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악몽을 도는 이야기

스펙트리카 2016-10-04 1

스위칭 안되고, 보스 패턴 조금 개성있어졌다는것만 빼면 악몽도 여느 던전과 다를건 없다.

그래도 악몽을 다른 던전들과 구별지어주는게 있다면, 보스들이 즉사패턴―아니면 즉사패턴 비슷한것―을 가졌다는 점과 악몽 여왕님이 주는 세가지 종류의 패턴이 있겠지. 뭔가 이런 특징들이 거대한 차이점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악몽은 은근히 부캡을 소모하게 만드는 던전이다. 결국 즉사 패턴이 있다는 것은 한번 삑하면 죽는다는 의미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악몽을 돈다. 악몽 정복 횟수는 78회. 저 맨 끝에 있는 강인한 악세사리 상자에는 별 관심도 가지 않는다. 차라리 통돌이 몇개를 주는게 더 성에 찰 것 같다. 단지 마왕의 잔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다. 증차정도 필요하다.


그렇게 랜매를 잡았다.

하피인 나와 슬비, 유리 그리고 제이가 있었다.

제이는 암광 제이였고, 나는 안심했다.

나같이 어중간한 스펙을 가진 유저가 악몽을 돌면 클리어타임은 굉장히 유동적으로 되곤 한다. 그런 내 파티에 암광제이같은게 있으면 굉장히 편해지니까. 물론 슬비가 화면을 가릴걸 생각하면 벌써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지만 이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오세린 펫을 산 이후로는 펫 능력만 사용하면 두번째 결전기를 쓰기 전에 보스가 죽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엔 솔플만 돌다가 파티플레이를 시작한지는 몇주 되지 않았다. 단순히 파티를 해야 보상을 더 많이 준다길래 그런 것이다. 편하기 그지 없었던 악몽 패턴들은 정말 악몽처럼 느껴졌다. 대신 보스는 더 빨리 잡혔다. 애매한 타협점 근처에서 보상을 더 준다는 조건 하나에만 걸고 파티를 한다. 솔플을 할땐 정말 열과 성을 다하지만, 파티를 하고, 강한 유저들을 만나면서 그런 내 성질은 점점 완화되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예전엔 슬비의 위성이 떨어지는동안 그 속에 숨어서 가만히 서있어본적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스는 순식간에 잡혔다. 그래도 적어도 내가 필요할 땐 최선을 다한다. 나 혼자 살아남고 보스의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땐, 초라한 스킬들을 섞으며 초라한 딜량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열심히 딜을 넣어 보스를 잡았다. 난 그정도는 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려고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로딩이 끝나고, 여왕의 악몽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숨을 내질렀다. 유리는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갔고, 슬비는 중력장을 전개했다.

중력장이 워낙 *화려*한지라 앞이 잘 안보였지만, 슬비의 뒷모습이 꽤나 듬직했다.

저런 꼬맹이도 저렇게 열심인데 내가 좀 귀찮고 피곤하다고 뒤에서 팝콘이나 씹고 있을수는 없지.

제이도 곧 튀어나가서 몬스터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나도 팔을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날아올랐다.


여기 악몽은 굉장히 기분나쁜 곳이다. 분위기 자체가 우중충하고 뭐랄까 *보랏빛*같은 느낌이다.

보라색이 안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냥, 여기선 너무 우중충했다.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는 느낌.

그리고 가장 기분나쁜 점은 어디에 있어도 여왕의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

그리고 그것보다 더 나쁜 점은 여왕이 그 눈을 부릅 뜨고 마치 방금 나와 눈을 마주친 느낌을 받았을 때, 여왕의 저주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연찮게도 방금 그 여왕의 시선이 지나갔다. 표식 패턴이다. 슬비의 찰랑이는 분홍색 머리칼 위로 날카로운 새빨간 표식이 올라왔다. 저 표식은 우리가 모두 모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태풍의 눈처럼, 슬비에게 꼭 붙어 있어야만 살을 찢어발/기는 폭풍을 피할 수 있다.


