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가 슬비와 요리할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08 37

"네가 게임만 해대서 유용한 점을 알아냈어."
"그러냐? 뭔데?"

"덕분에 내가 TV를 독점할 수 있어."

"하, 그거 아냐. 이렇게 하면...."
".....무슨 짓이야?!"

"봐. 비디오게임기라는 거야. 이렇게 하면 TV로 게임을 할 수 있....야! 코드 막 뽑지마! 망가진다고!"

"망가뜨릴 생각으로 그런건데?"

"TV도 망가진다고."

"........."

"내가 아니라 TV한테 무릎꿇고 사죄하는 거야....?"

"내가 왜 너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됐다 야."

"드라마를 안 본다니 믿을 수 없어."

"드라마만 본다는게 더 믿을 수 없어."

"그거 아니? 드라마를 ** 않는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낭비하고 있다."

"야 아니잖아. 그거 절대로 아니잖아."


 어머니, 삼가 인사 말씀 올립니다.

작일부로 본의 아니게 삵을 하나 들여왔는데, 덩치도 작은 것이 답지않게 성정이 사납고 성미가 고약하여 가정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물을 파손하고 주인도 알아** 못하고 패악을 부리니 어서 나오셔서 이 땅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시옵소서.

하고 상소를 읊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의 거룩하고 위대하며 존귀하고 현명하신 리더님, 줄여서 이슬비는 잠시동안 우리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는 갑작스럽게 정해지긴 했지만 유니온의 방침이며, 엄마의 동의도 구했으니 꽤나 공적인 일로 봐야할 것이다.


 슬비는 본디 유니온 지부의 숙직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저번 전투때 슬비가 머무르던 숙직동과 연구동이 파괴된 모양이다.

수용인원이 한계가 있어 요원들을 각자 같은 팀의 요원들의 숙소에서 생활하게 했는데,

이는 최근에 일어난 고위 차원종의 정신간섭에 서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구구절절 유정 누나가 말해주었다.


 슬비는 주저없이 이쪽을 골랐다. 날 고른 것이 아니고, 이 집을 고른 것이므로 전혀 착각하지 않는다.

유리네는 이미 식구가 꽤 많아서 슬비가 좋아하지 않았고, 테인이는 슬비처럼 유니온에서 지내는데다가,

제이 아저씨는 자취하는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슬비의 말로는,


"여긴 존경하는 알파 퀸 요원님도 뵐 수 있고, 넌 게임하느라 처박혀서 얼굴 볼 일도 적을테니까."


 게임하느라 처박혀서 얼굴 볼 일이 적을 거라고? 오늘 하루종일 내 얼굴을 보게 만들어주지.

어쩐지 반발심이 무럭무럭 샘솟아서 게임기를 든 채 주변을 맴도는 치졸한 짓을 감행하기로 했다.

슬비는 일단은 고지식하긴 해도 예의범절이 익숙한 아이어서 바로 엄마를 만나 인사했다.

날 빼놓고 둘이 안방에서 무슨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데 대충 들린 문장은,


"아,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네!"

"네!"

"정말요?!"


 등등. 도저히 문맥을 파악할 수가 없는 말뿐이다. 시간이 지나니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슬비가 나왔다.

무슨 오븐에 들어갔다 나온 닭마냥 잘 익은 상태였는데, 이쪽을 흘겨보곤 쿵쿵대며 짐을 챙기러 가는 것이 아닌가.

역시 성가신 녀석이다. 슬비가 아니라 차라리 유리였다면 어땠을까... 여기 머무르는게 유리였다면...


"세하야! 헤헷, 그냥 불러봤어!"

"세하야 뭐해?"
"세하야 놀자!"

"세하야 심심해-"

"세하야 라면 끓여주라아? 응-? 응-?"

"차, 찬물 나와 세하야아!!"

"세하야... 저기....나..."


 .......미쳤지 미쳤어 내가 아주 미쳤지.... 얘가 있었으면 슬비의 3배는 귀찮았을 거다. 정말 곤란했을 거야, 정말로.


"근데 넌 왜 내 볼을 잡아당기고 있냐?"

"누굴 생각하면서 헤실거리고 있니?"
"이게 어디가 헤실대는 얼굴이냐."

"뚝뚝 녹아떨어지고 있는 얼굴이었어."

"아냐."

"맞아.
"아니라고."

"맞거든?"


 그러고보면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중에는 시계가 녹아내리는 상태로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그림이 있었지. 양 볼을 꾹꾹 눌러 얼굴이 제자리에 있는 확인했다.

 고개를 돌려 슬비를 바라본다.

집이라고 편하게 훈련생때 입던 트레이닝복을 입고있다.

슬렌더한 몸에 딱 달라붙는 복장인지라 유려하게 흐른 곡선이 발끝까지 흐른다.

다리를 꼬고 편하게 리모컨을 점거하고 있는 슬비는 한두번 누워본 솜씨가 아니다. 느슨한 시야에 푸른 화면이 맺힌다.

