 시점의 일일 뿐인데. 더스트가 다시 말했다.

 “나, 알아. 네가 그분의 은총을 오롯이 받고 싶기 때문에, 너 혼자 이 추운 곳에 오도카니 있다는 걸. 그 재미없는 점 따위로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걸.”
 “...”
 “하지만 말이야, 여기서 썩히고 있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 안 들어? 나라면 그 넘쳐나는 힘으로, 미리 반란분자들의 싹을 다 잘라버릴 텐데. 아니...너 같은 경우는 얼려버리는 거려나?”
 “잘라...버려? 얼려...버려?”

 관심을 보이는 파이에게 더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됐어. 이제 길이길이 날뛰는 일만 남았군.

 그리고 더스트의 예상대로 파이는 곧장 내부차원을 향해 날아갔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 하나의 재앙을 몰고 가는 파이. 이미 그녀가 내부차원에 한 발짝 발을 디딘 순간부터, 세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출발, 시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더스트는 아주 신나라 하고 있었다.



* * *



 더운 열기로 가득한 마천루 옥상. 열풍만 몰아치던 옥상에서, 어느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클로저들은 곧바로 출동했고,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 중 한 명은 무심코, 이런 말도 꺼냈다.

 “파이...선생님?”

 재앙을 마주친 어느 클로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괴물 등등의 호칭이 아깝지 않은 이 상황에서, 루나는 파이를 친근하게, 그리고 향수를 듬뿍 닮아 ‘선생님’ 이라는 최상의 호칭으로 불러주었다.

 그 호칭에서 파이의 마음속에는 잔잔한 물결파가 살짝 지나갔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다시, 파이의 마음속에는 두꺼운 얼음벽과도 같은 그분의 은총으로 가득 찬다.

 더스트가 말한 그분의 은총을 가지고 싶어 하던 자가...저들...그러니까 <사냥터지기> 팀이었단 말인가? 일리가 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서 보아온 그분의 은총을 저 사람들도 똑똑히 보았을 터이니까. 자신은 몰랐지만 욕심을 가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만큼 그분은 위대하고, 또 위대하니까!

 파이는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않고 눈앞에 있는 건 닥치는 대로 얼려버릴 작정으로 내려온 거니까. 하물며 저 자들이 그분을 넘보려고 한다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그래도 예전에 같이 있던 자들로써, 예의상 말 하나는 해주고 처리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파이는 새삼 놀랐다. 자신을 아직도 ‘선생님’ 이라고 불러주며, 제자 노릇을 하는 저 정의로운 클로저가 있다는 것이.

 파이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도 날 ‘그렇게’ 기억하고 있던 건가요?”
 “파이 선생님...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왜 선생님께서 차원종의 편에 서 계신 거죠? 그리고 그 아우라는 또...!”
 “먼지를 퍼트리는 참모장이 말한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었다니...”

 파이는 루나가 하던 말을 잘랐다. 갑자기 과거의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생각되어진다. 아, 바로 솎아 내버릴 것을, 왜 이제 와서야 하는지. 될성부를 떡잎은 자랄수록 처치하기 곤란해지는 법이다. 이 모습은 영락없이, 아주 잘 자란 제자를 보고 각박하게 평가하는 전(前) 선생님의 모습이다.

 “이봐, 파트너.”

 아, 또 그리운 얼굴을 보았도다. 저 신경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얼굴은...분명 기억한다. 굳이 풀네임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모이니 왠지 동창회라도 하는 기분이네요.”
 “너...이 멍청아...그렇게까지 해서 너한테 남아있는 게 뭔데?!”
 “왜 당신은 보자마자 화를 내시고 그러시죠?”

 당신은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대요. 아, 맞아. 중요한 사안일 때는 그래도 일은 좀 했죠. 그럼 그만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그냥 단순히 당신이 변한 건가요?

 파이의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볼프강은 매우 기가 막힌다. 아니, 그보다 볼프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분위기도, 느껴지는 위상력도, 심지어 외모까지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는데 볼프강 또한 루나처럼 파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옛 파트너라는 걸 바로 눈치채버렸다. 이 눈치 빠름이 이리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너...네가 그렇게 누누이 말하고 다녔던 ‘의’ 라는 것이 결국 이런 것밖에 안 되는 거였냐?!”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방금 ‘이런 것’ 이라고 칭했습니까? 도리어 제가 기가 막히는 군요.”

 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분의 은총을...감히 그렇게 폄하하다니...용서할 수가 없군요. 검은 이미 검집에서 반 이상이나 나온 상태였다. 더스트가 몇 날 며칠을 그리 달구어 놓았던 공기가 삽시간에 서늘해진다. 아니, 아예 뼛속까지 차가워진다. 이 영원한 겨울 속에서 처참하게 죽기나 하세요. 파이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승부는 금방 갈라졌다. 애초에 제3위상력을 가진 파이를 이길 자는 적어도 이 마천루 옥상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연약하고, 모방만 급급하게 한 제2위상력을 가진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파이는 자신의 본래의 능력인, 시간 또한 아무런 제약 없이 완벽하게 조종을 할 수 있었다. 적들의 시간을 멈추고, 그 공간을 통해 뾰족한 얼음을 지면 위로 꿰뚫는다. 잔인하지만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사하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제일 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래 버틴 쪽은 볼프강이었다. 역시 이런 것에서도 경험의 차이가 있나 보다. 뭐,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오래 숨이 붙어 있는 것이 리스크인 듯 했지만 말이다.

