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세리] 겜창팔이 소녀의 재림 (5화)

21대대통령서유리 2017-08-21 0









여기 오게 된 이후로 몇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첫째, 이 곳은 대한민국이 맞다. 시간은 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시점과 동일한 2020년. 그러나 이 곳이 평행세계 그러니까 일종의 다른 차원이라서 그런 모양인지 기술 수준은 원래 내가 살던 곳보다 약간 더 진보한 상태이다. 문화 수준은……약간 뒤떨어진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나면, 그 시대에 유행하는 문화 혹은 예술적 트렌드가 내가 살던 곳 기준으로 3~4년 정도 지체되어 있다. 예시를 들자면, 내가 살던 2016년의 한국에서 ‘급식체’라는 것이 센세이션 수준으로 유행했을 때 이 곳의 한국에선 2019년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




둘째, 이 쪽 세계엔 북한이 기습남침을 했다던가 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2002년 경에 ‘차원전쟁’이라는 것이 발발했단다. 지구 곳곳에서 ‘차원문’이라는게 열리며 ‘차원종’이라 불리는 끔찍한 괴생명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를 습격했다는데, 처음엔 이게 뭔 개소린가 싶어서 눈을 끔뻑였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타임스퀘어에서 마주친 괴생명체를 떠올리고 3초 만에 납득했다. 앞서 이야기 했던 기술진보, 문화지체 현상은 여기서 기인한다. 전쟁통에 기술은 발전했지만, 전반적인 사회문화는 그만큼 지체된 것.




셋째, 차원전쟁을 통해 인류사회가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단다. 바로 ‘위상능력자’. 극소수의 인간들이 차원문 개방에 의해 발생한 ‘위상력’이라는 초월적인 능력에 각성한 것이다. 걍 초능력자라고 하지 뭣하러 저런 특이한 이름을 붙였는진 모르겠지만, 높으신 분들 생각이겠거니 하고 넘기는 게 나을 것이다.



아무튼, 각국 정부들은 이 위상능력자들을 동원해 차원종을 개박살내며 가까스로 차원문을 닫는 것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후 이 위상능력자들에게는 문을 닫는다는 뜻에서 ‘클로저(CLOSER)’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이 명칭은 여태까지 잘 사용되고 있단다. 이후 ‘유니온’이라는 국제연합 산하조직이 새로이 창설되어 차원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클로저들을 규합하고 위상능력자들을 관리하고 있다는데…….




솔직히 여기까지 듣자마자 ‘아 씨1발 이건 대체 누구 대1가리에서 나온 삼류 판타지 소설인가’ 하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 눈으로 직접 차원종을 보고 직접 썰어버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아 이 **들이 지금 몰래카메라로 날 엿맥이려고 작정했구나’라고 받아들이며 대번에 육두문자를 쏟아 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 믿긴 어렵지만 이 설명 대부분이 거의 사실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위상력과 위상능력자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쇼핑몰에서 발현 된 내 초능력도 설명이 가능해지고, 차원전쟁과 차원문 그리고 차원종이라는 것이 정말 실존한다면 쇼핑몰에서 마주쳤던 그 괴생물체의 존재도 설명할 수 있다. 기가 막히게 아다리가 맞아 떨어진다는 말씀.



그래서 난 이 설명을 믿기로 했다. 애초에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여자의 몸으로 바뀌어버린 시점에서 어느 건 믿고 어느 건 안 믿는다는 게 굉장히 우스운 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근데 보통, 우물우물……이런 건 높으신 분들이……홀짝, 와서 설명해주시지 않나요?”



초면에 맛있는 거 대접해주는 사람 치고 거짓말 하는 사람 본 적은 없었거든. 냠냠.



“지금 본부에서 지원도 끊긴 상황이고, 유니온에서 나온 사람은 지금 나 혼자 뿐이거든. 일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위상능력자를 구출했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나더러 적당히 상황설명만 해주고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널 보호하고 있으랬어.”



“그렇군요, 근데 아줌마 되게 친절하시네요.”



“아, 아줌마라니…….”



