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티나] 뉴욕의 휴일 -2-

Maintain 2017-05-27 2

신서울의 재해복구 현장뿐 아니라 전쟁 내내 느꼈던 거지만, 대도시만큼 큰 사건이 터지면 그야말로 쑥밭이 되는 곳도 없는 것 같다.

항상 그랬다. 사건 이후의 대도시. 내 기억속의 그런 대도시들은 전부 폐허뿐이다. 부서진 건물들, 여기저기 구덩이가 파인 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태에 휘말린 무고한 사람들의 모습. 전쟁 때도, 아스타로트 때도, 그리고 지금도. 무엇 하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 전쟁, 그것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제이, 너는 차원전쟁에 참전했었지. 저번에 트레이너가 자기가 이 도시에 다시 올 줄은 몰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너도 여기 온 적이 있었겠군."
"안 갈 수가 없었지. 뉴욕은 차원전쟁 때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어. 그래서 이미 한 번 거의 초토화가 되어버린 적도 있지. TV에서 재건된 뉴욕을 봤을 땐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또 이렇게 돼버렸군."
"...차원전쟁 땐 차원종에게 파괴되고, 이번엔 인간에게 파괴되다니. 참 불행한 도시로군."
"아마 그래서 이번에 피해가 더 컸던 걸지도 몰라. 차원전쟁 이후 차원종에 대한 대비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설마 인간이 이 사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겠지.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곳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곳이니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한창 뮤지컬 공연이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번 사태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 중 하나인 탓에 공연은커녕 폐허들만 곳곳에 나뒹굴고 있고, 복구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엄청난 깊이의 균열과 검붉은 자국들이, 여기서 있었던 그 때의 일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참 지독하군... 어째 여긴 일이 터질 때마다 제일 많이 망가진단 말이야. 그때도 가장 먼저 쑥밭이 된 곳이 여기였는데."
"이번 사태 때 장막의 영향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던 곳이니까. 아마 그 영향이겠지.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군. 더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진다."
"그나마 이 정도에서 그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네 말대로, 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마 뉴욕뿐 아니라 미국 땅 전체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몰라. 신서울 때하고 그 피해 규모는 비교도 할 수 없었을거야."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근처에 용케 온전히 남아있던 벤치에 주저앉듯이 앉았다. 그리고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물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티나에게 뺏기고 말았다.

"담배는 모든 건강의 만악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아끼고 싶다면 피우지 않는 게 현명하다."
"한 대 정도는 봐 줘. 도저히 피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거 같거든."
"그럴 수는 없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말하고는, 티나는 담배를 발로 짓밟고 비벼버렸다. 담배는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마른 풀쪼가리와 종이로 변해버렸다.

"...쳇, 깐깐하긴. 그게 마지막 담배였는데 말이야. 일명 돛대라는 거지."
"스트레스를 풀려면 다른 것으로 푸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래, 가령 저런 것이라던지."

티나는 먼발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복구 인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여러 푸드트럭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트럭도.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나온 이유가 따로 있었지.

"뭐, 원하는 맛이라도 있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 올 테니까."
"아니, 나도 같이 가겠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스크림만은 내가 결정하고 싶다."
"...갑자기 적극적이 됐군. 평소에도 좀 그래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것은 오해다. 나는 평소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에는 더 적극적이 될 뿐이지."
"뭐야 그게. 그럼 뭐, 가자고."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면서, 우리는 아이스크림 트럭으로 향했다. 아이스크림 트럭에는, 제법 다양한 종류의 아이스크림 메뉴가 그려져 있었다. 생각보다 맛이 제법 다양한걸. 왜 이게 미국의 명물이 되었는지 알 만해.

"어서 오세요."

트럭 안에서,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우연인진 모르겠지만, 그 노부부는 한국인이었다. 잘됐군, 영어는 완전 젬병인데.

"이런 난장판에 무슨 일이시우? 혹시 여행오셨다가 고립되신건가?"
"여행...뭐, 그런 셈이죠."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모르겠구나. 사태는 끝났지만, 그 사태를 끝낸 게 누군지는 말이다. 거기다 지금은 사복까지 입고 있으니. 그런 취급이야 익숙하다만 이제.

"놀랐겠구만, 여행오자마자 이런 사태를 맞아버려서. 그래도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우. 예전의 그 일에 비하면, 이번 건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한 거니까."
"예전이라면..."
"그 이상한 괴물들이 나와서 한바탕 휩쓸고 갔었던 사건 있잖수. 그때도 이번처럼 자원봉사를 나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어휴. 생각하기도 싫네그려."
"...큰일이셨겠군요."
"우리야 큰일이랄 게 있나. 다만 그때 거기 살던 사람들이 정말 큰일이었지... 그 날 이후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휴우."
"..."

노부부는 그 날이 정말 치가 떨리는 모양인지, 말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 때의 일들이 생각나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고.

"아이구 이런이런. 말이 너무 길었구만. 그래, 뭐 드실지 결정은 하셨수? 자원봉사로 나온 거라 거의 다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드릴 수 있는 한에서는 충분히 드릴 테니까."
"저는 조금 있다가 하죠. 아직 정한 게 딱히 없어서."
"그래요? 그럼...옆의 따님은?"
"따, 따님이요?"

설마, 티나를 말하는 건가? 분명 티나는 겉보기엔 아직 8살이고 거기에 한창 눈을 빛내면서 아이스크림 메뉴판을 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지만, 얜 내 따님은커녕 실질적으론 누님급인데...

"따님이 참 이쁘게 생겼구만. 아빠를 많이 닮았는걸."
"아니, 그게..."
"이 아이도 참 많이 놀랐겠어요. 아직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나저나, 애 엄마는?"
"..."

티나가 내 딸도 아니고, 거기다 엄마는 더더욱 없으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나. 하지만 이 노부부는 티나가 완전히 내 딸이라고 믿어버린 모양이다. 거기다 내 침묵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저런. 많이 힘들었겠구려. 힘내요."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얘야, 뭐 고른 거 있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많이 줄게."

이봐 티나.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달라고. 난 아직 결혼은커녕 여태껏 여자친구도 하나 없던 마법사 인생이란 말이야. 최대한 티가 안나게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그럼, 이걸로 할래. 이거 사줘, '아빠'."
"...큽"

...이 녀석, 무표정이 무표정이 아니다. 분명 즐기고 있는 거야.

"그, 그럼 얘는 이걸로 주시고... 저도 같은 걸로 할게요."
"그래요. 특별히 따님에겐 더 많이 줄게."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이 정도야 기본이지. 아이도 무척 힘들어할 테니까, 잘 돌봐 주시구."
"..."

순식간에 유부남이 되어버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분명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했을 양의 아이스크림을 양 손에 든 채 벤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024-10-24 23:15: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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