 죽어가던 와중에도, 얼음이 몸을 관통해서 많이 아플 텐데도 볼프강은 마이페이스였다. 지금 제일 멀쩡하게 서 있는 파이를 걱정하는 것이, 딱 그러했다.

 주마등이라도 본 것일까. 죽기 전에는 사람이 아주 솔직해진다고 하는데. 지금의 볼프강이 딱 그랬다.

 “우리...네 걱정 많이 했다고...”
 “...”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는...사실 네가 차원종의 편에 섰다는 건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어. 검은 책을 통해서도, 또 네가 저지르고 다닌 흔적들을 통해서도...”
 “그래서 뭐죠? 하고 싶은 말이 뭐죠?”
 “...”

 냉담한 파이의 반응에 볼프강은 잠시 실소를 터트렸다. 이미 늦어버린 거겠지. 늦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냥터지기> 팀이 파이의 단 한 번의 공격에 이렇게 전멸하기 전의, 한사람씩 진심을 담아 말했던 희망, 꿈, 권유 등등이 통했을 게 분명하니까.

 -파이 선생님!
 -파이 쌤~!!
 -여어, 파트너.
 -...

 이 작은 말 하나였어도 파이는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웃어주던 이였는데, 지금은...

 “때깔 좋은 과거 회상은 그쯤에서 하시는 것이.”
 “...”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이건 시간 능력을 쓰는 제가 자부하죠. 헛꿈은 그만 꾸시는 것이.”

 더 이상...말하기 버거웠다. 무엇이 달라졌으며, 그런 점으로 인해 얼마나 다른 결과가 펼쳐지었는지에 대해 계산하는 것이.

 이제는 소용...없는 일인 거 같지만 말이다. 눈앞이 차차 흐려진다. 이제 볼프강도 슬슬 한계인 모양이다. 쿨럭- 기침을 짧게 한 번 했을 뿐인데도, 온몸이 욱신거린다. 툭- 툭- 볼프강의 시야에 얇은 얼음 지면 위로 새빨간 피가 떨어지는 것이 잡혔다.

 볼프강은 남아있는 힘을 짜내어 파이의 뺨을 쓸었다. 미동도 없는 파이의 피부는 싸늘해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파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보다 더 차가워진 현재의 파이를 보며 볼프강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래도...난 믿어. 네가 올바른 길을 갈 거라는 걸...”
 “...”
 “네가 그토록...지겹게 말하던 ‘의’ 라는 거...넌 결코 버리지 않았을...거야. 분명 네 본래의 길을 되찾...”
 “...”

 볼프강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미동 없는 볼프강을 잠시 보던 파이는, 찬찬히 볼프강을 중심으로 있는 처참하게 뚫려진, 눈에 익은 사람들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죽었군요, 선배. 그리고, 모두들.”
 “...”
 “바보, 같군요.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나를 그 때처럼 봐주다니...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패배하고, 제가 이긴 거지만요.”

 또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죽었죠. 그와는 반대로 난 살아남았고요.

 주변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위상력은 이제 없었다. 일단은 끝난 것이다. 파이는 느릿하게 검을 다시 검집에 우겨넣었다.

 왜일까. 평소라면 그분의 은총, 사랑, 모든 것을 나 혼자 지켜냈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혀있을 게 분명한데...

 왜 이렇게...가슴 한 구석이 시린 걸까. 도대체 왜...?



* * *



 외부차원으로 돌아온 파이를, 더스트는 거세게 환영해주었다.

 “역시, 파이라니까.”
 “...”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할 줄 알았어.”

 파이는 더스트의 말에 대꾸할 의사가 없었다. 만사가 다 귀찮았다. 하지만 더스트의 저 ‘깔끔하게’ 라는 말은 심히 거슬렸다. 깔끔하다? 더스트가 그 광경을 자세히 ** 못해서 그렇다. 뾰족하게 솟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들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그곳에 찔려 있는 사람들도...멀리서 보면 그렇게 끔찍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더럽히던 게 파이는 떠올랐다.

 파이는 더스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더스트는 태연했다. 더스트는 자신의 불사성을 믿고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파이는 더스트에게 ‘빚’ 이 있었다.

 “나한테, 이래도 되겠어?”
 “...”
 “혹시 그 일이 불쾌하게 느껴진 거야? 너답지 않네.”

 나다운 것이 뭐였더라. 파이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지만 머리가 아파 이내 그만두었다. 더스트의 말은 사실이긴 했다. 파이는 그저 ‘그 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갑자기 그 행동 등을 뒤돌아보게 되다니?

