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이 비처럼 : 10년 후의 석봉이와 슬비 이야기

세하느 2015-02-14 2




내리는 이 비처럼

W세하느





최고의 자리는 고독하다, 고 누군가는 말했다. 정상에 설 수 있는 것은 오롯한 혼자, 섣불리 자신의 세계에 가벼운 존재로 남을 들여놓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건조한 말투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몇 마디 꺼내지 않았는데 큰 눈망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화장기 어린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아이라인이 번져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최소한의 양심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전 여자친구는 제가 운다고 남도 젖게 만들 심산인지 앞에 놓인 물잔을 내게 뒤엎었는데 그에 비하면 참 신사.. 아니 숙녀 같은 모습이다. 대충 타이밍을 재다 핸드폰과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미는데 뒤에서, 너가 이세하면 다야? 다냐고! ㅡ하는 물기 어린 소리침이 들려왔다. 그럼 다죠, 누나ㅡ, 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말을 삼켰다. 아, 시선이 집중되는 건 싫은데. 숙녀같다고 한 말은 취소.



멍하니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헤어진 이유 같은 건 언제나처럼 딱히 없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질렸다'는 표현 정도가 알맞을까.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내가 콘2돔없이 관계를 맺은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했다. 술에 취해 기억이 끊긴 적이 없으니 없을 테지. 다시 길을 걷다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끝나는 순간에도 이런 생각만 하다니. 나는 한 순간이라도 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ㅡ그까짓 비닐막 따위 현대 의학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지만 이미 걸2레보다 더러울 소문에 세간에서 입방아 찧기 딱 좋아하는 소문이 추가되는 건 바라지 않을 뿐이다. 그래, 그녀는 나에게 딱 그 정도였을 뿐.



이제부터 과연 며칠 즈음을 홀로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자친구란 것은 생각보다 귀찮고 돈이 많이 깨진다. 돈이야 뭐 벌어들이는 게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순전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나기 시작했던 여자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두 자리 수를 한참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것도 내성이 생긴 약 마냥 아무 효과도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때때로 게임보다 지루했다. 하지만 그 지루한 존재조차 없는 건 내게 조금 버거운 일이었고.



클로저 일을 한지도 어언 10년이다. 20대의 끝물에서 난 현장과는 멀어져 ㅡ이를테면 강연을 나간다던지 하는 일을 하며ㅡ 커오는 후배들을 보면서 나의 자리를 하나 둘 내줄 뿐이다. 꾸준히 운동을 한다고 해도, 세상도 많이 평화로워진 지금 내가 직접 나서야만할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내가 서유리처럼 뭐 차원종들을 때려잡지 못해 몸이 근질거린다는 이런 '포악한' 편은 아니지만, 반평생 해온 일이 그것이니 내심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2차 차원전쟁과 오랜 클로저 활동으로 얻은 건 명성과 돈이었다. 이 세계에선 그 두 가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참 컸고 나는 덕분에 편하게 내 삶을 고를 수 있었다. 이름있는 차와 시계와 양복과, 이세하라는 네임 밸류 하나면 여자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달라붙었다. 그들 중 하나씩을 내 옆에 가져다 앉혀놓은 것은 처음엔 정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내가 게임을 했던 것이 순전히 성취감을 위해서였던 것 처럼. 웬만한 주인공들보다 더한 삶을 살면서 자연스레 게임기는 내 손과 멀어졌고 외로움이라는 밑빠진 독에 그렇게 무언가를 들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잔뜩 표정을 구기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의외로 석봉이었다. 아, 다행이다. 한 땐 내 옆에 있을 수 있었던 여자가 그렇게 구질구질한 존재가 아니라서. 받자마자 술 한 잔 해달라는 말로 인사를 대체했다. 반대편에선 한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전화했어? 라고 물으니 만나서 얘기하자길래 종종 가는 이태원의 바 이름을 댔다. 빨리 오란 말과 함께 짧은 전화를 끊었다. 기지개를 쭉 폈다.



* * *



이태원 구석의 작은 바에서 투명한 칵테일을 앞에 둔 채 탁자를 두드렸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즐겁다.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가 행복했던 이유를 곱씹을 수도 있고. 그러고보면 늘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닌 여자들이었는데. 문득 걔넨 어떤 생각을 하고 날 기다렸을지 궁금해졌다,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다가 먼 발치서 걸어오는 녀석이 보여 손을 흔들었다.



