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작] [우정미] The Closer - 마음이 닫힌 소녀 - [2]
유리별 2015-02-14 1
죽어있다.
아니 죽어있는 척 하는 것일 테지만. 어찌됐든 죽어있는 것은 스산하다. 특히 옅은 우윳빛 안개를 머금은 새벽녘은 더욱 그렇
다. 마치 거대한 해일에 잠식당하기라도 한 듯 하반신이 잠긴 채 뾰족한 고개만 힐끔 내밀고 있는 빌딩숲의 짙푸른 광경은 아
틀란티스의 폐허를 연상시킨다. 햇살이 지상에 놀러오는 시간과, 그 햇살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호
문쿨루스가 밝게 춤추는 시간에는 신나게, 바쁘게, 유쾌하게, 힘들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주히 삶의 베틀에서 생기를 짜내지
만, 이 별이 빛을 등지고 잠을 청하는 지금은 길가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가로수들조차 바람에 떠밀려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
틈을 타 잠든 도시를 지배하고 싶은 박쥐들이 샛노란 쌍심지를 부릅뜨고 텅 빈 시가지를 떼지어 질주하는 모습이라던가,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깜박거리며 코를 고는 건물 사이사이도 보일 법도 하다만 오늘만큼
은 이 도시 전체가 음울한 분위기에 미사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물며 백화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차원전쟁 종전 직후, 가택 복구가 우선이라며 반발하고 나선 거주민과 난민들의 의견
을 무시한 채, '사람은 어느 때건 품위 유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는 부유층 내외의 기품있는 제안으로 강남 한복판에 다른 어
떤 건물보다도 먼저 들어선 이 탐욕스런 작품의 내부도 밖의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아직 동경의 시선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는 마네킹들 - 비단 전신뿐만이 아니었다. 사지 없이 상체만 달린 녀석이라던가 - 은 헐벗은 채로 곳곳에 매달려 있고,
쇼타임 전까지 검은 천으로 비밀스럽게 몸을 두른 채 기다리고 있는 진열장들은 마치 여기저기 버려진 흑관 같았으며, 며칠 전
감지 센서가 고장나버린 에스컬레이터는 찾아오지 않는 고객을 전 층에 걸쳐 삐걱대며 모시고 있었다. 중앙이 열려있는 내부
구조는 커다란 건물 특유의 조용한 울림을 톡톡히 증폭시켜주었고 전면, 심지어 천장마저 유리로 덮어버린 설계는 짙게 깔린
안개 속에 고립된 묘한 느낌을 들게 했다.
이 곳이 정말 낮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리는 그 곳이 맞나 싶을 정도인 여기 시간의 광장에서, 이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요사스러운 옷차림을 한 남자가 우두커니 무릎꿇은 채 있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한 마리의 셰퍼드처럼. 누구를 언제
부터 마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때쯤, 검은 붕대를 두른 남자의 눈앞에 허공으로부터 룬이 생성되어 하강하며 어떤 형체를 그
려내었다. 두 가지였고 사람의 형체였다. 한 쪽은 남자였고 다른 쪽은 여자였다. 둘은 베이지를 띤 매력적인 은발에 그윽한 보
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의 옷차림에 못지않은 화려한 모양새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어린아이였다.
"죄 많은 양이 감히 주인님을 뵈옵니다."
그들을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그가 붕대에 가려진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미안, 좀 늦었지?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인지도 꽤 됐는데 아직도 시차적응이 안 돼서."
소녀로 보이는 쪽이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암, 누나도 참. 시종에게 사과하는 주인이 어디 있어? 게다가 우린 아직 이쪽 시간으로 3시간 33분밖에 늦지 않았다고. 이
정도면 우리가 이 친구에게 선물해준 미래의 티끌만큼도 되지 않아. 하여간 우리 누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안 그래, 칼
바크?"
소년 쪽은 기지개를 한번 켠 뒤 보이는 나이에 맞지 않는 조소를 지으며 자신의 시종에게 동의를 구했다. 자신의 어린 주인들
을 꽤 오랜 시간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칼바크라 불린 남자는 즉각 공손하게 응수했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는 이 길 잃은 양의 눈을 뜰 수 있게 도와주신 존재. 주인님께서 저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
이 저, 칼바크 턱스에게는 기쁨 그 자체일 뿐입니다."
"좋아, 좋아. 역시 그 충직함, 마음에 들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충성심보다 더 뛰어난 너의 연구 능력을 보고 싶은데. 성과는
가지고 온 건가?"
