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팩, 잊혀진 어금니 (19)

벨리에나 2018-03-02 0

 슈타인은 무너진 베를린 장벽 근처를 걷고 있다. 형형색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삭막한 분위기를 조금 완화시켜준다. 그는 벽을 어루만졌다.


 슈타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물체 조작과 변형이다. 물체의 크기나 질량에 관계 없이 조작, 변형 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변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뚫는 창이나, 무엇이든 막는 방패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제약이 걸린 능력이지만 슈타인은 이 능력만으로 차원 전쟁 당시 유럽을 박살낸 헤카톤케일을 돌려보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두 번째 능력, 알려지지 않은 능력인 물체의 기억을 읽는 능력이다. 흔히 사이코메트리라고 불리는 능력인데 평범한 사이코메트리와는 다르게 슈타인이 가진 능력은 물체 뿐만 아니라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 이 능력은 제약도 없기 때문에 슈타인의 정신이 허락하는 한 어떠한 정보라도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


 즉,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만지고 있는 슈타인에게는 지금까지 베를린 장벽을 만졌던 모든 이의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감정부터 시작하여 속마음, 기억, 그들이 처한 상황까지. 슈타인은 장벽에서 손을 때어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전쟁의 고통을 또 다시 겪는 것과 동일했다. 슈타인은 방금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를 삭제했다.


 "국장님?"


 슈타인이 고개를 번쩍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익숙하지만,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던 사람이었다. 목소리나 허리가 얇은 걸 보아 여자. 그녀도 슈타인처럼 고개를 들어 섬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에 이끌려 독일에 왔더니, 이렇게 바로 만나네요? 슈타인 국장님. 아아, 얼마나 서운했는걸요. 그렇게까지 절 유니온에서 퇴출시키고 싶으셨나요? 덕분에 고생했어요.

 "메리.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로 인해...... ."

 "아, 소마요? 걱정마세요. 그 아이는 훌륭하게 슬픔의 감정을 깨우쳤잖아요? 전 소마가 아니라 국장님을 만나러 왔어요. 이러면 이해하겠나요?"

 "날 만나러 왔다고? 더욱 이해가 안 되는데."


 메리는 몸을 돌리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여긴 얘기할 장소가 안 되죠. 따라오세요. 조용한 곳을 알고 있으니."


 슈타인은 메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조금 풀더니 곧이어 메리를 따라갔다.



 강남 상공, 램스키퍼 내부.


 트레이너와 베로니카는 제이의 정보로 서지수가 플레인게이트에서 홀로 대정화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램스키퍼에는 새로운 사람이 탑승하고 있었다. 바로 벌쳐스로 대피하고 있던 오세린 요원과 가면을 뒤집어쓴 채 어깨에 힘을 주고 있던 김가면이었다. 트레이너는 김가면을 보면서 헛기침을 했다.


 "서울은 괜찮은 것 같군."

 "예! 그렇습니다. 벌쳐스의 사장님과, 늑대개 팀, 그리고 서지수 요원님이 활약해주신 덕분에 서울과 경기도 부근은 정리되었습니다. 다만 서지수 요원님께선 아직 플레인게이트에 계십니다."

 

 베로니카는 트레이너에게 다가오면서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괜찮을까? 지수도 나이가 나이인데...... ."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라, 베로니카."

 "아, 그런가...... 헤헤."

 "괜찮을 것이다. 개체수가 많다면 모두 죽이면 될 것이고, 되살아난다면 그 능력을 잃게 만들면 된다. 서지수라면 이렇게 말할 테지. 기다려보도록 하지."


 트레이너와 베로니카는 김가면에게 향했다.


 "유니온은 그 정보를 들먹이면서 교관이 전범의 머리였다고 몰아갈 수도 있다. 홀로 차원 균열을 열었고, 자신들은 그걸 막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이지."

 "아마 그건 자폭일 겁니다. 막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방관한 인물이 되는 거죠. 감찰국은 데이비드가 밝힌 차원 전쟁 전범에 대해서 유니온 간부들을 조사하고 있지만 차원 균열 때문에 잠시 미뤄둔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총장의 명령으로 지수가 교관님을 잡아오게 되었지. 그건 어떡할까?"

