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구원

웨스커 2016-11-06 6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을 잤던건가? 그렇다기엔 몸이 너무나 무겁지 않은가?
눈을 조금 떠 보았다. 전등이 보이는 흰 천장. 좁은 침대. 그리고 옆에 엎드려 자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남성… 남성?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몸이 몹시나 무거워 다시 누워버릴 뻔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성이 놀란 듯 일어나 바라보았다.
이내 기쁜 듯 나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아아… 익숙한 얼굴. 그래, 당신이었어. 

" 선배님…. "
" 오, 정신이 들었군. 아직 일어나지마. 조금 더 누워있어. "

그러면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너무나 따뜻한 손이라…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손길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리고 간호사를 불러 내가 깼음을 알렸다. 그러자 의사가 다가와 잠시 검진을 해보더니
괜찮다면서 굉장히 좋은 진전이었다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는 기쁜 듯 감사하다며 의사에게 큰 몸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다시 내 옆에 앉았다. 어찌보면 그답지 않아서 놀랬다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 이봐, 좋은 소식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퇴원도 고민해볼 수 있을거래. "
" 그렇습니까…. 저기 데이비드는? "
" 아, 아쉽게 됬어. 그건. "

정신이 조금 되찾아오자 생각났다. 데이비드를 추격하다 그에게 공격을 당해 쓰러져버렸다. 내 판단의 착오이자
임무의 오점. 분명 증거를 구한 뒤에는 거의 확실하다 믿었건만 결국 놓쳐버렸다. 너무 아쉬웠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작전이었는데 성공에 확신이 차 방심해서 적에게 쓰러지다니. 
그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 이봐, 너무 상심하지 않아도 된다구. 아마 다른 요원이었으면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을거야. "

나를 위로하는 듯한 말. 하지만 와닿지 않았다. 조금만 더…한발자국만 더 내딛을 수 있었다면
후환은 전혀 없는 것이었는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상심이 끝나지 않은 날 바라보며 그는 병실의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왔다. 환자 병실에 맥주라니….

" 선배님. 그건? "
" 아, 네가 일어나면 축배를 들려고 한달 전부터 넣어놓았지. 평소엔 못 마시거든. 술이 상하지 않는단 건 참 좋은거야. 
  병실에서 맥주라니, 참 이상한 조합이지 않아?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것 같단 말야. "

엉뚱한 논리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너무나 우스워서 잠시 웃음을 내뱉어버렸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더욱이 마음에 들었다. 나와는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 정도(正道)를 걷는 남자이면서도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웃자 그도 우스운 지 얕은 실소를 내뱉고는 다시 맥주를 마셔댔다.

" 옛날 이야기 하나 해도 될까? "
" 네? 네. "

돌발적인 그의 말에 무심코 답해버렸다. 그는 진지한 듯 턱을 어루만지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 너같은 남자가 한명 있었어. 모두를 구할 것이라며 자기의 목숨마저도 내던지는 걸 마다하지 않았지. 
  덧붙여 말하긴 좀 그런데 꽤 잘생긴 놈이었어. "

이내 그는 약간 슬픈 듯한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그러다 임무 도중에 결국 죽어버렸어. 차원종에게 온 몸이 찢겨나가서 시체도 회수를 못 했고…
  그의 가족들, 친구들이 찾아와 오열하더군. 그런데도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었거든. "

그리곤 맥주를 한모금 더 들이키더니 말했다.

" 네가 선택한 길이 객관적으론 최선이라고 해도, 너의 입장에선 그게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단 말이야. 
  혼자서 상대를 괴멸시킨다 해도 네가 이렇게 다치는 길이라면 차선책으로 길을 바꾸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아. "

그런 말이었나? 하지만 답변은 뻔했다. 왜냐하면 난 처음부터…

" 저는 슬퍼해줄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

나의 답변에 그는 잘못된 부분을 찔렀다는 듯 잠시 움찔하더니 그는 이어 말했다.

"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말야…. 너보단 약한 사람이라도 기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여자로서든, 요원으로서든. 그리고…. "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마 확신이었을까?