곧 슬비는 파티원들이 자신에게 모일 수 있도록 제자리에 멈춰 섰고, 유리, 제이 그리고 나는 슬비에게 달라붙었다. 블록에 있는 몬스터라고는 저 멀리 황금 스캐빈저 몇마리가 다라서 이 패턴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다.

표식이 희미해져 갔다. 곧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순간은 항상 불안하다. 하지만 파티원들에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억누르고 폭풍이 지나간 뒤에 할 행동을 생각할 수 있다.

표식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굉음이 허공을 갈랐다. 거뭇거뭇한 기운이 땅을 찢었다.

살을 찢는 폭풍이 지나갔다.

그런 폭풍이 지나갔음이 무색하게 슬비는 굉장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리와 제이는 땅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괜찮았다. 내 몸은 하얗게 점멸하고 있었다.

제이는 아무 말도 없이 부활했고, 유리는 채팅창에 "???"만 연발하고 있었다.

분명 슬비에게 꼭 붙어 있었는데 자신이 죽은 것이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하피로서 플레이한다는 것은 ―강캔을 유일한 무적기 삼아 플레이한다는 것은― 항상 남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른 캐릭터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적시간을 확보해서 표식을 피하거나

티나는 표식의 주인에게 겹쳤지만 혹시 모르니까 냉장고에 들어가있기도 하지만

하피는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강캔 하나에만 목숨을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강캔을 쓸 준비를 한다. 항상 표식의 주인의 발 끝에 시선을 고정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한다.


평소엔 이런 습관이 던전을 돌때마다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늘려주는 악습관으로 작용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목숨을 살려줬다.

표식이 희미해지자 슬비는 발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 순간 강캔을 눌렀고, 표식이 폭발했다.

두명이 죽었다.

이건.. 명백히 살인이다. 손가락이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은 이런 *사고*가 날 리가 없다.

슬비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나가서 중력장을 전개했다.

그 뒷모습이 소름끼쳤다. 사람 두명을 교묘하게 죽여놓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는 모습이 소름끼쳤다.

나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슬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착각이 아닐 것이다. 소름끼쳤다. 역겨웠다.

유리와 제이는 무적기가 있음에도 단지 슬비를 믿었기에 그냥 슬비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슬비는 그런 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것이다.


그래도 이 일은 뒤로 하고 다음 블럭에서 사냥을 이어갔다.

블럭의 몬스터들을 전부 없앴지만 블럭 클리어 신호는 보내지지 않고 있었다.

대신 여왕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바닥을 봤다. 바닥은 깨끗했다.

다른 파티원들을 봤다.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내 머리 위를 봤다. 표식이 있었다.


나는 적당한 위치로 가서 가만히 서있었다.

제이와 유리가 나에게 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슬비도 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내면 깊은곳에서 마치 구토를 하듯 뒤섞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혐오감, 분노, 복수심.

아까 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놓고서는 이번엔 살겠다고 내게 달려오는 꼴이 역겨웠다.

그리고 내 머리 속은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저 슬비를 죽여버리자.'


키보드 위에 경직되어 있던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곧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슬비를 죽이려면 필연적으로 제이와 유리도 죽게 될 것이었다.

슬비는 점점 가까워졌다.

아까 죽어서 부캡을 낭비한건 내가 아니었지만, 난 저 슬비가 정말로 역겹게 느껴졌다.

정말로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동시에 제이와 유리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내 손을 떨게 만들었다.


어느새 슬비가 나와 발을 맞춰 서있었다.

난 결정을 내렸다.

점프와 포카드 키에 손가락을 올렸다.


난 성인이 아니다.

나도 내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안다.

결국 나도 저 슬비와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하지만, 저 슬비가.

파티원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파티원들을 죽이고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행동하는 저 역겨운 슬비가.

한번 똑같은 방식으로 죽어봤으면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 슬비는 분명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테고, 당장 다음판부터 또 똑같은 짓을 하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난 그저 지금 저 슬비를 죽여버리고 싶다. 그뿐이다.


곧 표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강캔을 쓸 틈도 주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타이밍에 점프포카드를 써서 대응할 시간도 없이 슬비가 죽게 만들 것이다.