 "본인에게 물어봐야겠지. 자신은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정보를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세 명이 진지한 얘기를 나눌 동안 오세린은 쇼그를 만나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쇼그는 순수한 클로저인 오세린이 신기했고, 오세린은 순수한 기계가 위상력을 창출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쇼그는 램스키퍼로 다가오는 거대한 위상력을 감지했다.


 "서지수 요원이 오고 있습니다."


 트레이너는 대화를 끊고 쇼그에게 다가왔다.


 "상태는 어떤가?"

 "매우 건강합니다. 여러분의 표현을 따라하자면 펄펄 뛸 정도입니다."

 "다행이군."


 램스키퍼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과 기계가 램스키퍼를 나섰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서지수는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더러워졌고 건블레이드가 부서졌는지 맨손이었다.


 서지수가 다가오자, 김가면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건블레이드를 넘겼다.


 "아, 고마워...... . 뭐라고 불러야되지?"

 "와하하하! 김가면입니다, 요원님!"

 "그래, 김가면. 건강해보이네. 아, 오세린 요원. 민간인 대피 훌륭했어. 그리고 연구실이 박살났으니 연구진들에게 말해줘. 무슨 일이야, 트레이너, 베로니카?"

 "네게 알려줄 소식이 있다. 교관에 관한 소식과, 이세하에 관한 소식이다. 제이가 교관을 만났다."

 

 서지수는 눈을 깜빡이다가 건블레이드를 땅에 꽂으며 팔짱을 꼈다.


 "좋아. 무슨 일인지 들어보겠어."


 트레이너는 맥스가 울프팩 팀을 만나지 않았던 이유부터 말했다.


 그는 울프팩 팀에게 잊혀지지 못할 고통을 준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팀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교관에겐 팀원을 볼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맥스가 전범에 관한 것을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스와 관련된 것들이 그가 전범인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남극 연구원 출신, 최초로 지고의 원반에게 선택 받은 자, 그로 인해 갖게 된 막강한 힘.


 서지수는 이 내용을 아자젤에게 들었던 내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지고의 원반을 강탈하고, 힘을 이용하다가 폭주시키면서 차원 균열을 열어버리면서 원반을 행방불명으로 만들어버린, 현재 지고의 원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지수는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그녀의 두통을 더욱 악화시킬 내용이 뒤를 이었다.


 "...... 세하가 선택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고?"

 "교관도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서지수. 난 네게 부탁하고 싶다. 독일로 가서 교관을 만나라. 교관은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을 구하고 독일로 복귀했다. 제이가 말한 것이지. 우린 현 상황 때문에, 그리고 넌 총장에게 명령 받은 것도 있기 때문에, 갈라서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가능하겠나?"

 

 서지수는 맥스를 만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추궁을 목적으로 만날 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못해봤던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리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맥스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들 이세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아들을 부탁해. 만약 이상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면 당신이 막아줘. 인정사정 볼 것 없어. 나 대신 막아주는 거니까."

 "알겠다. 독일로 갈거면 램스키퍼를 이용...... ."


 서지수는 건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트레이너와 베로니카는 한 발자국 물러났고, 무릎을 펼치자 그녀의 몸은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김가면과 오세린, 쇼그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며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트레이너와 베로니카가 아무런 반응 없이 램스키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더욱 당황했다.



 베를린, 알려지지 않은 골목.


 메리를 따라가던 슈타인은 골목 입구에서 멈춰섰다. 골목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양 옆에 늘어선 건물들이 이상하리만큼 쭉 나열되어 있었다. 메리는 슈타인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뒤돌았다.


 "어머, 무슨 일이죠?"

 "무슨 꿍꿍이지? 이건 조작된 공간이다."

 "와, 역시 클로저 출신답게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이건 조작된 공간이에요. 예전에 실험도 할 겸 사냥터지기 팀의 훈련 장소를 모방해봤는데, 어떤가요?"