"날 기다리게 한 사람은 너가 처음이야!"

"이상한 소리하지 마. 너 또 헤어졌지?"

"어? 어떻게 알았냐. 귀신이네."



내 테이블의 칵테일을 힐끗보더니 자기는 맥주를 시켰다. 내 모히또가 어때서? 떠나려는 종업원을 붙잡고 참치 카나페를 주문했다. 사무적인 미소를 띠던 종업원이 가고 나서야 얘기가 계속되었다.



"유니온에선 뭐라 안 해?"

"내가 아직도 어린 애인 줄 알아?"



그래, 그렇겠지. 녀석은 작게 웃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 석봉이는 대뜸 내가 '변했다'는 말로 쉽게 정적을 깼다. 사람은 원래 다 변하는 거야. 변하지 않는 건 죽어있는 것 뿐이라고. 입을 비죽이며 말하는데 마주친 녀석의 표정이 어둡다. 이 녀석이 날 불러놓고 왜이런담. 집히는 데가 딱히 없어서 눈을 굴리다가 문득 생각난 이름을 뱉었다.



"슬비?"

"그 이름이 왜 갑자기 나오는데?"



아니면 말고. 가볍게 말하며 애꿎은 빨대만 휘휘 저었다. 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지만, 나와는 너무 달랐다. 외로움을 가벼움으로 바꾸어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는 나와는, 너무 달랐다. 아직도 좋아하는 건가 싶지만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맥연히 투명한 이게 소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포장마차나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이 더 어울릴법한 우리 둘인데, 어느새 양복을 입고 칵테일잔을 앞에 두고 있으니 이것도 나름 변한 것이라면 변한 거겠지.



"변하지 않는 건 죽어있는 것 뿐이라며."

"음,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예민한 주제를 생각 없이 꺼냈나싶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뜸을 들이니 구세주같이 종업원이 나타나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카나페와 맥주를 내려놓고 떠났다. 우린 또 그렇게 한동안 적막을 유지했고, 나는 카나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좀 여성스러운 조합인가, 모히또와 카나페는.



"……."

"잘 지내?"



시선을 들어 녀석을 쳐다보니 녀석은 날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주어 없는 물음이라지만 평생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너라면 별 문제 없을 수준의 질문이다. 그럼, 잘 지내지. 내 대답에 녀석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말이야."

"‥응. 나 말이야. 잘 지낸다고." 



이번엔 내가 시선을 피했다. 차마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물음의 진짜 주어는, 그래, 이슬비는 2차 차원 전쟁이 끝난 이후로 갑자기 쉬겠다는 이유로 홀연히 유니온을 떠났었다. 덕분에 시상식이고 강연이고 교육이고 귀찮은 일은 죄다 나와 서유리가 떠맡게 되었지만, 툴툴거리는 나를 설득한 것은 오히려 서유리어서 대충 여자들끼리의 어떤게 있으려니 하고 말았다. 먼저 말하지 않는 걸 캐물을만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 녀석이 나한테 숨기는 일이라면 나도 그닥 알아서 좋을 건 없단 판단 하에 나온 결론이었다. 뭐, 그렇게 사라진 이슬비는 종종 서유리와 우정미한테는 연락을 하는 모양인지 섭섭하게도 소식을 건너건너 들을 수 있을 정도에 그쳤다.



그런 이슬비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낸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그녀가 유니온을 찾은 건, 자신의 '아이'를 시설에 맡기기 위해서였다. 품에 안겨있는 게 아직 걸음마도 못해 보일 정도인, 아주 작은 아기를.



서유리는 다 알고 있었는지 벙쪄있는 유니온 요원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이슬비에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나도 그 상황이 조금은 당황스러워 도저히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할 지 몰라 눈을 굴리다가 아이가 참 예쁘네ㅡ, 라고 했다가, 남자아이란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슬비는 아이를 안고 사라졌고 나는 서유리를 끌고 세 번째 회의실.. 그러니까 그냥 가까운 아무 방으로 들어갔다.



