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작] [우정미] The Closer - 마음이 닫힌 소녀 - [1]

유리별 2015-02-06 4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이 나의 목덜미 위로 금빛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덕분에 단잠을 청하던 내 꿈은 비몽사몽 깨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햇살이 비친 것이다. 때이른 장맛비라도 쏟을 건지, 아니면 

때늦은 함박눈이라도 내릴 생각인지 여러모로 걱정을 하게 만들던 희거멀건 먹구름이 이곳 신서울을 감싸안은 지 여드레만의 

일이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남자애들은 한 사흘 정도는 눈싸움을 할 생각에 젖어 들썩거렸으나 이윽고 습하

고 꿉꿉하다며 진저리쳤다. 우리들은 그냥 습하고 꿉꿉해서 싫어했다. 그렇게 불쾌함만 잔뜩 안겨준 이 차양막도 점점 낡고 해

져가서 차츰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조각조각 찢겨 소각되고야 말았다.

기분까지 화창해지는 이런 좋은 날 안에 박혀있을 수는 없지. 외출을 마음먹었으니 이젠 같이 다닐 녀석을 구해야겠지? 하고 

분명 자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잤는데 일어나보니 차원문 틈으로 도망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 전화기를 찾아 침대 사이

를 더듬거리는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치에서. 나도 양반은 못 될 건가봐. 얼른 집어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이 친구, 역시 양

반은 못 될 모양이다.

"어, 서유리...."

"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

"안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

"정미정미정미정미정미야!"

"야, 넌 좀 평범하게 전화걸면 어디가 쑤셔? 귀가 아주 망가지겠어! 무슨 전화할 때마다 만화 성우인 양 소란이야 진짜!"

"정미정미! 놀러가자! 소풍! 피크닉!"

"...에휴, 내 말은 듣지도 않네. 나도 같이 가자고 할랬는데. 알았어, 어디서 만날..."

"지금 집 앞으로 갈게! 기다려! 좀 있다 보자!"

-뚝.

뭔가 폭풍이 몰아치고 간 듯 정신이 없다. 아니, 얘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 게 어딨어?! 잠깐만, 얘네 우리집에서 한코너만 

돌면 되잖아?... 미치겠네, 일단 빨리 씻으러 가야지....

속옷이랑 타올을 챙겨 부리나케 아래층 욕실로 향한 나는, 약간 느낌이 싸한 게 인기척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하기도 했고 누군

가가 등 뒤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몰캉

그때였다, 정말로 뒤에서 보드라운 두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던 가죽을 만져댄 것은.

"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미정..."

분명 내가 당황한 그 순간, 손의 주인이 무슨 말을 하려 했었고, 또 그 목소리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것이었지만 앞서 말했다시

피, 아니 지금 말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나는 무지 당황한 상태였기에 그런 이성적인 요소는 염두에 둘 겨를이 없

었다. 그래서...

-빠악!

그 녀석의 오른쪽 볼을 그만 오른 팔꿈치로 박아버렸다.

선 조치 후 보고라 했던가. 뒤늦게 치한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손에 쥔 옷가지를 던져놓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녀석을 부축

해줬다.

"으갸아아악! 아윽! 아파! 너무 아파! 크앙!"

"괘, 괜찮아? 많이 아파? 피는 안 나는데...."

"안 괜찮아! 많이 아파! 대신 피멍이 든 것 같다구! 무슨 여자애가 이리 힘이 센 거야, 히잉...."

"저기,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있어봐, 반창고 좀 챙겨올게."

우응... 하며 새초롬히 소파에 기대어 있는 7년지기 소꿉친구를 뒤로 하고 나는 구급킷을 찾으러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나 

참, 그러게 거긴 왜 만져댄 거야. 자기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주제에. 근데 구급킷이 어디 있더라? 창고를 다 **봐도 

십자 표시 하나 안 보이네... 아 맞다, 얼마전에 감자 깎다가 손 베여서 밴드 붙였었구나. 그때 아빠가 어떻게 감자칼에 다칠 수

가 있냐고 엄청 놀렸었지. 치, 뭐 다 한 번에 잘 해낼 수가 있나?

"밴드 만들어오는 줄 알았네. 입술은 또 왜 삐죽 튀어나와 있어?"

"시끄러."

나는 괜히 심술나서 일부러 약을 꾹꾹 눌러 발라주었다.

"아! 아얏! 아퍼! 살살 좀 해!..."

라며 녀석은 울상이다. 이상하게 얘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더 심술부리고 싶어진단 말이지.