유리와 제이에겐 미안하지만. 난 어쨌든 저지르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세상이 붉게 변하고, 허공이 찢어졌다. 바로 우리 코앞에서.

그 틈에서 여왕의 투사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표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저 펀치에 맞으면 내가 밀려서 모두 몰살당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면 그건 명백히 '사고'가 된다.

난 저 슬비를 '의도적으로' 엿먹이고 싶은데!


여왕의 투사가 이쪽 방향으로 날아온다.

강캔을 쓰려고 했지만 쿨타임이었다.

슬비랑 유리는 반응하지도 못했다. 투사의 주먹이 우리 눈앞이었다.

그때 제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끌고 온다!"


그와 동시에 표식이 폭발했다.

투사의 주먹이 우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난 멀쩡했다. 유리도 멀쩡했고, 젠/장맞게도 슬비도 멀쩡했다. 제이가 순간적으로 옥돌로 투사들을 홀드해서 우리 모두를 살린 것이었다.

유리와 슬비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내 발 끝에 만신창이가 된 제이의 몸이 떨어졌다.

옥돌 자기력 모션중에 표식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제이는 폭풍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난 그 앞에서 주저앉았다. 슬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고 뻔뻔한 저 뒷모습이. 자신이 죽인 제이가 자신을 살려줬지만, 이번에도 아무것도 아닌 양 사냥을 하고 있는 저 뻔뻔한 뒷모습이 내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내 시선은 슬비에게 고정되었다.

내 마음은 분노에 찼다. 난 일어섰다. 그리고 슬비를 향해 걸어갔다. 위상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헤르메스 부트의 위상력 축전지가 과부하되면 나오는 경고음이 들렸다. 어찌됐든 상관 없었다. 다시 벌쳐스의 감옥에 쳐박히게 되든, 이 초커가 작동되어 내 목을 찢어 갈라놓든, 난 지금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저 슬비를 죽여버릴 것이다.


그때 내 어깨에 투박한 손이 올라왔다.

나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제이였다. 부캡을 쓴 모양이었다.

제이는 내 등을 토닥이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블럭 클리어야. 어서 가자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제이는 머쓱한 무표정이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방금 자기를 죽인 사람을 구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경도 안쓰고 있는데 말이다.


"아.. 알겠어요."


나는 당황해서 그냥 적당히 대답했다. 그리고 제이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유난히 넓은 어깨, 넓은 등짝이었다.


날기분에 보스가 정리되고, 슬비는 가장 먼저 거점으로 튀어나갔다.

정말 끝까지 역겨운 짓거리만 하는 모습이었다. 짜증이 났다. 그래도 사라져버린걸 보니 마음이 좀 진정됐다.

곧 유리도 "수고하셨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난 다급하게 제이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제이씨!"


"응? 무슨 일이지, 아가씨?"


제이는 정말 왜인지 모르는 듯한 말투였다.

오히려 그 태도에 내가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당신은 화도 안나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슬비 말이에요. 의도적으로 당신을 죽였다구요."


제이는 그제서야 뭔가 알아냈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젖혔다.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악몽에서는 흔한 일이잖아."


"그런데 당신은 그 슬비를 살리려고 한번 더 죽었잖아요."

나는 거의 소리지르듯이 제이에게 말했다.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아가씨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거야."


이 말을 끝으로 제이는 거점으로 돌아갔다.

작전지에서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위상력으로 몸을 강화해놓으니까 몸에 빗방울이 떨어지는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위상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차가운 빗방울들이 느껴졌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나를 채찍질하는 느낌이었다.


작전 지역에 홀로 남겨져 제이가 있던 허공만을 바라봤다.


아까 슬비에게 느꼈던 역겨움이 올라왔다.

내 자신이 역겨워서였다.


내 다리를 옥죄는 헤르메스 부트를 벗어 던져버렸다.

부트에서는 아까 과부하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난 그 부트를 그대로 버려두고 거점으로 갔다.





*본 이야기는 실화에 픽션을 섞은 이야기입니다

*딱히 슬비 유저들에게 악의는 없습니다. 그저 경험에 근거했을 뿐입니다.

2024-10-24 23:11:3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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