"아, 그거라면."
주인님의 요구가 들어오기 무섭게 그는 팔에 차고 있던 장신구를 살짝 풀어헤쳤다. 이윽고 장신구가 층을 이루며 겹겹이 펼쳐
지더니 그 안에 작은 보랏빛 차원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차원문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서류용 가방이었다.
인간이 차원문을 연 이 놀라운 광경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모양인지, 소년소녀는 그저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검갈색 가방에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꺄핫, 이게 뭐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담한데? 애쉬, 얘 은근 깜찍한 걸 좋아하나봐!"
쌍둥이 누나가 동생의 옷깃을 집게손으로 잡고 까르르 웃어댔다.
"그러게말이야. 이봐, 칼바크. 정말로 이 조그마한 게 '문'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야?"
"이 미천한 양이 어찌 주인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저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나마 만든 이 녀석의 성능을 주
인님의 목전에서 시연해도 될는지요."
애쉬가 의심 반 호기심 반의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이자 칼바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가방의 양 옆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
리고 가방을 열어젖히자, 그 안에서....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표정이 차가워진 소년이 하인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군단의 존재들이 모두 어디서 열릴 지도 모르는 차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
까."
"그래!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뛰쳐나가는 엘리베이터 속 인간들도 아니고 말이야!"
소녀는 여전히 생글생글하게 자신의 하인을 옹호해주었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네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거리는 버릇이 있는 애쉬가 연신 바짓단을 두드려대던 그때, 별
안간 소녀의 옆에서 팔다리가 달린 괴상한 식물이 튀어나왔다. 맨드란이었다. 소녀에게 깜짝 선물을 해준 녀석을 시작으로 가
방 주위를 기점삼아 스캐빈저, 보이드, 스내쳐, 스컬 같은 온갖 C급 차원종들이 즐비하게 쏟아져 나오더니 얼마 후 펑 하는 작
은 소리와 함께 가방은 터져버렸다.
"호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꼬마 주인님을 약간 놀라게 만든 모양이다. 이 모습을 본 시종은 흐뭇한 듯 득의양양해졌다.
"어떻게, 마음에 드시는지요?"
"꺄, 우리 퍼피한테 줄 먹잇감이 잔뜩 나왔네! 녀석이 좋아하겠어!"
"... 가방이 열렸을 때 위상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당연히 차원문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테고. 어떻게 된 거지? 가방 속에
녀석들을 숨겨놓기라도 한 건가?"
"약간 다르지만, 맞습니다."
우쭐해진 칼바크가 말을 이어갔다.
"유니온의 연구원 시절, 저는 차원문 발생에 관한 연구팀의 일원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는 갑작스런 위상력의 증폭으로 인한
위상변곡률의 폭등에 의해 차원문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발을 뻗은 결
과, 그런 차원문의 특성 상 증폭된 만큼의 위상력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면 위상변곡률이 점차 안정화되어 결국 차원문이 닫
혀버리게 되는 것도 알아냈지요. 여기서 이 어린 양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습니다. '만일 위상력의 개입 없이 인위적으로 위
상변곡률을 조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에 도취된 듯 양팔을 활짝 펼치며 황홀해했다.
"그리고 이 어린 양은 만들어 냈습니다! 여는 순간 발생하는 특수한 자기장으로 주변의 위상력을 왜곡시켜 일시적으로 위상변
곡률을 상승시키는, 이 '가방' 을 말입니다!"
하인의 장황한 설교를 주의 깊게 들어주던 애쉬는 매우 감탄한 눈치였다.
"반경의 위상력을 없애 주변 공간 자체를 차원문으로 만들어버리는 도구라... 꽤 멋진 발명품이잖아, 이거."
하지만 누나 쪽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야, 칼바크. 이 조그마한 녀석으로 정말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아? 방금 튀어나온 귀여
운 친구들을 보니 영 미심쩍은데?"
터져버린 가방의 잔해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녀가 생글생글한 웃음과는 대조적인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 아직은 아웃 게이트의 발현까지 성공한 상태입니다. 때문에 이차원에서 이 곳으로 넘어오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인 게이
트의 생성 좌표가 불안정하기에 어느 차원에서 소환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인님께 의표를 찔린 어린 양은 약간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눈 감고 인형뽑기를 하는 꼴이로군."
