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너를 기다리는 1시간

루이벨라 2018-01-26 13

 약속장소에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너와의 약속 앞에 있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집에 나왔는데, 첫 번째의 약속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간단하게 끝난 탓이었다. 바쁘게 간 약속장소에서 1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일단 약속장소인 카페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너를 탓하지는 않는다. 1시간이나 일찍 온 나의 잘못이지. 어떡하지...어떡하긴, 기다려야지. 어떤 이라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시간동안 무얼 하며 기다려야하나, 한숨부터 쉬겠지만 난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익숙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는 기다리는 것이었다.

 익숙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1시간 정도 기다리는 거...나한테는 별일 아니었다. 몇날 며칠, 아니 몇 년을 이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1시간 정도는. 나는 내 바로 등 뒤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바깥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서 기다리는 것보단, 따뜻한 실내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카페에 들어가자 더운 공기가 얼굴을 확 때렸다. 직원이 형식적으로 어서 오세요, 하는 것을 가볍게 흘려듣고 입구와 가장 가까운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누가 오는지 바로 알 수 있고, 짐만 챙겨서 바로 뛰어나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이다.

 남은 시간은 1시간.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1시간. 기다림은 시작된다.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도 연신 시간을 확인한다. 시계바늘은 12에서 아주 조금 움직일 뿐이었다.

 게임기를 꺼내본다. 게임을 하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55분. 시간이 가지 않는다. 겨우 5분 지났을 뿐이다. 나는 무언가에 강박증이라도 걸린 듯 계속 시간을 확인한다. 게임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 가지고 온 게임팩이 유독 재미가 없는 걸까? 애꿎은 게임팩에 화풀이를 하려다가 포기했다. 게임기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다.

 마음이 붕 뜬 것이 내 집중을 다 흐트러뜨린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부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47분.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있다. 나를 둘러싼 시간이 유독 천천히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지금 나만 이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과, 저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차원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바로 그만둔다. 어울리지 않으니까?

 33분. 이제 반절. 시간이 많이 지났다. 창가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자니, 내가 거대한 수족관의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은 나를 그냥 지나친다. 어차피 내가 바로 아무런 여과 없이 지나치게 만든다.

 저 군중들 속에서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26분. 이제야 커피 메뉴가 눈에 뛴다. 무얼 마실까...고민하다가 어차피 26분 후에는 이 카페에서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싼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난 쓴 커피도 잘 마시는 편이라 메뉴 고민은 별로 하지 않았다.

 난 아직 카페 라떼밖에 못 마시겠어! 애써 어디선가 들리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운다.

 12분. 아메리카노는 14분이 유효시간이었다. 생 아메리카노만 마셨기에 입이 바짝 마르지만 그렇다고 추가로 무얼 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12분 남은 것을...

 10분. 이제 카운트다운 해도 되겠지? 아니다. 하나둘씩 떨어지는 숫자를 세기에는 아직도 애매한 수치이다.

 8분. 마음이 또 붕하게 뜨기 시작했다. 잠재우기에는 너무...늦어버린 걸지도.

 4분. 무시하려고 하지만 창밖을 계속 쳐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긴 생머리를 하고 있는 여성이 지나갈 때마다 더 눈여겨본다.

 왜 이리 들떠있는 거야...

 1분, 60초. 슬슬 보일 때가 되었다.

 20초. 저 멀리서 익숙한 형체가 카페를 향해 곧장 오는 게 보인다. 난 그게 누구인지 바로 알아챈다.

 15초. 나를 발견한 듯 손을 흔드는 네가 보인다. 덩달아 너의 걸음 또한 빨라진다.

 10초. 이제 숫자를 카운트를 해도 되겠다. 10, 9, 8...

 7초. 입구까지 왔다. 문을 열자 문에 걸려있던 종이 딸랑거린다. 6, 5, 4...

 3초. 너는 바로 내 앞에 있다. 이거, 한방 당했네, 라는 표정이다.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서 온 너지만 내가 먼저 나와 있는 게 멋쩍은 모양이다.



* * *



 "헤에...세하 엄청 빨리도 왔네?"
 "앞에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온 것뿐이야."
 "얼마만큼 기다렸어?"

 잠시 고민한다.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시간을 조금 낮출까. 한눈에 봐도 서유리는 자신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이 미안하다고 대놓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 표정에 매우 취약한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나도 금방 왔어."
 "금방 온 사람이 커피를 그렇게 빨리 마시니?"
 "..."

 난 내 앞에 놓인 커피 잔해들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서유리는 범인을 잡은 의기양양한 탐정의 얼굴이다.

