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태닝

에토포시드 2018-02-13 8

이세하는 바닷가가 싫었다. 달라붙는 모래, 끈적이는 바람, 쓸데없이 많은 사람, 그에 걸맞는 시끄러움. 그가 싫어하는 요소를 한데 뭉쳐 버무린 것 같은 장소다. 해변에 가자는 이슬비의 말에 그가 반대한 것도 당연했다. 모처럼의 휴가는 에어컨이 있는 집안에서 편히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어째서 굳이 돈까지 써가면서 고생을 찾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의 항의는, 늘 그랬듯 묵살당했다.

 

한숨. 벌써부터 소금기로 근질거리는 어깨를 털어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갈매기 소리. 왁자한 소음 사이로 들뜬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가 비명처럼 끓어오른다. 돌아가고 싶다. 이세하는 파라솔 아래 의자에 몸을 누이고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준비할 것이 무어가 그리 많은지, 이슬비는 그가 짐을 다 옮긴 뒤에도 나타나지 않던 참이다. 이어폰 속에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이거면 됐다. 이렇게 시간을 떼우다 보면 돌아갈 시간이 오겠지. 보기 싫은 해변 풍경은 가디건의 후드로 가려버린다. 이세하는 북적한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 속 세상으로 침잠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충격이 콩, 하고 이마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면 수영복 차림의 이슬비가 오일을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은 덤이다. 그녀와 함께하다 보면 제법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건만, 오늘의 그에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여유가 없다.

 

“왜?”

 

제법 퉁명스런 목소리. 이슬비는 애를 하나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 쿡, 웃어버린다. 처음엔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같다고만 생각했을텐데, 지금은 그저 귀엽다. 콩깍지란게 이런 것일까.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그의 머리에서 후드를 쓸어내린다.

 

“왜 웃어?” 재차 질문. 수북한 머리에 손가락을 굴린다. 돌아가면, 머리를 짧게 쳐보는 건 어떨까. 여길, 이렇게.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움직여도 본다.

 

“그냥, 귀여워서.”

 

어이가 없다는 듯 이세하는 한숨을 푹 내쉰다. 이슬비는 손의 오일통을 그에게 건네었다. 의문이 흘러넘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이슬비는 의자에 엎드렸다.

 

“발라줘.”

“직접 하면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이슬비는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있는 그에게 팔을 뻗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이기에 손이 그의 얼굴에 겨우 닿는다. 약간은 거칠한 뺨에 손가락을 굴린다. 목으로, 어깨로, 팔로. 여전히 게임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끌어내린다.

 

“피부, 다 탈텐데.”

“…애초에 안 왔으면 괜찮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손에는 저항이 없다. 어차피 그는 그렇다. 불만이 가득하다가도, 눈앞에 닥친 일은 곧잘 처리해주는 것이다. 쓸데없이 착한 남자. 이슬비는 다시 의자에 엎드렸다.

 

“자, 자. 햇빛이 많이 따가워.”

 

또다시 한숨. 어쩔 수 없지, 하는 혼잣말과 함께 삐걱, 의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영복 매듭을 끌르는 손길이 간지럽다. 이슬비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

 

손에 짜낸 오일은 흔히들 들려오는 이야기와 달리 미지근했다. 날이 제법 더운 탓이리라. 뜨거운 차안에 몇 시간을 보관해놓았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눈앞에는 선물상자처럼 풀어헤쳐진 이슬비의 새하얀 등. 글쎄, 오늘이 지나면 저 뒷모습에 다른 빛깔이 칠해지는 것일까. 그는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꼼꼼히 오일을 바르면 좀 낫지 않을까. 이세하는 그녀의 등에 잠자코 손을 비볐다. 고운 곡선의 어깨, 귀엽게 비져나온 날개뼈, 오목하게 패인 등골. 잠자리에서 몇 번이고 봤을 모습이건만, 장소가 바뀐 것 만으로도 꽤나 느낌이 새롭다.

 

“간지러.”

“꼼꼼히 발라야 되니까 참아.”

“…손이 **데.”

 

쓸데없는 참견이다. 아마 농담이겠지. 묵묵히 시선을 옮기며 오일을 바르던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목덜미에 발갛게 자리잡은 작은 언덕. 꼭대기에는 펜으로 찍기라도 한 듯 검붉게 점이 박혀있다.

 

“모기는 또 언제 물렸대.”

“그러게. 몰랐어.”

 

몰랐다니, 형편좋은 이야기다. 이세하는 한참을 긁다가 그만 딱지가 올라앉아버린 자신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런 데서 묘하게 무신경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쓸데없이 약이 오른다. 허리께에 가있던 손을 올려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른다.

 

“…간지럽다니까.”

“꼼꼼히 발라야 한대도.”

“일부러 그러는거지?”

“응.”

 

간질, 간질. 자국이 성이 난다.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꼭 키스마크 같다. 그러고보면 최근엔 꽤나 뜸했다. 슬쩍 상체를 숙여본다. 간지러움이 올라오는지 이슬비가 목을 조금씩 비튼다. 움직임과 함께 씰룩이는 어깻죽지가 야릇하다. 의외로 바닷가도 나쁘지 않을지도. 슬쩍 올라오는 감상을 이세하는 고개를 저으며 떨쳐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허리를 숙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꺅!”

 

덜컥 요동치는 어깨를 잡아누른다. 코를 간질이는 머리칼에서 린스 냄새가 훅 풍겨왔다. 혀 끝에 슬쩍 느껴지는 짠 맛. 쭈욱, 빨아당긴다. 지금부터 잠시동안, 나는 모기다. 쪽, 쪽. 입술에서 비어져나오는 소리마저 간지럽다. 정강이를 걷어차는 다리의 감촉에 모기가 이래서 피를 빠는 것일까, 하는 바보같은 감상이 떠올랐다. 이쯤이면 됐을까.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훑는다. 8월의 햇빛 아래. 그녀의 목선을 따라 작게 구슬진 침방울. 미소짓는다. 어깨를 풀어주면 냉큼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는 이슬비. 갑작스레 힘을 써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상기된 얼굴이 귀엽다.

 

“이세하, 너…”

 

양껏 피를 빨고 난 모기는 으레 성난 손길에 붙잡혀 죽고야 마는 것이다. 이세하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딱히 후회는 없었다. 이 정도면 꽤나 만족스러운 교환이다.

 

“이러고 어떻게 해변에 있으란거야—!”

 

이슬비의 비명. 그리고 손과 등이 맞부딪히며 나는 상쾌한 파열음. 그렇게, 소란스러운 해변의 풍경에 두 소리가 더해졌다. 이럭저럭, 생각보단 즐거운 하루였다.

2024-10-24 23:18:3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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