이런, 아무래도 내가 역린을 건드려버린 모양이다. 딱 보니까 아직 결혼 못한 처자인 것 같은데,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으니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겠군. 먹던 쇼콜라 케이크에서 포크를 떼고, 살짝 슬퍼진 듯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었다.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인지 표정에서조차 그런 호칭은 듣기도 싫다는 뉘앙스가 팍팍 느껴진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정중히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딸칵,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소리내어 둥근 접시에 부딪치자마자 난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노안이라고 놀림당하는 고충은 학창시절 때 겪어본 걸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아직 결혼 못했다고 놀림당하는 고통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내가 저 여자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랫사람의 고충과 고통을 무시할 순 없는 것. 아랫사람한테 갑질하는 건 하류인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랫사람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게 진짜 손윗사람이고 진짜 어른이다. 물론 저 여자는 이 여고딩 속 알맹이가 사실 내일 모레 마흔인 은퇴배우라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아, 아니야. 괜찮……진 않지만, 다음부터 그렇게 불러주지만 않으면 돼. 그냥 편하게 유정이 언니라고 불러도 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유정이 언니.”



대화로 어느 정도 추측이 됬겠지만, 이 여자- 아니 김유정 씨는 유니온 신서울지부의 요원관리부에 소속된 요원이라는 신분에 있다고 한다. 미성년자 위상능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클로저 조기 육성 계획인 검은 양의 책임자도 겸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린 애들 다루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따지고 보자면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현장직으로 직접 뛴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행위. 솔직히 존경스럽다. 나 같으면 사무직으로 가서 천년만년 꿀이나 빨고 있었을 텐데.



“이름이 ‘이세리’라고 했지? 혹시 그 밖에 다른 건 기억 안 나니? 집 주소라던지, 부모님 이름이라던지…….”



“전혀요. 이름도 겨우겨우 기억해 낸 거예요, 고등교육과정 같은 기초지식이 남아있는 걸로 봐선 이게 완전히 포맷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머리통을 검지손가락으로 직접 쿡쿡 찌르며 그렇게 말하자, 김유정 씨……아니 유정이 언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거짓말 하는 게 양심에 찔리긴 하는데,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시1발 다짜고짜 다른 차원에서 왔네 내가 거기서 천만배우였네 이런 소리를 해봤자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리가, 증거가 없는데 뭐로 증명할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괜히 ‘다른 차원’같은 헛소리 운운하다가 차원종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어중간한 뻘소리로 정신이상자 취급 받을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을 밀고 나가는 게 백배천배 훨씬 낫다.



아 참고로, 이세리라는 이름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다. 우리 아버지가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지으려고 준비해놨던 이름이다. 물론 내가 전생에선 남자로 태어났기에 쓰일 일이 없었지만, 이런 데서 쓰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셨겠지. 인생 모를 일이다.



“일단 본부에 연락은 해뒀어, 국내 위상능력자 명단 중에 이세리라는 이름이 있는 지 확인해달라고. 그런데 없을 수도 있는 게…….”



“제 위상력이 언제 각성한건지 그 시기가 확실치 않으니까죠? 그리고 제가 처음부터 그 명단에 의도적으로 혹은 단순 실수로 누락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차원전쟁 이후 위상능력자들은 위상력에 각성하자마자 필수적으로 유니온에 등록해야 하지만, 간혹 모종의 이유로 몇몇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거든.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거야.”



마지막으로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옷, 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입고 있던 옷과 인상착의가 똑같았지. 그럼 원래 이 세계에 있던 인간의 몸에 빙의한 게 아니고, 이 세계에 원래 없던 신체가 새로이 구성되면서 이 쪽으로 넘어 온 걸로 봐야하나? 아 씨1발 뭐가 이리 복잡해, *** 터질 것 같네.





“……그나저나, 저 어디서 지내죠? 딱히 갈 곳이 없는데.”



