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와 유리가 쇼핑할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02 13

"여! 세하야!"


 머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세상만사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에드워드 머피 대위가 한 말을 정확하게 풀자면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쓴다"라고 해서 우리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일이 점점 커지네!란 뜻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친숙한 사자성어 설상가상을 쓰도록 하자.

이상은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에 해주었던 이야기. 정규수업보다 유익한 내용이다.


".....? 세하야?"


 요점은, 왜 내가 게임에 집중을 하는, 그것도 보스전처럼 중요한 때에 반드시 누가 말을 건다는 것이다.

약간의 학습능력을 통해, 이어폰을 끼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빈도를 낮출 수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 안 들려요-, 세하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고 무언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어필을 대차게 무시하고 이어폰을 뽑는 인물이 셋 있다. 엄마, 선생님, 그리고 잘나신 리더씨.

그리고 여기 이어폰을 뽑는 대신, 이어폰을 무시하고 말을 걸어오는 인물이 있다.

이쪽은 같은 팀원이자 동급생인 유리로, 언제나 기운만 넘치는 녀석이다.


 게임기 액정을 반사경 삼아 노련하게 유리의 얼굴을 살핀다. 내가 이거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주라....


".........."

".........."


 눈이 마주쳤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름돋는 경험 베스트 17에 들어갈 사건이다.

유리는 캬하하라고 공중에 글자를 휘갈기는 듯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의 등짝을 때렸다.


"뭐야! 역시 듣고 있었네!"


  정정한다. 이건 때리는게 아니라 후려치는 거다. 뭐야, 손바닥에 위상력이라도 담았냐? 장법이야? 여래신장이야?

 결국 게임을 포기하고 과장되게 기침을 하며 이어폰을 뽑아 어깨 너머로 노려봐준다.


"너 감정 담아서 때린 거 같다...?"

"응-? 뭐가?"


 너무 상쾌하게 웃고있다. 내가 광고주였으면 벌써 청량음료 광고 제의 들어갔다.

뭐, 이런 녀석이지, 서유리는. 한숨이 폭 하고 조각난다. 게임기를 바라보니 역시나 죽어서 수레에 실려가고 있다.

못난 주인이라 미안하다....

유리는 어느새 옆에 앉아선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걸어온다.


"너 슬비랑 영화 보고 왔다면서? 둘.이.서."

"켁."


 반달진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있어서 열받는다. 이 표정은 그거다.

강아지가 스마트폰을 물어뜯기 전에 한다? 나 지금 한다? 이빨 들어간다?라고 선전포고할 때의 표정이다.

녀석의 긴 머리카락 끝이 볼에서 간질거린다. 좀 빗고오지 그러냐. 꾸미면 돋보이는 미모인데 영 꾸미질 않는 녀석이다.

일단 대답을 회피하고자 고개를 돌리니 유리가 요놈요놈!하고 볼을 쿡쿡 찔러온다.


"어땠어? 진도 좀 나갔어?"

"지, 진도는 무슨. 오랜만에 영화관 구경이나 하고 온 거지."

"솔직하지 않네-"

"시끄러."

"슬비가 말해주던데?"


 영락없이 입 가벼운 아저씨가 말했을 거라 생각했다. 미안해요 제이 아저...형.

뭐 안 봐도 뻔한 이야기다. 새로 나온 영화 보고 왔다고 자랑질 하다가 은근슬쩍 말이 나왔겠지.

우리 거룩하고 위대하신 리더님께선 싸울 때 외에는 허당일 때가 많다.


"나도 공짜 영화 보고싶었는데!"

"넌 '영화'보단 '공짜'에 더 관심 있잖냐."

"올-. 이세하 예리한데!"

"너 길거리에서 티슈나 볼펜 나눠주면 다 받고 돌아다니고 그러지?"

"응! 길거리 볼펜 컬렉션도 만들어놨어!"


 지금이 자랑스럽게 말할 타이밍인가? 내가 이상한 거야?


"아무튼 세하야. 한가하지?"

"야. 방금 전까지 엄청 바빴던 거 안 보이냐? 세계를 구하던 중이었다고, 게임 속에서."

"한가하네!"

"......."

"오늘 내가 장보기 당번이라서 그런데, 좀 도와주라."

"뭘?"

"오늘 하루만 내 짐꾼이 되어줘."