"이슬비가 2년간 얼굴을 비추지 않은 게 임신 때문이었어? 그동안 결혼을 했다고?"

"하하, 그게.. 그렇다고 해야하나?"



손질된 손톱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서유리는 내 눈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 그런거지 그렇다고 하는 건 또 뭔데?"

"으, 슬비한테 직접 물어봐! 나한테 그러지 말고."



그게 그럴 상황이 안되보이니까.. 한숨을 푹쉬며 고개를 숙였더니 서유리가 뭐야, 걱정한 거야? 라며 눈을 맞춰온다.



"그런 일을 나한테 대체 왜 숨겨. 난 또 어디 아프다거나.."

"이세하 의외로.."

"어?"



아무것도 아니야ㅡ, 라고 말한 서유리는 언제 그랬냐는듯 슬비 아이가 귀엽지 않냐는 둥 슬비가 안고있는 폼이 애기가 애기를 안고 있는 것 같다는 둥 스스럼없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 오랜만에 슬비도 만났는데 뭐라도 먹으러 갈까? 라며 묻길래 그러던가. 하고 대답하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럼 너가 쏘는거다! 라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연봉도 비슷한 게 돈 아끼는 건 여전하다싶어 웃었다. 그래, 셋이 같이 ㅡ실상은 서유리에게 둘이 끌려 다니며ㅡ 뭘 먹은 것도 2년 전이 마지막이었지.



그리고 그 날 난 이슬비에게서 그간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ㅡ이세하, 무슨 생각하냐?" "..아냐, 그냥 옛날 생각."



석봉이가 불러 멍하니 예전의 일을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카나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참치가 올려진 카나페는 사실 칵테일보단 와인에 더 어울리는데.



"석봉아."

"어."

"있잖아."

"왜 이래?"

"..뭔가 좋아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정말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때 생각을 하니 정말로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석봉이는 눈썹을 구기더니 별안간 픽, 하고 웃었다.



"왜 웃냐."

"이세하, 아직 애구나."



의외인 녀석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고 뭐라 말하려던 참에 녀석이 내 말을 끊고 말했다.



"그런건 니가 직접 알아봐. 남한테 묻지 말고."

"그래, 알았어, 알았다. 너 할 얘기 있다하지 않았냐?"

"그런 거 없어. 그냥 너가 또 술먹자길래 이번 여자에 대한 감상평이나 들어주려 온 거지."

"황송하긴 한데, 전화는 너가 먼저 했잖아?"

"벌써 여자는 다 잊어버렸나보다?"

"그러게. 그런가 보다."



말을 돌리려는 게 눈에 보여 그냥 픽 웃었다. 2시간도 안됐는데 얼굴이 가물가물하면 내가 치매인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어차피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모르지 않냐며 석봉이가 날 위로했다. 묘하게 어긋난 핀트인데 위로가 되는 거 같기도 하고.



녀석은 그렇게 시덥잖은 내 얘기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또 다시 불거진 클로저의 권위 축소 이야기, 차원종의 세포 샘플로 만든 질병의 치료제, 이번 주말에 발간하는 유명 게임의 새 시리즈, 서유리가 교육관에서 시범을 보이다가 책상을 동강낸 이야기 등등. 너만 만나면 내가 말이 많아져. 내 말에 석봉이는 웃으며 언제 한 번 집으로 밥 먹으러 오란 말을 남겼다. 아, 부모님 잘 계시지? 늦게 물은 감이 있어 걱정했는데 녀석은 별다른 반응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너 보고싶대,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둘 다 술에 취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적당히 취기가 돈다 싶어 이제 일어나려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들었을 때였다.



"아까 물어본 거 있잖아."

"어?"

"좋아한다는 거."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말을 이었다.

 

"음,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거야."



그 대답에 나는 허탈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 * 



그 날 이슬비와 서유리와 갖게 된 간만의 술자리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이슬비가 차원 전쟁 이후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은 자신의 위상력 상실증 때문이었다.