그래, 생각해보니 이게 제일 문제다. 난 지금 갈 곳이 없다. 무슨 뜻이냐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세가지가 무엇이던가, 옷과 음식 그리고 집- 즉 의식주다. 내겐 지금 (의도치 않게 죽고 나서 입게 되는 수의가 되어버리긴 했지만)멀쩡한 옷이 상하의벌 세트로 있고, 이 카페에서 유정이 누나에게 칼로리 높은 양질의 음식도 제공받았다. 그럼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잠 잘 곳. 즉 안식처가 필요한 것이다.



“으윽, 생각해보니 진짜 그러네. 호텔에서 혼자 재울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담…….”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인지, 유정이 언니는 꽤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호텔에서 자라면 잘 수 있긴 한데... 솔직히 좀 그렇긴 하지. 미성년자 혼자서 호텔 들락날락 거리는 것도 보는 눈이 있으니 *** 하고. 그렇다고 이 언니 집에서 잠을 잘 순 없는 게,  지금 딱 보니 표정이 그거다. ‘우리 집은 돼지우리라서 죽어도 안 돼’……하기야 독신 노처녀 집이 얼마나 깨끗하겠냐마는.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별 차이 있나, 딱히 유정이 언니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당장 나같아도 돼지우리 같은 집에 딸뻘 되는 여자애 재우는 건 상상도 못할텐데 이 언니는 오죽할까.



그런 독백을 하며 나름대로 유정이 언니의 고충을 이해해보려 노력할 즈음, 창가를 바라보던 그녀가 뭔가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짝 손뼉을 치며 ‘아!’ 하고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지? 괜찮은 해결책이라도 찾아낸건가. 왜 그러시냐고 물을 새도 없이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딸랑거리는 유리문을 박차고 나간 그녀가 향하는 곳을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



“……., ………! ……, ………….”



유리창 너머인데다 거리도 약간 있어서 말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내 또래로 추정되는 남자애에게 다가가더니 무어라 말을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저 사람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클로저인 것 같은데, 쟤가 그 아까 말했던 검은양 팀원 중 한 명인가? 설마 쟤네 집에서 밑도 끝도 없이 처음 보는 날 재우라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 ……, ……! ………!!!”



“…, ………! …………, ……………!”



남자애의 얼굴이 만사가 귀찮다는 무신경한 표정에서 당황스럽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지는 게 한 눈에 보인다. 망했다, 진짠가 보다. 아니 뭘 믿고 저런 부탁을 하는거야.



안 그래도 불안한 참에 저런 대책 없는 행동까지 보게되니 목이 절로 타오른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아이스커피의 뚜껑을 따 한꺼번에 들이키며 계속해서 상황을 관전하는 동안, 유정 언니는 어떻게든 그 애를 설득해보려 있는 용을 다 쓰고 있었다. 마침내 내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절박한 표정을 짓기까지 하자, 그 애가 마지 못해서 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당연스럽지만 그대로 그 애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솔직히 별 감흥은 없었다. 잘생긴 편이긴 하지만 막 원빈급으로 거의 CG에 가깝다던지 그런 수준은 아니었고, 딱 평범하게 잘생겼다 정도. 여자애들 여럿 후리고 다니게 생겼네. 근데 평소에 짓는 표정 보니까 별로 그렇게 활발한 성격같진 않아 보이는데, 클로저 일이 힘들어서 그런건가. 나름대로의 추측을 하며 입에 있던 얼음을 와득와득 씹어 넘겼다.



남자애의 반응은 살짝 추측하기 어려웠는데,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이 보이긴 했으나 그 순간의 표정 변화를 캐치해내질 못했다.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를 캐치해내야 속마음이라든지 그 안의 심리 상태를 꺼내 볼 수 있는 건데, 그걸 제대로 확인해** 못했으니 별 수 없다. 그냥 막연히 상상만 해 볼 수 밖에.



한편, 그러는 동안에도 대화 아닌 설득 같은 것은 여전히 지속되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완곡한 태도를 취하며 무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겹게 상대방을 설득하고 있는 상태. 일단 가망은 없어 보인다.





“……나 오늘 노숙하는 거 아니야 이거?”




문득, 그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





에이, 설마. 아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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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연재 분량 끝






이제 자러가야지ㅎ

2024-10-24 23:16:5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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