" 이제는 내가 걱정해줄 테니까. "

그의 말은 따스히 내려쬐는 햇빛과도 같아서, 아니면 내가 여태껏 가지지 못했던 것이어서 그랬던 걸까?
이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됬는데 나도 모른 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남에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어째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걸까?
내가 눈물이 흐르는 것에 놀라서 얼굴을 붉히고 눈물을 닦으려하자 그는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이,이런…. 내가 너무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나? "
" 아뇨. 그냥…. 너무,너무 기뻐서…. "

눈물이 흐르는데도 기쁨을 감출 수 없어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미소는 그 누가 보여준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었어.
이래서는 안됬는데,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사람들을 내팽개치는 방법들을 배워왔는데….
감정을 무시하고, 본능을 무시한 채 살아온 나지만, 당신이라면 조금쯤 문을 열어도 될 것 같아.
이런 제가… 조금만 당신에게 기대어도 될까요? 

" 웃는 모습이 예쁘네. 다음부턴 그런 슬픈 얼굴은 짓지 말라구. "

변덕이었을까? 그런 말을 내뱉으며 부끄러운지 맥주를 연신 들이키는 그에게 조금은 보답하고 싶어졌다.

" 알겠습니다. 그럼…. "

그리고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지금 줄 수 있는 보답은 이것 뿐이었다. 그가 좋아해줄까?
그 잠시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길었다. 또한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을 지 모른다.
한때는 내가 가장 존경했던 남자.가족도, 친구도 없던 나에게 유일하게 온기를 보여줬던 남자. 
아마 그라면 괜찮을거야. 그렇게 믿을 수 있었다.
내 행동에 당황한 듯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한 그를 마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지금 이 감정을 내가 지니게 된 것도,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것도.
당신이 잠시나마 나를 바라봐주는 그 눈빛조차도….
나의 심한 어리광조차 받아주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감사해요. 
난데없이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아, 이 역시 익숙했던 목소리였다. 

" 에에에에에엑! 무슨 짓이에요! "
" 유,유정씨…. 이건…. "

갈색의 긴 머리가 매력적이었던 여성이었다. 그의 관리요원이기도 했던 사람.
그가 변명을 하려고 말을 얼버무리자 가볍게 무시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 환자 앞에서 맥주를 마시다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 

그녀는 캔 맥주를 손가락질하며 그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나에게도 다가와 말했다.
아마도 우리의 중요한 상황을 봐버린 듯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은 채 말했다.

" 그리고 서희씨! 사내 연애는 금지에요. 금지! 알겠어요? "

이처럼 단호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는데…. 원래 이런 여성이었던가?
하지만 질 수는 없었다. 마땅히 반박할 여지도 충분했으니 뒤로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 어머나, 들켜버렸네요. 그런데 부서가 다르니 사내 연애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 듯 얼버무렸다.

" 부서가 달라도 현재는 같이 있잖아요. 업무에 방해가 될…. "
" 흐음, 그러면 부서가 같은 유정씨랑 선배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란 거죠? "
" 그,그건…! "

계속해서 맞받아치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 정식으로 데이트하기로 했습니다만, 사내에서 하지 않으면 되는거죠? "
" 그런… 제이씨!" 

처음 듣는 말인지 김유정은 얼굴을 붉히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화가 난 듯 그에게 말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그는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모자라 홍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른 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은 상당히 귀엽기도 했다.

" 제이씨. 정말로 그런 약속을! "
" 선배님. 데이트하기로 약속하셨죠? "

논란이 과열되자 목소리는 커져만 나갔다. 멈출 수 없는 기차와도 같았다.

" 제이씨! "
" 선배님? "
" 자,잠깐! 지금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심혈관계 질환이 유발…. "

그가 말을 어떻게든 돌려보려하자 김유정은 빚을 독촉하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딱 잡아 말했다.

" 얼른 말해요! 제이씨! "
" 사실을 말해주세요. 선배님. "
" 내,내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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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12:0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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