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담담하게 & 덤덤하게

루이벨라 2018-05-03 5

1. 담담하게(18.04.19)

※ 담담하다(淡淡--) : 1. 차분하고 평온하다. 2.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 3. 물의 흐름 따위가 그윽하고 평온하다. 등등



 임무와 임무 사이에 있는 짬 시간에 세하가 게임을 하는 건 이제는 검은양 팀원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게임기는 언제나 똑같은 모델이었지만, 깨고 있는 게임 팩은 매번 달랐다. 세하가 하나의 게임에 매달리는 건 짧아야 몇 시간,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자신은 하나도 모르겠는 게임을, 심지어 여러 개나 섭렵하는 걸 보면 유리는 참 세하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날도 세하는 자신이 가지고 온 작은 RPG 세상에서의 모험에 푹 빠져있었다. 그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보고 있는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세하의 게임하는 모습을 참 좋아했다. 이런 말을 유리에게 직접적으로 들었다면, 슬비는 질색을 할 것이다. 거의 게임 중독으로 보이는 저 모습이? 이라면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에 집중하는 세하의 눈빛이라고나 할까. 그걸 좋아했다. 초창기에는 세하가 무언가에 '흥미' 와 '열정' 을 보이는 걸 같이 지내는 동안 별로 **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예쁘게 반짝거린다. 지금은 그래도 표정이 많아졌지만, 세하가 유일무이하게 '자신' 을 드러내는 때가 예전에는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할 때밖에 없었다.

 한창 진행되는 또 다른 모험에 세하는 푹 빠져버린 얼굴이다. 그 옆얼굴을 보노라니 어째서 자신이 이런 세하에게 푹 빠져버렸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세하는 보기보다 감정 표현이 극히 적었다. 덤덤하다고 해야하나, 담담해**다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세하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남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이 내비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첫만남에서는 다가가기 어려울 것처럼 굴었다. 뭐, 몇 번 계속 만나보니 겉으로 보여지는 전부가 세하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리 앞에서 잘 웃어준다. 또 눈빛이 예쁘게 반짝거릴 때도 있었다. 그래, 이렇게 속내를 표현하는 것도 얼마나 장족의 발전이랴! 유리는 마음속으로 '장하다, 서유리!' 를 연신 외쳤지만 그래도 아직은 약간 부족한 감이 있다. 부족하다니, 무엇이?! 저거! 유리는 여전히 게임할때만 보여주는 세하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표정을 정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참 서러웠다.

 조금 속상하기도 하고, 장난(?)도 쳐보고 싶어서 유리는 세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세하는 자신의 앞에 유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에도 꿈쩍도 안한다.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세하의 눈높이에 맞게, 살짝 앉았다. 그림자에 어둡게 드리워져서일까, 아니면 모처럼 렌즈를 안 낀채로 게임을 하고 있어서일까. 마주보는(세하의 시선은 게임기에 향해 있었지만) 세하의 눈이 너무도 이뻤다.

 그 모습에 속으로 연신 온갖 감탄사를 내놓으며 유리가 세하에게 대뜸 물었다.

 "세하야."
 "왜."

 귀찮아하지는 않지만, 딱 거기까지만 긋는 선. 게임 화면을 힐끗 보니 아마도 보스를 깨고 있는 듯 했다. 엄청 집중하고 있구나. 세하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리 집중하는 걸 보면, 지금 유리가 할 장난의 내용도 별로 기억하지 못 할거 같았다. 백프로!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게 하게끔, 유리의 톤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세하야, 나 좋아해?"

 어떡해, 어떡해! 말해버렸어, 말해버렸어!! 다행히도 지금 여기에는 세하와 유리뿐이었다. 엿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세하만 그냥저냥 지나가주면 되었다.

 '게임에 푹 빠져버린' 세하는 1초도 안 되어서 곧바로 대답했다.

 "어."

 담담하게, 아니 무덤덤하게라고 해야할까?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유리가 물어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예상치 못한 답에 유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냐, 아냐, 진정하자 서유리...!! 세하는 지금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 그냥 Yes or No 라는 답지에서 답을 하나 선택한 것 뿐일거야...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래? 그럼 게임 열심히 해~"

 유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 너무 좋아서 콧노래도 저절로 나오고. 왜 이렇게 입꼬리는 안 내려가는지!!

 유리가 총총걸음으로 저 멀리 사라진 후에도 세하는 열심히 게임 버튼을 바쁘게 눌렀다. 바쁘게 누르는데도 콤보는 계속 엇나가더니 결국 You lose 라는 화면이 게임기에 뜨게 되었다.

 하지만 세하는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세하의 얼굴, 귓불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말했다, 말했다, 말해버렸다...!!'

 유리도 너무 했다. 고백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한창 게임에 집중하느라 모든 벽이란 벽은 다 허문 무방비 상태에서 그렇게 콕 찝어내다니!! 방어라인이 없던 세하는 반사적으로 "어." 라고 대답했다. 유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벼운 스텝으로 저 멀리 가는 것도 세하는 다 가늠하고 있었다. 게임은 대답한 이후부터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아악...!! 정말...'