 따뜻한 바람이라도 불어서 잠깐 제정신이라도 든 걸까? 뭐, 제정신이 들었다면 처참할 것들 뿐 인데. 차라리 제정신이 아닌 게 더 좋았을 걸. 더스트는 혀를 찼다.

 더스트는 가벼운 손 인사를 했다.

 “어쨌든 고마워. 나중에 후한 보답은 해줄게. 하암...난 이제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
 “...”
 “그럼 또 보자구~♥”

 더스트는 금방 사라졌다. 사라지는 더스트의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파이는 알 수 없는 분노에 그 분이 직접 하사해주신 검을 부러뜨릴 듯이 잡았다.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열풍을 다루는 더스트의 옆에 있어서 더위라도 먹은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파이는 자신의 거처인 얼음 동굴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입구에서 그 분을 기리며 꽃놀이는 하지 않았다. 좀 더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파이와 똑같이 생긴 소녀가 뉘어 있는 게 보였다.

 파이는 자신의 동생을 가만히 불렀다.

 “슈에...”

 더스트에게 있는 빚이라는 건 이거였다. 더스트는 얼음 속에 갇혀있던 파이의 유일한 자랑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이 검은 본래는 슈에의 것. 검은 이제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슈에는 깨어나자마자 파이를 얼싸안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슈에는 언니의 차가운 얼굴과 피부, 변해버린 모습에 적잖이 놀랬고 따지기 시작했다.

 -언니, 지금 그 모습은...
 -안 되겠다.

 파이는 잠시 혈육의 정과 그분의 은혜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비교한 자신을 못내 쳤다. 감히 그분을 비교할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지!

 파이가 슈에에게 성큼 다가왔다. 생전 처음 보는 언니의 광기 어린 얼굴에 슈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너는 존재해서는 안 돼.
 -...언니?
 -미안하지만, 조금은 자고 있어야겠어.

 조금? 아니, 영원히. 내가 그분을 향한 사랑은 영원히 식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파이는 직접 제 손으로 동생의 시간을 다시 멈추었다. 얼음 속에서 슈에의 목숨을 연장해주었던 것과는 180도 다른 감정으로. 그리고 파이는 만족했다.

 그런데 그 단단하던 극의 빙하가 금이 가는 걸 파이는 오늘 느꼈다. 그리고 그 금을 깨고 나온 것은 억지로 얼려버렸던...것들. 그리고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깊은 허탈감.

 “아아, 대체...”

 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건가!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분은, 그분은! 위대하신 그분은! 절대적이었다. 신이었다. 이 세상 그 자체였다. 그분은 완벽하다. 파이가 그런 위대한 분을 섬기는 건 당연했다.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그분은 그런 만큼 차가웠다. 파이의 간절한 기도에도 아주 작은 유희를 즐기는 듯한  관심만 줄 뿐. 그마저도 주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바라는 건 많지 않습니다...”
 “그저 그 손길.”
 “목소리.”
 “온기...”
 “그것만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보시지 않는 건가요. 바라** 않으신가요. 제가, 아직도 부족한 탓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처음으로 한탄했다.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그저 옛 전우들을 보았을 뿐이고, 그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뺏어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을 뿐인데.

 “...”

 그러고 보니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주던 선배의 손은 참 따스했다. 매정하지도 않고, 따듯하게 마음을 감싸버려서...

 툭- 툭-

 “...”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사방이 영하의 온도를 자랑하는 곳이라 그런지 눈물은 곧장 얼음 결정으로 변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 파이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작은 신호탄이었다. 파이는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선배의 말씀처럼 전 바보가 되었네요.”

 이제는 그런 말을 듣고 대꾸해줄 그들도 이 세상에 없었다.

 파이는 결심했다. 파이는 슈에의 손을 잡았다. 슈에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래도 슈에가 깨어나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파이는 슈에의 손에 검을 쥐어주었다. 본래라면 이 검은 슈에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검의 끝이 자신의 목을 향하게 했다.

 냉기를 다루는 검이라 그런지 금속과 맞닿는 부분이 서늘하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서늘함이다. 파이는 조용히 웃었다.

 이 미천한 목숨 하나로 모든 죄를 갚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의 속죄. 저 하나로 인해 쓰러지는 잎들이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파이는 눈을 감았다. 그 덕에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금 툭- 떨어졌다. 이번에 만들어진 얼음 결정은 이때까지 본 결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슈에.”
 “미안해.”
 “역시 난 구제불능이야.”
 “그런데 주마등...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떠오르는 거야.”

 너는 이 못난 언니를 긍정해줄거니, 부정해줄거니?

 사랑해줄거니, 미워해줄거니?

 그 대답, 들을 자신이 없구나. 게다가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

 파이는 자신의 손에 힘을 실었다. 살갗이 정확하게 베이는 소리. 파이의 눈앞은 방금 전에 본 것과 같은 핏빛, 붉은색이었다.
2024-10-24 23:22:3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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