"지금 여기가 눈빛이 촉촉할 타이밍이냐? 안 통하니까 가라."
"에- 매정해!"


 너무 밀착해오잖냐. 좀 떨어지라고. 마닐라에서 완육된 탐스러운 파인애플로 날 밀지 말라고.

그거냐? 금단의 과실이냐? 손대면 안되지만 남자라면 손댈 수밖에 없는 선악과야?

아니, 침착하자. 이세하, 넌 사춘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걸 혼동하고 있어.

이건 비치발리볼이야.... 비치발리볼... 여름...해변....수영복.... 수영복....


"............"

".....세하야?"

"어."

"아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에?!"

"일단 떨어져."

"흐응....."


 살짝 떨어진 유리가 다소곳하게 무릎에 손을 올리고는 초롱초롱 이쪽을 올려다본다. 정말 귀찮다.


"그래서, 가줄거지?"

".......너 그거 알아? 세상에는, 짬순이라는게 있어..."

"여자애 이름 같다!"

"그러니 여기선 제일 어린 테인이가 가는게 맞는 거야."

"난 세하랑 가고싶어!"

"......."


 정말 귀찮은 녀석이다. 왜 나야. 그렇게 귀여우면 특경대 아저씨들 아무나 꼬셔서 짐꾼으로 부려먹으라고.

유리가 최근에 특경대의 아이돌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지라 어째 더 기분이 불편하다.

출처가 송은이 누나라 영 신빙성이 없지만서도. 그러면서 왜 자기가 아이돌이 아니냐고 불평했다. 어쩌자는걸까, 그 사람은.


 뭐, 마침 신작게임이라던가를 살피러 가려던 참이다. 겸사겸사 어울려주자, 겸사겸사.


"뭐, 갈까."

"이야- 역시 세하! 완전 남자네!"

"뭐. 이제야 좀 남자로 보이냐?"

".......에?"

".......엉?"


 이불을 뻥뻥 차고 후회할 일이 또 생겼군. 내 흑역사는 매일매일 절찬 갱신 중입니다.

슬쩍 얼굴을 붉힌 유리가 볼에 붙은 반창고를 긁적거린다. 제발 거기서는 입 좀 다물지 말아줘... 차라리 욕을 해라.

설렁설렁 같이 거리를 걷던 중에 물어본다.


"근데 뭘 살지는 기억했어?"

"기억하다니?"

"너 막 싸다고 충동구매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에이- 아니지! 나 전단지 보고 심사숙고해서 목록을 고른 거야!"

"그리고 까먹어서 집에 전화하는 흐름인가?"

"너무 바보취급한다!"


 상쾌하게 웃으면서 호쾌하게 옆구리를 꼬집는다. 내가 잘못했다. 비장째로 뜯겨나가는줄 알았다.


"저녁메뉴는 뭔데?"

"왜? 먹으러 올래?"

"뭘 내가 먹으러 가냐."

"그럼 사주는 거야?"

".......어떻게 여기서 나한테 얻어먹는 전개가 되냐?"

"4급 공무원님!"

"너도잖아......"


 또 기분좋게 웃는다. 가끔 유리는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 나랑 똑같은 나이인데 근심이나 걱정이나 고민은 하나도 없는 깨끗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런 밝은 성격이 사람을 모이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건 전형적인 주인공의 능력 아닌가... 서유리, 무서운 아이.


"세하야 그거 아니?"

"뭐?"


 사실 마트 안에 사람이 줄지어 서있을 때부터 좀 걱정되긴 했다. 이거 짐꾼 역할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분위기인데....

마침 유리가 본론을 말한다.


"실은 오늘 한우가 반값이야!"

"호오."

"그런데 한 사람당 살 수 있는 양이 제한되어 있어."

"아하. 그랬군. 역시 돌아갈래."

"왜!?"

"아줌마들 사이에서 버틸 자신이 없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쓸데없이 늠름하기는. 반해버리겠다 야.


"오, 좋은 생각이 났다."

"뭔데?"

"네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난 게임을 하는 거야. 시간 때우기 딱 좋네."


 이어폰을 꺼내며 놀리듯이 말하자 생글생글 웃으며 한쪽을 가져갔다.


"싫다 그러면 나머지 한쪽도 가져갈 거다?"

".........맘대로 해라."