 뭐, 자기가 유리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이렇게 갑작스럽게 들통이 날 줄은 몰랐다. 다시 생각해도 참 멋없는 고백이었다. 이왕 멋지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는데...

 망해버렸다...

 오늘은 밤새 내내 이불만 찰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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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덤덤하게(18.04.20)

※ 덤덤하다 : 1. 특별한 감정의 동요 없이 그저 예사롭다. 2. 말할 자리에서 어떤 말이나 반응이 없이 조용하고 무표정하다. 등등



 막상 말을 하려니 입술에 살짝 경련이 왔다. 어느 순간부터 떨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자 세하는 헛숨을 내뱉었다.

 이까짓 일로 떨고 있는거야, 이세하? 아니, 애초에 이까짓이라는 수식어를 함부로 붙일 일도 아니었다. 세하에겐 매우 중요한 사안. 떠는 게 정상이었다.

 정작 이런 중요한 '사안' 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 말은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이 말을 받아주는 이도 없다는 뜻. 애초에 세하가 서 있는 이곳은 인적이 없는 장소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꾸해주는 이가 한 명이라도 없기에 더 떨리는 건지도 모른다. 쌍방이 아닌, 제 쪽에서만 무턱대고 감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 상황을 세하는 난감하다라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감정을 간직하는 건, 그 감정을 나눌 수 없기에 더 괴로운 것이다.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세하는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이고 결심하던 일이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 어쩌면 마지막.

 어떻게, 이제서야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참 한스러웠다.

 그 감정만큼 또박또박 한글자씩, 정성을 담아 입에 비로소 담아본다.

 "좋아했어."

 아니,

 "사실 지금도 좋아해."

 그 대상은 바로,

 "유리야..."

 겨우 끝맺음.

 덤덤하게 나오는 고백에 세하는 주저앉을 뻔했다. 사실 무너져내리기 직전까진 갔었다. 그런 세하를 일으켜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좋아한다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었다.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텐데...

 이리 비참하지 않았을텐데...



* * *



 -이 일을 하다 보면 후회할 일 투성이야.

 예전에 만났던 어느 클로저의 충고였다. 잔인하고 슬픈 말을 그 클로저는 꽤 덤덤하게 말했다. 그 클로저의 자세한 이목구비는 기억나지 않지만 눈이 잘 익은 적포도주색이었던 건 기억한다.

 -후회한 적 많으신가요?
 -너무 사적인 질문은 하지 말라고.

 언급하기 싫은 대답을 가벼이 회피하는 것에서 베테랑이네, 라고 느꼈다. 자기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얼굴인데 시선은 자신보다 몇 배나 더 먼 곳은 보는 거 같다.

 -그럼 제일 많이 하는 후회는 뭐에요?
 -'살릴 수 있었을텐데...' 일까?

 살릴 수 있었을텐데...참 뼈대 있는 충고였다. 이 좋은 경관을 두고 무거운 주제를 더 이어나가기는 싫었다. 그건 상대방도 그런 모양이다. 슬슬 마무리 지으려는 낌새.

 -그런 끔찍한 일에도 무뎌진다는 게 참 무섭더군.
 -제가 보기엔 아직 당신은 무뎌진 거 같진 않은데요?
 -제3자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게 더 정확한거겠지.
 -...
 -후회하진 마.

 참 엉성하게 대화는 끝났다. 후회하지는 말라는데...

 글쎄,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우리의 인생은 아니었다.



* * *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요. 특히 찰나의 순간으로 뒤바뀌어지는 일에 대해선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 아이만 잃은 게 아니에요. 모두를 잃었어요. 나 혼자만 살아남았죠.

 하루하루가 원망스러웠어요. 내가 그 찰나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들과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모두가 다 살았을까요, 아님 나도 그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결과가 어떻든 지금 맞이하는 내 나날보단 더 행복했을 거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너무 좋아했어요. 하지만 사람 대하는 게 서툴렀던 난 계속 담아두기만 했죠. 근데 그러지 말걸 그랬어요. 그 아이의 마음은 모른 채 나 홀로 끝나버리는 상처투성이의 짝사랑이 되어버렸어요.

 잊어버릴수는 없네요. 감당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결국 털어놓았어요.

 겨우 내 감정을 전부 토할 수 있었어요. 덤덤하게 목소리가 나가 오히려 내가 놀랐어요. 내가 이리 침착할 수가 있구나. 근데 그건 아니었어요. 후회, 그 짧은 시간안에 얼마나 많이 했는지요.

 답장은 없네요. 없을 거에요. 없을 건 뻔히 알지만 그게 너무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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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어찌 보면 한끗 차이인데도 이렇게 느낌이 많이 다른 단어에요.
2024-10-24 23:19:2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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