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준 세상에서

웨스커 2016-11-04 8

이걸로 오늘 몇번째일까? 기침을 하자 다시 흥건하게 피가 바닥을 적셨다.
죽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아직까지는 살아있다니 그걸로도 놀라운 일이긴 했다.
빌딩 바깥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과거와는 달리 놀랍게 변화한 세상, 신 서울.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졌다. 팀원 모두가 바라고 염원했던 세상이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팀원 모두가 바랬던 세상이건만 다들 어디있는걸까? 다시 기억을 되돌려보면 손이라도 닿을 듯 생생한데….
다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평소엔 잔소리가 심했던 그 남자가 유독 다시 보고싶어진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잔소리를 내뱉을까? 글쎄, 뭐라고 말할진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더 그립군.

내 삶을 빼앗아간 것은 차원종들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인간들이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모든 걸 걸었는데.
당신들은 어째서 우리에게 악(惡)을 행하는 거지? 내가, 우리가 바랬던 건 이런 미래가 아니었건만.
내가 무엇을 위해 사지를 돌아다니며, 차원종을 죽이고 동료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봐왔던걸까?
후회와 자괴감에 잠시 비명을 질렀다. 입에 다시 약을 털어넣었다.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약들도 있었지만 지금 내 몸 상태 역시 현재의 과학력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물을 머금어 삼키려다가 이내 구역질이 올라와 다시 바닥에 내뱉었다.
속이 메스꺼워지자 다시 한숨을 내뱉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를 하나 꺼내었다. 
안좋을 건 알았지만 뭐, 어떤가? 나의 몸은 이미 폐품이니까. 완전히 버림받은 몸.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자 정신이 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끊을 수가 없다니까.

리모콘을 집어 TV를 틀었다. 아마 지금쯤 뉴스를 할 시간일 것이었다.
요즘 화두가 되는 이야기로는 클로저의 권한이 과도한 것으로 인해 클로저 권한 축소가 제기되었다.
유니온측과 클로저측의 담판으로는 아직 결과가 나지 않았지만 답은 뻔할 것을 알고 있었다.

" 또 한바탕 일이 터지겠어. "

자조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괜찮다. 어차피 이제 내 일이 아니었다.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그렇게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아닌 나날. 하루,하루가 고통이고 목적없는 삶. 이 것이 나의 전부.
그렇게 고통을 곱씹으며 밤을 지샜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유니온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상대적으로 권한이 큰 높은 랭크의 클로저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부족한 클로저의 자리를
뛰어난 젊은 클로저 훈련생들에게 수습요원의 권한으로 현장 경험과 실전 투입을 겸한다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소리이다. 아직까지도 아이들이 그 현장에서 과연 버텨낼 수 있을거라 믿는건가?
아니,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미 어린 아이들마저 소모품으로 보고 있구만. 아직도 바뀌지 않았어.
언제까지 아이들을 희생해야 만족하는 걸까? 내 곁에서 죽어간 사람들로는 부족한가?
나는 전쟁때 나의 나약함으로 인해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나의 나약함, 부족함으로 인해 죽어나가던
나의 동료, 나의 친구. 어른들의 사정으로 다시 지금의 아이들이 그 상황을 겪어야만 하는가?
화가 치솟아 다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모든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연 그녀는 내가 이러고 있는걸 봤으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때처럼 머리 한번 쥐어박고
다시 힘내라며 말해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어차피 지금처럼 사는 것과
사지로 다시 한번 나가는 것의 차이는 별거 없을 것이다. 차츰 죽어가는 몸이라 해서
움직이지 말란 법은 없지. 전자는 너무 환자같으니까.
전화를 걸었다. 소수만이 아는 직통전화. 전화를 걸자 바쁜지 조금 지난 후에야 상대가 받았다.

" 여보세요. "

허스키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지만, 어쩔 수 없지.

" 형, 오랜만이야. "
" 오, 설마…. 네가 전화를 줄 줄은 몰랐는 걸? 무슨 일이야. "

그러자 상대가 반갑다는 듯, 달갑게 나를 반겼다. 과거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인색한 사이가 된 것은 분명했다. 오랜 기간 만나지 않았던 데다가.
상대방이 이제 고위층이 되버렸으니…. 

" 아, 별거 아니고…. 형 정도의 힘이면 나 현장 복귀 시켜줄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

그러자 형은 놀란 듯 나에게 물었다.

" 어째서 다시 현장 복귀를 하려는거야? 넌 충분히 고통과 고난을 겪어왔어. 왜 다시…. "

이럴 줄 알았다. 작전에는 냉철하지만 언제나 주변 사람에게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도 굽히는 법은 없는 동생이었다.

"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어른의 사정이라서. "

그러자 형은 잠시 실소를 내뱉더니 말했다.

" 하하…. 아니, 미안해. 많이 자란 것 같네. "
" 시간이 흘렀으니까. "
" 그럼, 고민해보도록 하지. 원하는 팀은 있어? "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정한 선택지는 하나뿐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 지금 뉴스에 나온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해줘. "

그리고 이어지는 잠시의 침묵.

" …아직 변하지 않았군. 그래도 되겠어? "
" 그래, 원하는 바야. "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전쟁의 최전방에 나서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 아마 나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겠지.
그녀라면 날 지켜보면서 한심하다는 듯 꾸중을 할거야. 난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움직이라 하겠지. 전시 상황에서도 그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줬어.
사람들의 온기를, 마음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줬어. 내게 아름다웠던 세상은 그녀가 만들어준거야.
내가 모두를 지킬 순 없어도 조금이나마 지켜보일게. 아직, 난 포기하지 않았어. 
적어도, 다시 대면했을 때 부끄럽고 싶진 않으니까.

" 그럼, 복귀를 환영하지. 클로저 J. "

당신이 내게 준 것처럼, 그들에게 줄거야.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2024-10-24 23:12:0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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