캐롤리엘이 최고책임자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클로저의 천적인 '위상력 상실증'. 밝혀진 위상력 상실증의 실체는 바이러스로 인해 감염되는 질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제1 위상력을 사용하는 이차원의 차원종들이 가진 특수한 성분의 바이러스가 우리 차원의 제2 위상력과 만나면 역반응을 일으켜 제2 위상력을 모두 역류시키기 때문에 방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모든 위상능력자들은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위상력 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대부분의 클로저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생기고 설령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한들 보균자에서 그치고 만다. 실질적으로 바이러스의 감염 루트는 차원종들과의 접촉뿐이니 보균자로서의 위험성은 제로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슬비는 극악의 확률로 감염자가 되었다. 바이러스가 3천만분의 1의 확률로 이슬비의 몸 안에서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전투 중 자신의 위상력을 100%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이슬비는 차원 전쟁이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자신의 위상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자신의 힘이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때 더 자신의 힘을 물려받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슬비가 이 부분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건 다 이슬비의 병을 보고받은 유니온 쪽의 명령이었을 거다. 나도, 서유리도 언제가 되었든 같은 운명을 걷게 될 터였다. 더 평화로울 수 없는 이 지구에 '평화 유지'를 운운하며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는 말은 전쟁이 끝나고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왔으니까. 서유리는 아직 정착 생활엔 커다란 관심이 없고, 나도 이 정도로 막나가고 있다지만 이슬비는 언제나 모범적이었다. 그녀에게 유니온의 명령은 신의 계시와 비슷한 것일 지도 몰랐다.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외로웠을 녀석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위상력 상실증 감염자들은 대개 단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내의 힘을 강제로 역류당하기 때문에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가고 피로가 쌓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노쇠해져 가는 것이다. 이슬비의 경우는.. 그게 변종이었으니 더욱 심했고.



담담한 표정으로 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화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냐고. 많이 힘들었을 거 아니냐고. 이슬비는 씁쓸히 웃으며 곧 떠날 사람이 이런저런 기억을 더 남겨놓기가 싫었다는 애늙은이 같은 말을 했다. 곧 떠날 사람이 어딨냐며 발끈하고 일어나자 지금도 캐롤리엘과 우정미가 신경써서 만들어준 백신으로 진행 속도를 늦추고 있을 뿐이라는 슬픈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슬비는 서유리도 캐롤리엘도 우정미도, 모두 자신이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해달라 부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언질을 주지 못한것이라며 숨겨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이제와서 너가 미안해할 게 뭐 있겠냐며 한숨을 쉬었는데 이슬비가 조용히 말했다.



"네게 이 일을 숨긴 건 석봉이 때문이 컸어."



친구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친구의 이름은 내게 조금 늦게 인식됐다.



"..석봉이? 한석봉?"

"응.. 네게 일찍 알렸다면 걔가 조금 더 빨리 이 사실을 알게 됐을 거 같아서."

"그게.. 왜?"



그리고 그 때의 이슬비는, 지금의 나랑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고독한 정상에서 느끼는, 오롯한 혼자로서의 외로움이 가득한, 슬프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표정.



"나는, 걔가 날 빨리 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 그러니까 세하야,"

"ㅡ알겠어. 말 안 할게. 너도 참 징하다."

 

그게 다였다. 이슬비와의 대화는.



* * *



택시를 탔다. 오피스텔로 향하며 도수가 약한 칵테일만을 마셨는데 왜 머리가 아픈 지를 고민했다. 같은 길을 걸은 셋이 도달한 끝이 너무 달라서, 혹은 오랜 친구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해서, 조금 빠르게 달리던 택시가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방지턱을 지나며 덜컹였다.



진동으로 해둔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울렸다. 별생각 없이 홀드를 풀었는데 서유리의 연락이었다. [이거 봐, 귀엽지!] 말투가 묻어난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은 이슬비의 아이였다. 머리를 고무줄로 묶인 게 서유리의 짓인 듯 했다. 쬐끄만한 게 눈코입이 겨우 분간되는 것 같은데 어째 표정이 뚱해보인다. 남자애라면서 이슬비를 왜이렇게 닮았냐.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어.] 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뜸 전화가 왔다.



ㅡ내일 뭐하냐?

"왜, 또 뭘 먹으러 가려고 이래?"

ㅡ아니아니, 슬비 보러 갈건데 같이 가자구.

"내일?"

ㅡ와, 슬비 본다니까 태도 달라지는 것 좀 봐?