"같은 연유로 이 쪽에서 인 게이트를 여는 것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잘못 들어갔다가 자칫 블랙홀같은 중력의 덩어리에 휘말
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 전에, B급을 넘어선 존재는 이 정도의 위상변곡률을 이용한 차원문으로는 통과 자체가 불가합니다만..
.."
"뭐야, 그럼 우리가 돌아갈 수 있기는커녕 우리 퍼피조차 여기로 놀러올 수 없는 거란 말이잖아! 이거 순 엉터리네!"
소녀 주인님의 기분이 언짢아진 모양이다.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보랏빛으로 물들며 날카롭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워워, 진정해, 더스트.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연구 성과라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공간을 잇는다는
것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쯤이면 여기 인간 친구들에게 안겨 줄 선물로는 충분하잖아?"
이번에는 애쉬가 칼바크를 감싸주었다.
"하지만, 난 하루빨리 우리 퍼피를 만나고 싶다구! 녀석이 굶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너무 아프단 말이야!"
"그 놈의 덩치가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걱정 말라고, 녀석을 누나의 품에 안겨주는 일은 우리의 충직한 집사님이
책임지고 성공시킬 테니까. 안 그래, 칼바크?"
"... 염치 불구하고 이 칼바크 턱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어느새 그는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무릎을 꿇은 채 있었다.
"아니야. 나는 굉장히 만족했어. 사실 좀 놀랐거든. 이런 식으로 발상을 전환시킬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지. 뭐, 누나
는 약간 뾰로통한 눈치지만."
"흥."
누나 쪽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베일 것 같던 공기의 흐름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가 풀린 것 같은데. 그러면 칼바크, 우린 이만 가 보겠어. 다음에 만날 땐 조금 더 발전 된 성과를 기대하지. 그리
고...."
소년은 룬을 그렸다. 잠시 뒤 애쉬와 더스트는 룬에 감싸인 채 허공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줄 알고 지루해하는 인간들에게 소소한 즐길거리를 안겨 주라고. 너의 그 가방으로 말이야."
"그러면 우리 퍼피를 오늘 불러오지 못한 걸 눈감아줄게! 바이바이, 칼바크! 다음에 보자!"
예의 그 위화감을 안겨 주는 조소를 남기고.
"... 죄 많은 양의 죄를 씻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허공에 혼잣말을 읊조리던 하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자, 그럼 시작해보도록 할까."
짙은 안개는 붙잡고 있던 도시의 바짓단을 놓아주고 있었고,
"나와 주인님의 복음을 설파할 준비를."
남자의 뒤로는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스트, 저 녀석에게는 왜 거짓말을 한 거야?"
데미 플레인을 걸어가다 문득 궁금한 게 생각난 애쉬가 누나에게 물었다.
"응? 무슨 거짓말?"
잡아떼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더스트는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왜, 그거 있잖아. '우리를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
"아, 그거?"
아무래도 뭘 말하는지 몰랐던 모양인 더스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심심해서지! 이룰 수 없는 것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지 않아? 그리고...."
더스트는 애쉬의 손을 잡았다. 이어 다른 한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러자 돌연 공기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데미 플레인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리더니, 쌍둥이 남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차원전쟁 시절에도 본 적이 없던, 상식을 초월한 크기의 차원문이....
"우리 정도의 존재가 설마 이 정도 거리를 왔다갔다 못 하려고? 애초에 차원문을 여는 장신구를 녀석에게 선물해준 것도 우리
였잖아? 이 정도면 눈치채지 못한 쪽이 바보 아냐?"
소녀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 가끔 보면 무섭다니까, 우리 참모장님은."
"무슨 소리야. 덕분에 꽃미남 박사님한테 끝없이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잖아?"
"속은 줄도 모르고 말이지."
"후훗. 넌 평생 여자의 마음을 모를 걸?"
"알고 싶지도 않아."
벌려놓은 차원문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둘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갔다.
"생각해보니 그 미남 과학자의 얼굴은 왜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야."
"장미꽃을 보면 꺾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돼?"
"... 그럼 줄기를 꺾지 왜 꽃잎을 뜯어버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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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부터 어제까지 휴가였습니다.
휴가 동안 공방전만 죽어라 달린다고 소설 쓸 생각을 못했었네요...
아무쪼록 맘에 드셨으면 합니다!
p.s
데미 플레인이 차원종 세계의 차원과 우리 세계의 차원의 중간계인지, 아스타로트의 고유 영지를 지칭하는 건지
헷갈려서 그냥 중간계를 의미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추후 정보 얻으면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