곧 말소리 사이에 잡음이 섞인다. 얼굴이 슬며시 붉어지기에 넌지시 찔러본다.


"배고픈가봐?"

"전혀."

"솔직하게 말해."

"싫어."

".........아아, 그러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을 흘긴다.


".......배고프다고 그러면... 어떻게 할건데."

"게임이나 마저 해야지."

".........흐응."

"농담이니까 꼬집지마라."

"넌 농담할 타이밍도 모르잖아. 바보."

"네가 고집이 세서 그런거야."

"그 말 그대로 돌려줄께."


 일단 일어나서 앞치마를 두른다. 슬비가 옅게 미소지으면서 다소곳하게 바라보고 있다.


"나름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시, 시끄럽네."

"라면 외에도 할줄 아는게 있니?"
'야, 너보단 많이 할 줄 알아."

"난 계란말이를 할 수 있어."


 그러면서 무척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뭐야 이 작은 동물은. 귀여운척 하지말라고.

 

"난 계란찜도 할 수 있어."

".......나, 나,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해본적 없구나...."

"중요한건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맛있냐야."

"그래서 인스턴트 식품이 좋은거야."

"나한테 인스턴트를 먹일 셈이니?"

"그럼 레토르트로."

"뭐가 다르니?"


 놀릴 때마다 슬비는 한마디 한마디 악착같이 따라붙는다. 그런 조잘조잘 시끄러운 점이 싫지는 않다.


"뭐 넌 거기서 구경이나 하라고."
"손님이니까 내가 뭐라도 거들어야지."

"이번엔 내가 주부역할이니까 넌 돈을 벌어오면 되는거 아닐까. 음, 그 편이 게임하는 시간도 많고 좋지."


 은근히 나가라는 압박을 했지만, 슬비는 어쩐지 몸을 꼬면서 달아오른 시선을 테이블로 떨궜다.


"우, 우리가 부부도 아닌데..."

"........."


 .....슬비랑 부부라고? 그 이슬비랑?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순간에도 망상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야, 이세하....아, 아니....여보... 다녀와..."

"저기 오늘은 이런걸 준비해봤는데... 어때?"

"어, 어서와. 밥 먼저 먹을래? 아니면 목욕? 아니면 저기....나, 나?"


 .........아냐. 게임을 너무 한 탓이다. 요즘 궁금하다고 러브마이너스-같은 이상한 데이팅 시뮬레이션 게임을 한 후유증이다.

그 천하의 이슬비가 그럴리 없어. 내 리더는 그렇지 않아. 번뇌를 떨쳐내기 위해 머릿 속에 제이 아저씨를 소환했다.


"여, 세하. 결혼했다면서! 자, 여기 이번에 내가 개발한 **증강 포션을 집들이 선물로....."


 이 아저씨는 망상에서조차 도움이 되질 않는다! 잔류하는 사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일부러 분주하게 움직였다.

 편하게 김치찌개랑, 계란찜이랑, 겸사겸사 계란말이도 준비하도록 하자. 남은걸 유리한테 주면 좋아하겠지.

계란을 꺼내 깨는데 슬비가 어느새 옆에 서있다. 아직 솜털이 보이는 불그스름한 뺨에 잠시 시선이 걸친다.


"나도 도울래."

"왜."

"너한테 얻어먹기만 하는건 자존심 상하니까."

"그런데 오븐 장갑은 왜 끼고있냐."


 엄마닭 모양의 오븐 장갑을 끼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있던 슬비가 얼른 두 손을 등 뒤로 감춘다.


"쓸 일이 있을까해서."

"귀여워서 껴봤다고 솔직히 좀 말해라."

"..........읏..."

"그거 두 손으로 까딱거리면 날개짓하는 거처럼 보여."


 화제를 던지니 또 좋다고 날개를 파닥인다. 은근히 단순한 면이 있다. 지금 그걸 몰래 한다고 하는건지...


"계란말이 잘 한다고 했지?"
"맞아."

"보여줘봐."

"알겠어."


 어쩐지 고오오하고 공기가 달아오른다.


"왜."

"내가 만들면 세하가 슬비 쉐프님 한 수 가르쳐주십쇼하고 매달리는 전개지?"

"이게 요리 드라마냐. 아냐."

"역시 아직 3화 남았나보구나."

"무슨 소리야.... 넌 우리 엄마가 계란말이 같은걸 먹고 미미美味를 외치는걸 보고싶은거냐."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나도 좀 보고싶기는 하지만 그러지 말아줬으면 한다.


"냉장고에 당근이랑 양파는 없니?"

"꺼내줄테니까 기다려라."

"알려줘. 내가 꺼낼테니까."

"남의 집 냉장고 사정은 알아서 뭐하려고. 계속 여기서 살 거야?"

"................."


 왜 또 그런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는걸까 역시 이 녀석은 귀찮다.

그러다가 녀석이 높은 곳에 있는 접시를 위상력으로 꺼내려 하기에 제지했다.