"엄살은. 그나저나,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문득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엥? 무슨 소리야? 앞문이건 현관문이건 전부 조금씩 벌어져 있길래 '아, 역시 우리 정미는 내가 온다니까 미리 맞을 준비를 하

고 있구나!' 했지...."

가슴을 만지작거린 건 그런 내가 기특해서, 라고 밴드붙인 자기 볼을 만지작대며 녀석은 말했다. 분명 아빠가 급하게 출근한답

시고 문을 던져닫은 탓에 잠금장치가 제대로 걸리지 않은 것이리라. 이놈의 아버지란 사람은 '숙녀는 문단속을 잘 해야 된다' 

며 날이 달이 되도록 강조해놓고 정작 자기가 다 열어젖혀놓고 다니고 있다. 덕분에 문단속의 중요성을 몸소 경험으로 배우게 

됐네요, 고마워요 아빠. 생일 전날 선물을 경각심으로 정하셨나 봐요. 근데 왠지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리네요....

"...일단 나 샤워 좀 할게. 냉장고 옆에 먹을 거 있으니까 꺼내먹고 있어."

"뭐? 아직 안 씻었어? 나 올 때까지 뭐했어 그럼?"

"네가 심하게 빨리 온 거잖아! 아니 한 코너만 돌면 우리 집이라지만 어떻게 갈아입을 옷 챙겨 내려오는 사이에 와 있을 수가 

있어? 너 혹시 집 앞에서 전화한다는 게 우리 집이었...."

"옷 다 입고 전화했어. 끊고 바로 여기까지 뛰어왔고. 뭐 평소보단 몸이 가볍긴 했는데...."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천연스럽게 검지를 턱에 가져다 놓고 말했다. 우음, 하긴 얘 정도 운동신경이라면 가능할 지도...? 

후, 이건 이쯤 해 두자. 지금 중요한 건 외출 준비니까.

"아, 알았어. 그럼 나 씻으러 간다?"

그렇게 말하고 한창 소동 덕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욕실로 들어가려는 때,

"정미야."

이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날 불러세웠다.

"응? 왜?"

"너 어제 자기 전에 샤워했지?"

"어."

"그럼 그냥 머리감고 세수만 해."

"...숨 들이마시면 어차피 내쉴 텐데 그냥 숨쉬지 말지 그래?"

"그럼 죽잖아."

"난 그럼 찝찝하잖아."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띠며 한 마디 던졌다.

"10시부터 대공원에서 차원도전 로케한대."

"세수만 하고 바로 나올게."

아, 또 휘말렸다.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 있는 지금 이 액체가 수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하... 쟤는 내가 그거 꼬박꼬박 챙

겨보는 걸 또 어떻게 알아챈 거야?! 으으, 머리 눌린 것 좀 봐....

옷을 다 챙겨입은 나는 침울한 마음으로 다행히도 조금 눌린 부분을 묶었다.

"오, 사과머리. 귀여운데?"

어깨를 툭 치며 녀석이 아부를 시도해왔다.

"시끄러."

나는 그냥 등짝을 휘갈겼다. 간신배는 매가 약이지.

"흐익, 따가! 너무 차지게 맵잖아..."

"차진 걸 보니 땡기나 보네. 한 대 더 줄까?"

"아니, 지금은 라면이 더 땡겨. 일식집 가자! 라멘! 돈까스! 타코야키!"

"오케이, 가자. 차원도전 촬영 끝나면."

"히엥?! 그게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래?! 엄마가 그러던데, 예능 분량 3분을 뽑으려면 3시간을 촬영해야 된..."

"노컷영상 본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네 뭐. 예전부터 흑채 아저씨 실제로 욕하는거 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이 얘기 먼저 꺼낸 

건 너잖아?"

"윽, 그건, 그렇지만...."

"대신 밥은 내가 살게. 일식집, 콜?"

"콜! 오예!"

"노래방은 네가 내라?"

"어우, 야!"

그렇게 나와 유리는 다소 시끌시끌하게 집을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직 쌀쌀함과 포근함이 티격대는 3월의 어느 토요일

, 바람이 벚잎 손잡고 살랑살랑 우리를 간지러이 환영해 주던 화사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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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퀘스트로 잠깐 비춘 우정미의 아픈 과거를 나름 상상하며 돌이켜 볼 4부작 (예정) 팬픽입니다.
군인 신분으로 쓰는 거라 3년 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운전이 미숙해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꾸벅꾸벅


2024-10-24 22:22:5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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