 "괴이하다. 당장이라도 부숴버리고 싶군. 할 얘기가 있다면 여기서 말해라. 이 주변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럼 앉아서 얘기할까요?"

 

 메리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우며 앉았는데, 투명 의자라도 있는지 그녀의 엉덩이는 공중에 떠있었다. 메리가 손으로 권하자, 슈타인은 자리에 앉아보았다. 턱. 무언가가 자신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느낌이 들었다. 슈타인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메리에게 집중했다.


 "유니온을 나올 때, 여러 가지 챙겨왔어요. 제가 실험하던 것들이나, 물품들. 사냥터지기 팀의 기록, 후임 오퍼레이터의 정보 등등."

 "퇴출 당한 몸이면서 그런 걸 챙겼던 건가?"

 "조용히 해주세요. 제가 얘기 중이니까. 전 거기서 한 가지 정보를 더 가져왔어요. 최근에 발견했죠. 누구의 것인지 맞춰보겠어요?"

 "누구라고 하는 걸 보니...... 맥스의 것인가?"

 "아뇨. 아이들의 것을 들고 왔죠."

 "...... 뭐?"

 

 메리는 후드를 걷으며 기다란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슈타인에게는 결코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슈타인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이를 갈았다.


 "뭘 알고 있는 거지, 메리?"

 "코드 78."


 슈타인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섰고, 푸른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심지어 주변의 지반까지 미세하게 진동했다.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이미 볼프강에게 넘어갔던데."

 "그, 그게 무슨 말이지? 볼프강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인가? 난 그걸 폐기했다."

 "당신이 건네주지 않았으니, 유니온이 따로 김재리 요원에게 건넸어요. 전 그걸 목격한 사람."

 "...... 이건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메리. 코드는, 아이들을, 그 아이들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

 "언제는 인간 취급 했나요?"


 메리도 슈타인처럼 일어섰다.


 "저처럼."


 메리는 슈타인에게 다가왔다. 슈타인은 그녀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곧 큰 일이 벌어질 거예요. 사냥터지기 팀은 이용당할 운명이죠. 볼프강? 그를 협박하는 건 쉽죠. 아이들을 과부화시켜서 죽인다고 하면 볼프강이 알아서 나설 거예요. 그리고 약속을 깨면서 아이들의 코드를 발동시켜 사람을 죽이게 한다면...... . 완벽하죠."

 "...... 난 코드를 해제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 그걸 알고 말하는 건가?"

 "아, 오염시키는 방법이요? 그건 불가능해요. 애쉬가 안나를 루나와 소마 속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아이들의 코드에 이상한 걸 넣었거든요."

 "...... 내게 이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어차피 누구 한 명은 죽을 것 같아서. 절 쫓아내신 국장님이 뛰어다니는 걸 보고 싶거든요."


 메리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면서 뒤돌았다. 메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건물들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슈타인은 급히 베를린지부로 돌아가 맥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잡은 건 하늘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였다.


 "슈타인 국장님?"

 

 하늘을 날아오던 서지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착지하면서 슈타인을 바라보았다. 슈타인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에 당황했다. 그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서지수? 네가 왜 여길 온 거지?"

 "어...... 교관님을 뵈러 왔죠. 여쭤볼 내용이 많거든요. 그리고 명령이 내려온 것도 있고."

 "저번에 말했을 텐데, 맥스는...... ."


 그들이 서있던 공간에서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변으로 퍼진 바람에 의해 건물 창문이 모두 깨졌다. 서지수는 슈타인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숨길 생각하지 마세요. 전 교관님을 만날 겁니다. 만나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밝혀낼 겁니다."

 "...... 넌 뭘 알고 있는 거지?"

 "교관님이 전범이라더군요. 그리고 제 아들에게 한 말에 대해 물어봐야겠어요."


 슈타인은 오늘, 베를린장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알게 된 것보다, 두 여인에게서 들은 정보가 자신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귀로 직접 들은 내용은 절대 잊지 않는 슈타인이었다.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2024-10-24 23:18:4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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