"넌 너무 위상력에 의존한다고."

"키가 안 닿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좀 작긴하지."

"말소되고 싶니?"

"있어봐. 내가 꺼내줄게."


 이럴 때는 남자다운척 할 수 있어 좋군.

어쩐지 등이 밀착하기에 부끄러운 기분이었지만, 슬비는 굳이 떨어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후에 잔뜩 더듬거리면서 위상력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의자를 가져와 올라서려 하기에 말려야했다.

유리도 그렇고 여자애들은 왜 자꾸 아무 생각 없이 귀여운 행동을 하는걸까.

아니, 실은 의식하고 남자를 놀려먹기 위해 계산적으로 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아...


 계란말이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완성되었기에 슬비가 의기양양해했다.


"별로 이쁘진 않네."

"역시 너 미적감각이 어디 고장난거 아니니? 먹어보기나 해."

"그럼 사양않고."


 마침 젓가락을 들고있었기에 하나 집어먹어본다. 무난하게 간을 했군.

만약 유리였으면 벌써 하나하나 다 집어먹어서 상에 올릴게 없어졌겠지.

저번에 라면 끓일 때도 바로 옆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지를 않나.

서유리가 전쟁에 강아지였다고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거다.

슬비는 어쩐지 풀죽은 표정을 짓다가, 젓가락을 뺏어서 하나를 집는다.

 

"누구 허락 없이 먹는 거니?"

"먹어보라며."

"내가 먹여줄 거야."

"새로운 고문이냐."

"맞아. 입 벌려."

"..........."

"...........맛있다고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맛있으니까 접시 내려놔라..."


 얘는 가끔 부끄러운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라고 생각했더니 냉장고쪽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렇게 부끄러우면 하지말라고! 엄마가 뒤에서 보고 히죽거리고 있진않나 얼른 동태를 살폈다.

좋아, 클리어다. 그린 라이트다. 아니, 그린 라이트가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맞나?


"너도 이거 맛이나 봐라."

"읏....."


 어느덧 찌개가 다 끓었기에 숟가락으로 살짝 떠 식힌다.

숟가락을 내미니 녀석이 옷자락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는 눈을 감고 바들바들 입을 벌린다.

분홍색 목젖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게 보여서, 시간을 두고 치아조차 하나하나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짝 떠먹이자 숟가락을 입에 물고 슬쩍 올려다본다.


".........."

"..........."


 이 녀석은 이슬비다. 이슬비라고. 두근두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럴 때 외우는 주문이 뭐지? 아브라 카다브라인가? 아니잖아!

아! 익스펙토 페트로눔이야!..... 아니잖아!


"........이세하치곤 그럭저럭 괜찮은 솜씨네."

"좋은 신부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시, 신부라니.... 남자답지 못한 소리를...."

"네가 보는 드라마에선 남자가 요리 안 하냐?"

"조개 관자 하나를 굽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남주인공이 나와."

"쉐프잖아."

"그리고 여주인공은 소스를 만들지."

"본격 요리 드라마잖아."

"하지만 레스토랑을 사려는 자본가가 여주인공을 유혹해."

"역시 막장이었나..."


 실없는 농담을 하니 조금 공기가 옅어진 기분이 든다. 아까는 너무 농도가 진해서 숨쉬기가 어려웠지.

불을 끄고 옆에 있는 계란찜이 마저 되기를 기다린다. 분명 살짝 끝에 탄 맛이 남는 편이 맛이 더 좋았었는데...


 일단 수저라도 갖다놓을 셈으로 몸을 돌리자 슬비가 그 정도는 자기가 하겠다며 나선다.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슬비가 무척 귀여운 소리-나중에 본인은 부정했지만 분명 흐꺄?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아마 이전에 국자를 꺼낼 때 열었던 서랍을 닫으면서 옷자락이 걸린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품에 쏙 들어오는 녀석을 안았다.

뒤쪽에 딱 싱크대에 부딪쳐서 허리가 아팠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슬비가 맞춤형 인형처럼 안겨있다. 복숭아색 머리카락이 딱 가슴언저리에서 색채를 발한다.

뜨거운 뺨이 심장 근처에 맞닿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자그마한 등부터 실루엣을 따라 손끝에 허리가 감긴다.

한참 숨을 몰아쉬고있자니 슬비가 나지막하게 말을 꺼낸다.


"이세하, 시끄러."

"뭐가."

"심장."

".........몸은?"

"**발가락이 아파."

"그러냐. 일단 떨어져."

"싫어. 네가 떨어지던가."
"나도 싫어."


 결국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직후에 방에서 나온 엄마가 휘파람을 불며 좀 더 하라고 부추기는 탓에 떨어져야 했다.

그 날은 어쩐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


실은 슬비가 어디서 사는지 모릅니다.

세하가 슬비를 요리할뿐인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서없는 세하하렘물 7탄입니다.


이전 시리즈는


세하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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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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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세하슬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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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세하슬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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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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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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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10-24 22:22:5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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