"그럴 일이 있었어. 오늘."

ㅡ어, 석봉이 만난 거야?

"그렇지 뭐."



서유리는 한동안 아이에 대한 얘기를 했다. 벌써 위상력을 조금씩 보이고 있는 것 같아! 네 살 배기 애한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핀잔을 줬더니 진짜라고 궁시렁거렸다. 너가 유니온에 한동안 안와서 모르는 거라니까? 하이톤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살짝 귀에서 뗐다. 하긴, 유니온에 간다 해도 내가 직접 시설에 들르진 않았으니까. 나중에 가게 되면 한 번 들러볼까. 멍하니 생각하는데 서유리가 듣고 있냐며 또 한소리를 한다.



"뭐라고?"

ㅡ안 듣고 뭐했냐? 오기 전에 꽃 사오는 거 잊지 말라고!

"아, 그래, 알겠어."

ㅡ너 저번처럼 장미 같은거 사오지 말고‥, 야, 야 이세하!



네네, 알겠네요. 어울리지 않게 잔소리를 할까 싶어 듣지 않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S급 요원으로 승급하면서 생겼던 이슬비의 요원명은 레인이었다. 너무 유치하지 않냐, 비웃는 내 말에도 그녀는 신경쓰지 말라며 그 이름을 고집했다. 별 생각 없이 본명을 그대로 쓰는 서유리와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에게 하사된 요원명을 기쁘게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별명은 머지않아 그녀가 바라던 것처럼 또다른 '퀸'이 되었다. 알파 퀸을 잇는 유니온의 여왕, 전장에서 피어난 연홍의 꽃.



뭐, 그런 녀석에게 하얀 국화꽃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걸 어떻게 해. 늘 슬비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장미 꽃다발을 사가는 내게 언제나처럼 서유리는 한 소리를 하겠지만 서유리도 내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석봉이라도 같은 꽃을 사주었을 걸.



택시는 다시 대로로 나왔다. 창밖으로 가로수가 빠르게 지나쳐간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지 창에 빗방울이 부딪혀 지나간 자국이 길게 생기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입구까지 가냐 묻기에 짧게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래, 외로움은 내리는 이 비처럼, 그리움도 내리는 이 비처럼.







덧붙이는 글


정말로 픽션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필요 없지만, 실제로 태클을 걸 사람이 있을까봐 작중 배경을 짧게 기술합니다.



설정상 현재 작중 배경은 2030년, 아이들의 나이는 28세입니다. 2차 차원 전쟁은 2024년 7월 발발, 2025년 10월에 막을 내리고 슬비가 아이를 데리고 유니온에 온 것은 2027년 2월입니다. 또한 슬비와 세하 유리 모두 잠재력이 남다르단 설정이며 현재 셋 모두 S급 요원(고위 간부직)입니다. 참고로 차원전쟁 도중 모두 S급 요원이됐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S급 요원은 정말 소수이고, 그들은 세계 1%정도의 위상 능력자라고 보시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위상력의 경우는 첫째 아이에 한해서 부모의 힘을 그대로 전해 받는다는 설정입니다. (그래서 세하가 피임에 철저하다고 보시면 되겠습..) 그렇다고 슬비나 유리의 부모님이 엄청난 위상능력자였다는 것은 아니고, '보유 위상력'은 컸으나 위상력을 개방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같은 이유로 슬비의 아들도 위상력을 전혀 개방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유니온의 조기 교육과 엄마의 먼치킨성을 고려해보면 어렵지 않게 위상력 개방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애아빠는 저도 몰라요. 애이름도 몰라요. 그래도 애 머리가 분홍색이면 좋겠다.



석봉이와 슬비는 구로역 편의점 때부터.. 꾸준히 연락을 하고 마음을 어느정도 나눈 상태였습니다. 그걸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구요. 석봉이는 슬비가 전쟁 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죠.



사실은.. 세하x석봉으로 세하가 질투에 눈이 멀어 슬비를 죽이고 석봉이를 감금하는 얘기를 쓰고 싶었는데 공홈 수위에 맞춰 전혀 다른 내용으로 손가는대로 썼습니다 ^오^

 

+) 필터링 걸리는 게 많아서 짜증납니다.


2024-10-24 22:23:1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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