 게임기를 들고있으니 마음이 안정된다. 역시 내 최후의 안식처...

게임을 하고있는 동안은 아줌마고 차원종이고 엄마고 학교고 모두 잊을 수 있으니까.

게임은 나에게 뭘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전원을 켤 때까지, 그저 묵묵하게 기다려줄 뿐이다.

덕분에 며칠이고 버틸 수 잇었다. 만약 게임의 신이 눈 앞에 있었다면, 난 당장 삼천배를 올렸을 거다.


"뭐야, 하루 종일 게임하는 것치고는 영 못하네?"


 또 녀석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샌달우드향이 코끝을 스친다.


"시끄러."

"왜 공룡을 잡는 거야?"

"음..... 가죽이나 고기가 필요하니까?"

"왜 그렇게 멋*** 없게 창으로 콕콕 찔러?"

"그럼 이런 엄청 큰 공룡을 상대로 멋지게 싸울 수 있겠냐. 몇대 맞으면 죽는다고."

"오, 방금 엄청 멋있게 피했어."

"봤냐? 얘가 이렇게 고개를 들고 달려올 때는 내려앉는 패턴이거든."

"흐응-"


 주위가 충분히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겹쳐 소란스러워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커졌다.


"아, 고기 굽는 거야?"

"그래. 잘 굽는게 중요해."

"나 해볼래!"

"못 들었냐? 잘 구워**다고."

"나 고기 완전 잘 구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그렇게 도란도란 떠들다보니 어느새 줄이 짧아져 판매대 앞까지 설 수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리는 결국 고기를 전부 홀랑 태워버렸다.

게임이 엉터리라고 성질을 부리기에 엉터리인건 니 컨트롤 실력이라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방금 전까지 가상의 고기를 홀랑 태운 자칭 고기굽기의 달인 '웰던 서유리씨'(웃음)는 고기를 보자 흥분해서 잔뜩 주문을 했다.


"아, 얘도 똑같은 걸루요! 따로 계산하는 거에요!"


 아줌마는 능숙한 손길로 고기를 저울에 올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머나- 학생 남자친구랑 사러 온 거에요? 귀엽네-. 청춘이야?"

"............헤?"

"아유 부끄러워하긴."


 깔깔 웃으면서 가격표를 붙여 건네준다. 난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까 안 들려 안 들려.

유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저언혀 궁금하지도 않다.

우여곡절 끝에 고기를 사고 뒤를 돌아보니 아까보다 줄이 길어졌다. 한우님을 영접하려는 신도들이 이렇게나 많다.

유리는 특정 부분이 좁은 틈을 빠져나가는데 매우 어려운 체형인 탓에, 사람이 많으면 허둥대는 경향이 있다.

어쩔 수 없어서 손을 잡아끌어 인파를 빠져나왔다.


".........세, 세하야?"

"슬슬 피곤하니까 나머지도 마저 사서 후딱 가자고."

"..........응."


 손을 놓을 생각이었는데, 유리쪽에서 약간 힘을 주어 마주잡아왔다. 살짝 만져지는 굳은 살 사이로 부드럽게 손금이 얽힌다.

그 손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서,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않나 하고 속으로 열심히 변명했다.


"아, 맞아. 기념사진이라도 찍자!"

"오늘 내 생일이었나?"

"에이 뭐야! 당연히....에? 세하 생일이야?"

"당연히 아니지 바보."

"나, 나도 알고 있었어!"


 역시 바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사진을..."

"주부를 뚫고 고기를 쟁취한 기념으로! 동참해 전우님!"

"귀찮아....."

"좋잖아! 자, 빨리 빨리. 붙어봐. 고기 들고 웃어!"

"하아....."


 질풍노도의 기세다. 손쓸 틈도 없이 소위 말하는 얼짱각도로 같이 사진을 찍고말았다.


"자, 전송-."

"........응? 뭘 어디에 보내?"


 문득 불안해져 물으니, 덧니를 드러내며 살짝 찡그리듯 짓궂게 웃는다.


"슬비한테."

"..........."






*


슬비와 잡답하던 이야기에 이어지지만 이번에는 세하유리입니다.


내 동급생과 동급생이 완전 수라장.


11월 1은 한우데이로, 정말로 한우가 반값입니다. 주부들이 가족들을 위해 전쟁을 하는 날입니다.

2024-10-24 22:22:3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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