 "적어도 30분은 기다렸을 거 같은데?"
 "...절반은 정답?"
 "30분 이상이구나."

 서유리는 이마를 짚는다. 그, 그게 무슨 문제인가? 내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걸 서유리는 검지로 잡아내며 시무룩한 말투로, 내게 말한다.

 "일찍 왔으면 전화를 주었어야지! 기다리지 말랬지! 사람 기다리는 거, 안 좋은 버릇이라고!"
 "나 기다리는 거 익숙해. 잘 하기도 하고."

 그게 바로 문제라고! 서유리는 그 검지로 내 이마를 살짝 밀었다. 뭐가 잘못한 건가...대충 짐작은 가지만 모르는 척 했다. 알고도 그랬단 말이야?! 라며 더 잔소리가 증가하는 게 싫었기에.

 "남을 기다리기만 하는 거, 그거 좀 고치면 세하는 참 완벽할 텐데!"
 "익숙하고 잘 한다고..."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목소리를 저렇게 높이는 일 별로 없는데...이번에 좀 많이 화난 모양이다.

 "늘상 세하만 기다리니까 내가 죄 지은 거 같잖아!"
 "네 잘못 아니래도..."
 "세하도 만날 그런 말만 하지만, 사실 기다리는 거 싫잖아?"
 "..."

 정곡. 할 말은 없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 외로워서. 고독해서. 그 기다리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나에게 남겨지는 것이 없는 거 같아서. 무언가를 잃어가는 거 같아서.

 하지만...

 "너는 예외."
 "...어?"
 "유리 너는 예외."

 서유리를 기다리는 건...그리 싫지만은 않다. 가슴이 부드럽게 뛰기까지 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일까.

 유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내 옆으로 와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난 유리를 믿고 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마냥 싫지 않다. 아까의 상황과 같이 풍선처럼 붕~ 뜨는 기분이기까지 하다.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유리의 손을 잡고 얼른 카페를 나선다.

 "자,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으응, 그, 그래...! 늦은 기념으로 내가 점심 쏠게!"
 "넌 정확하게 도착했어. 내가 일찍 온 것뿐이지."
 "헤에...세하 네가 일찍 왔다는 거 방금 시인한 거네?"
 "...방금 그 말은 취소."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애쿼머린(루이벨라)입니다.
오랜만에 쓰는 시리즈가 아닌 세유 단독 소설이네요. 요즘 시리즈물만 쓰는 거 같아서 이런 짧은 글로도 개인적인 기분 환기에도 좋았던 거 같아요.(요즘 쓰는 글이 대체적으로 우울해서 제 기분도 저기압이었거든요.)
여기서 하나 고하자면 원래 저는 2017년을 끝으로 클로저스와 클로저스 팬픽 쓰는 걸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올해 전 인생의 가장 바쁜 부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마음을 정했고 지인분들께는 미리 고하고 있었던 부분입니다.
하지만 2017 어워드 팬소설 분야에 당선되고서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클로저스 게임 플레이자체는 그만두어도 글 쓰는 건 그만둘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저는 클로저스 게임 플레이는 접은 상태입니다.(제 대표캐릭터 레벨이 77렙에서 변동이 없는 걸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글은 쓰고 있었죠. 2017년 말의 전 현재 개인적으로 연재하고 있는 2세 장편을 마무리 지으면 클로저스 연성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지금도 아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시리즈물이나 장편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지쳤거든요. 하지만 즐겁게 읽으시고 저에게 어워드까지 주신 여러분들에게, 이 사람이 갑자기 모든 걸 정리한다고 통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을 보시는 분들을 전 정확하게 알 순 없습니다. 어쩌면 제 글을 읽으시는 분은 클로저스를 즐기시는 분들 중에서 극소수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어워드를 주신 여러분들에게 제가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니 결국 제가 글을 계속 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2016 ~ 17년만큼 활발하게 활동을 하진 않을 거 같습니다.(어떤 때는 보니까 1주일에 1번꼴로 글을 썼더군요.) 하지만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면서 여러분들에게 소소한 재미가 될 수 있는 단편 글을 쓸 순 있을 거 같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어쨌든 전 계속 글을 쓸 겁니다. 만약 기력이 회복되면 장편이나 시리즈물도 연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올린 제 글과 이 긴 공지 말을 보시는 모든 분께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이제 염치 불구하고 얼굴만 비치는 객(客)의 신분이겠지만 가끔씩 댓글에서 아는 체를 하시면 반갑게 인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즐거운 글쟁이이고 싶은 애쿼머린(루이벨라) 올림
2024-10-24 23:18:2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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